불현듯(오은) : 오늘은 사실 저희가 주제를 정하지 않았어요. 대본에는 '나중에 정합시다'라고 적혀 있네요.(웃음) 이번 시간에는 특별히 책 소개를 한 뒤에 끝에 가서 제가 주제를 정리해볼게요. <어떤,책임>은 주제가 있어서 좀 더 뾰족해지는 것도 있지만 자유분방함은 좀 사라질 수 있는데요. 오늘처럼 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것 같아요.
프랑소와 엄이 추천하는 책
이예은 저 | 민음사
브런치 9회 대상 수상작이에요. 보니까 대상작이 여럿이더라고요. 그 중 저에게는 이 책이 가장 눈에 들어왔어요. 너무나 주변에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궁금했거든요. 이 책은 브런치 연재 당시 제목이 '일본 콜센터에서 520일'이었다고 하고요. 작가님은 2020년 1월, 콜센터에서 일을 시작했고, 이후 퇴사를 하시고 2주 동안 집중적으로 브런치에 글을 올려 대상에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선정 후에 단행본 작업을 위해 추가로 원고를 쓰셔서 이 책에 나온 거죠.
작가님이 번역 일을 하신 적이 있어서 그런지 문장이 아주 매끄럽고요. 과하지 않은 게 저는 되게 좋았어요. 그러니까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뭔가 뾰족한 문장이 아니고요.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따뜻한 그런 문장도 아니거든요. 그냥 담담한데, 이것이 진짜가 아닌가, 이게 가장 팩트에 가까운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 에세이가 참 좋았습니다.
특히 도입부를 재미있게 읽었어요. 어떻게 콜센터에서 일을 하게 됐는지 과정이 담겨 있는데요. 우선 작가님은 20대 때 원서만 냈다 하면 합격이었대요.(웃음) 그래서 한국에서는 비영리 단체의 번역일부터 시작해 호텔 홍보팀에도 합격해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마의 3년 차 고비를 넘기지 못했어요. 대리 진급에 실패한 이후에 사표를 쓰고 일본으로 갔고요. 다행히 취업 운은 해외에서도 이어져서 일본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프리랜서로 번역일도 하고, IT 회사에서 번역팀을 이끄는 프로젝트 매니저로도 일하게 됩니다.
그러다 일본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죠. 남편이 1년간 싱가폴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되자 작가님은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둡니다. 다시 돌아와도 지금까지의 취업 운이 작용할 거라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2019년 여름, 일본에 다시 왔는데요. 나이 서른의 무직자를 환영해 주는 회사는 없었어요. 계속 취업에 실패를 하고요. 체념하던 찰나에 한 취업 에이전시로부터 인터뷰 제안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여행사 콜센터 상담원 일이었던 거예요. 그렇게 시작을 한 거죠.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진상이 있어?'라면서 충격적으로 놀란 케이스는 없었는데요. 없다는 것 자체가 충격적이었어요. 그런데요. 오히려 놀랐던 것은 너무나 친절한 고객 분에 대한 에피소드였거든요. 작가님도 이 콜센터 1년 반의 동안 경험을 하면서 이런 작은 감동 에피소드 몇 개를 품었기 때문에 이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는 『콜센터의 말』처럼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책으로 만날 때 얻는 것이 정말 많다고 생각했어요.
캘리가 추천하는 책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저 / 구유 역 | 은행나무
작품 소개에 앞서 '베네수엘라'라는 공간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베네수엘라는 남아메리카 북쪽에 있는 나라예요. 석유 매장량이 엄청난 곳이어서 한때는 베네수엘라가 아주 잘 살았어요. 오일 머니가 엄청났었죠. 그런데 국제 유가가 폭락하는 일이 발생하고, 나라 전체가 경제 공황에 빠집니다.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요. 국민들의 삶이 엄청나게 피폐해졌어요. 그런 와중에 국가 권력, 공권력들이 범죄 집단과 결탁을 해서요. 지금도 검색을 해보면 베네수엘라의 살인율이 세계 1위라는 내용이 종종 나와요. 폭력 집단이 국가를 지배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현실에서 보여주는 그런 공간이죠.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베네수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망명한 사람들이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하고요. 작가 역시 23살이던 2000대 초반, 베네수엘라를 탈출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에서 지금 살고 있는 거예요. 『스페인 여자의 딸』은 주인공인 '아델라이다 팔콘'이라는 인물이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에 살다가 스페인으로 탈출하는 이야기이거든요. 작가와 주인공의 공통점이 많이 보이죠.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소설을 이 한 문장으로, '주인공이 베네수엘라를 탈출해서 스페인으로 가는 이야기'라고 하는 게 너무나 부족하게 느껴져요. 소설을 보면 너무나 폭력적인 장면들이 많거든요. 그것들이 작가의 경험에서 발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슬프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되게 무겁게 생각하면서 읽었어요.
소설의 첫 문장이 이렇습니다.
'엄마를 묻었다.'
주인공 아델라이다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요. 사실 그에게 가족이라고는 엄마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주인공은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커다란 비극을 겪고 있는 상황인데 장례를 치르고 집에 오자마자 아델라이다는 자신에게 더 큰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됩니다. 집이 '보안관'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치안을 담당한다는 미명하에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하고 사유 재산을 착취하는 범죄 집단에게 점령당한 거예요. 결국, 아델라이다가 이들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고, 다른 곳도 아닌 '내 집'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쉽지만은 않은 얘기지만 그럼에도 같이 읽어보고 싶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있어요.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이 이야기가 한 나라, 한 시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어디에나 일어났었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세상에 믿을 수 없는 폭력들이 일어나고 있죠. 그 안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나의 일로 데려오는 노력도 되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이 소설을 같이 읽고 싶었어요.
불현듯(오은)이 추천하는 책
전국 성인 문해교실 할머니·할아버지 시인 100명 저 | 창비교육
매년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는 시화를 공모를 한대요. 지난 10년 동안 해온 것인데요. 매년 거의 6천 편 정도가 투고된다고 합니다. 그 수많은 작품 중에서 고른 시화 100편을 엮은 책이에요. 저도 우연히 평생교육원에 강연을 하러 간 적이 있어요. 막 한글을 깨치고 시를 쓰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분들이 계셨거든요. 그 당시의 벅차오름이 생각나요. 표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지금까지 도구가 없었던 분들의 글들을 보는데요. 편편이 다 그 분들의 삶이 정말 쥐어 짜듯이 들어가서 뭔가 진액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특히 기억에 남았던 작품 중 하나는 '허옥순 할머니'가 쓴 「사랑」이라는 시였어요. 10행 정도 되는 짧은 시예요. 눈만 뜨면 아기를 업고 밭에 가서 풀 베고 하던 일상들, 종일 일하는 장면이 쭉 나오는데요. 마지막 행이 이렇게 끝납니다.
'사랑받을 시간이 없더라.'
그러니까 매일 노동이 가득한 삶을 사신 거예요. 그러는 동안 내가 표현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만 품고 있다가 한글을 깨친 뒤에 드디어 말을 하실 수 있게 된 거죠. 물론 일상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이 가능하지만요. 나 혼자 있을 때, 글을 쓸 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숙고할 수 있잖아요. 숙고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 뭔가를 끼적일 때 더 많이 드러나기 마련이고요.
바로 그런 것들이 모인 책이 이 책이예요. 저도 20년간 시를 써왔지만 '이런 게 시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툭툭 던지는 것 같으면서도 듣는 사람 안에 뭔가가 맺히게 되는 이런 말들이 결국에는 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1부는 「멧돼지 보낼게」라는 제목으로, 시인 분들의 유머가 굉장히 도드라지는 시들이 실려 있어요. 2부는 「네 목소리가 듣고 싶은 겨」라는 챕터로, 배우지 못한 한 서러움들이 가득 담긴 시들이 실려 있습니다. 3부는 「갈 데 많아서 좋네」예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한글을 깨치고 나서 달라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일상을 담은 시들이 여기에 들어가 있고요. 여기에는 특히 자신감과 기쁨이 우러나는 시들이 많이 담겨 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사는 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겠죠. 그러다 난생 처음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서 쓴 글들이에요. 보면 시의 제목에 '나', '내'라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 있어요. 이전까지는 누군가를 돌보는 일, 도와주는 일,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애쓰는 일 같은 것들만 생각하다가 이제는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하면서 말이죠. 따라서 시적 화자가 나인 경우도 당연히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저는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됐고요. 그 어르신들의 말맛과 글맛을 느끼고 싶은 분들께 꼭 이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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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