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루가 읽은 그림책] 『두 여자』
해방된 독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 이 과정이야말로 그림책 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일지 모른다.
글ㆍ사진 무루
2023.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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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많은 그림책 작가들이 '완벽한 그림'을 지양한다. 그림책 작가라는데 그림을 못 그리네 싶다면 오해다. 저런 그림은 나도 금방 그리겠네 싶다면 착각이다. 그림책의 그림은 의도적으로 빈틈을 가지고 있다. 기교를 뽐내는 완벽한 그림은 독자에게 감탄을 자아낼지언정 독자와 대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여럿이 모여 함께 그림책 읽을 기회가 생기면 머리 위로 물음표가 잔뜩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고른다. 좋은데 무엇이 좋은지는 도통 모르겠는 이야기. 가슴은 두근거리는데 머릿속은 온통 안개로 가득 차는 이야기.


애초에 그림책은 모호하기로 작정한 장르다. 간결한 그림, 단순한 글, 어긋나는 목소리, 너른 여백이 함께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모호성은 독자에게 보다 능동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작가 존 클라센은 독자 각각의 해석을 통해 완성되는 이야기의 제3 지대를 ‘중간 지점middle spot’(『Picturebook Makers』, dpictus, 2022)이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 답은 각자 찾아야 한다는 것. 의도적인 빈틈으로 짜인 미로에 들어선 독자들은 고뇌에 차서 묻는다. 이렇게 읽는 게 맞나? 그러면 작가들은 황희 정승 같은 얼굴(?)로 답한다. 그 해석도 맞고 저 해석도 맞다.



그림으로 능숙하게 상징의 수수께끼들을 만들어내는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역시 그림의 완벽함이 해석의 범주를 좁힌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림은 때로 수천 단어를 대체할 수 있고, 독자를 시각적인 단어 게임에 초대할 수 있다. 『두 여자』가 그 좋은 예다. 폴란드 시인 유스티나 바르기엘스카의 글로부터 출발한 이 책은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책들 가운데에서도 꽤 난이도 높은 수수께끼가 분명하다.


엄마가 어린 딸에게 쓴 한 통의 편지로부터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엄마와 딸의 양가적 경험을 토대로 하는 상호 관계의 복잡함에 대해 말한다. 한때 딸이었고 이제는 딸 가진 엄마가 된 한 여자의 고백 속에는 가벼운 잔소리와 무거운 염려가, 위험의 경고와 보호의 다짐이, 결속의 갈망과 분리의 결심이 들어 있다. 모성을 둘러싼 모녀의 감정은 비비언 고닉의 문장처럼 모순적이다.


“엄마와 함께 있으면 여러 가지 확실한 문제가 있다. 숨이 막힌다. 그래도 안전하다.”

-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중에서


모녀 관계 속에 내재된 이 복잡한 정서를 흐미엘레프스카는 장미, 손수건과 파리, 멧돼지, 거울, 실과 가위, 차고 기우는 달, 손금, 입술 같은 상징들로 엮었다. 접지선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이 두 여자 사이를 잇거나 가르고, 희미하게 흩어지는 문장들은 수수께끼 같은 그림들 사이로 스며든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불안이 떠오른다. 엄마는 어린 딸을 품에서 떠나보내야 하고, 딸에게 찾아올 자유는 언제나 그의 바람보다 한참 늦다. 흰 손수건은 더러워질 것이고, 성급하게 벗겨낸 안락함 뒤에는 온통 붉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둘 사이를 잇는 운명의 붉은 실은 서로를 지키는 가장 안전한 줄인 동시에 상대를 옭아매는 무기가 될 것이다.


이미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여성 독자에게 특히 『두 여자』를 읽는 경험은 각별하다. 책을 읽는 동안 그림이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보살핌의 상징, 유대와 분리의 암시를 선명히 감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읽는 동안 긴장과 불안이 또렷이 전이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두 작가가 딸에게 하는 이 진심 어린 고백이 얼마나 익숙한지, 또 얼마나 값진지 역시 선명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두 여자』에서 발견하게 될 여성과 모성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수만큼 다양해질 수 있다. 시각적 은유의 세계에서 그림은 독자 저마다 가진 경험의 프리즘을 통해 해석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림들도 천천히 반복해서 보는 동안 해석의 단서들을 찾을 수 있다. 몇 개의 단서가 모이면 그때부터는 논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작가의 의도보다 독자의 해석이 더 중요해진다. 논리가 세워지면 이야기는 곧 완성된다. 점이 선에서 면을 이루고 공간을 만들듯이. 존 클라센이 말했던 ‘중간 지점’이 바로 여기다. 해방된 독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 이 과정이야말로 그림책 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일지 모른다.


이미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어떤 그림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때마다 ‘아직은 좋아하는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는 책’이라고 답한다. 이때 ‘아직’이라는 부사 속에는 어떤 기대가 있다. 해석의 논리 하나를 구축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좋아하는 마음의 이름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리라는 기대. 내 인식의 지형이 아직 닿지 못한 미지를 향해 한 뼘 더 넓어지리라는 기대. 이런 일들이 사실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이야기가 언제나 하는 일이니까. 세상의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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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봄

2024.01.02

독특한 그림. 이보나, 처음엔 한국인 인줄 알았음 ㅎ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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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읽기 안내자. 비혼이고 고양이 '탄'의 집사이며, 채식을 지향하고 식물을 돌보며 산다. 그림책 『섬 위의 주먹』, 『마음의 지도』, 『할머니의 팡도르』를 번역해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