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을 말하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과 틀어지면 세상에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가족에게, 사회에, 배경에 불평하곤 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우리 밖에서 찾는 것과는 반대로,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물었습니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7.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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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가까이 두십니다. 흘러가는 세월에 잠도 같이 많아지셔서인지, 책 펴놓고 잠드시기가 일쑤지만 여전히 책을 가까이 두십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을까요. 친구들 불러 모아 넓지도 않은 아파트를 운동장처럼 뛰어놀던 시절에도 그러셨습니다. 방 세 개. 작은 집 여기저기를 천방지축으로 어지럽히고 놀았지만, 책이 많았던 아빠 방엔 잘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지 말라고 따로 말씀하셨던 것은 아니지만, 책이 많은 방은 아빠를 닮아 조용했고, 신나게 떠들고 놀다가도 그 방에만 들어서면 왠지 저도 모르게 조용히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조용히 창문 틈새로 스미고, 바람도 가만히 나뭇잎만 스쳐 지나가는 날들이면 언제나 책 한 권 펴고 자리에 앉아 계시고는 했습니다. 그런 날들처럼, 조용하고 깊은 분이십니다. 평소 부모님께 말도 많이 하고, 장난도 많이 치는 편이었지만 책을 읽고 계실 때는 왠지 어려웠습니다. 의자 다리 옆에 앉아, 무얼 보시는지 여쭈어보기는 했었지만,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레 시들해져 의자 다리에 기대 잠들곤 했던 기억도 납니다.

시를 자주 읽으셨습니다. 가끔 옆에 기대앉은 제게 읽어주시기도 했지요. 김소월, 천상병, 서정주, 윤동주……. 시를 조금이나마 즐겨 읽는 것은, 어렸을 적 아빠가 들려주신 시들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읽으시던, 좋아하셨던 시는 천상병 시인의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살짝살짝 뒤에서 엿보던 책에는 그의 이름이 자주 보였고, 아빠는 그 사람의 시를 어린 제게 자주 읽어주시기도 했습니다.

『천상병을 말하다』. 저는 아빠가 좋아하시던 시인이 어떻게 말해지는지 궁금했습니다. 시인의 주변 사람들이 그의 삶을 기려 기억을 적어둔 책이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저는 시인과, 그가 보았던 세상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습니다.

1993년 4월 28일, 시인은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잠시 지상으로 왔던 소풍을 마치고 말이지요. 그의 몸은 오래전에 겪었던 옥고로 이미 많이 허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그가 옮겨왔던 발걸음들을 돌아보면서, 저는 그가 겪었을 그 모든 고통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단지 같이 술자리를 몇 번 했던 사람의 수첩에서 시인의 이름이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인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취조를 받았습니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 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네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시인의 시, ‘그날은-새’ 중의 일부입니다.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라는 표현에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몇 번에 걸쳐 받았던 전기고문에, 시인은 자식도 가질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당했던 온갖 비합리적이고 온당하지 못한 처사에 관련 없는 저조차도 화가 치밀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세상에게 그는 물질로도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빈한한 삶이었습니다.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행복’이라는 시에서 그는 그렇게 적었습니다. 세상에 한 맺힌 울음만을 토해내도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설움과 고통만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구는 마치 성경처럼 담담했습니다. 담담함을 넘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생각과 틀어지면 세상에 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말하지만, 돌아보면 저부터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족에게, 사회에, 배경에 불평하곤 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우리 밖에서 찾는 것과는 반대로, 시인은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물었습니다.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 (…) /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라고, 시인은 시 ‘행복’에서 말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무엇 하나 받은 것 없는, 받기보다 빼앗기기만 한 그가 하늘에 감사한다고 말하는 모습에 저는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진정으로 “행복”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 밖이 아닌 안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뒤부터 늦게 귀가하게 되어서 아빠가 읽어주시는 시들을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요즘도 가끔 밤늦도록 책을 펴고 계신 모습을 보면 그날들과 함께, 제가 들었던 많은 시와 시인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천상병을말하다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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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맘

2007.11.17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와 책을 읽는 아빠, 책을 읽어주는 아빠, 시을 읽어주는 아빠를 가진 사람들은 많이 없다고 봅니다. 아이들 방문을 열면 얼마전 구입한 3칸의 책꽂이가 있습니다. 아이들 공부책상에서 바로 마주하고 있기에 공부를 하다가 돌아서서 책꽂이의 책을 꺼내볼 수 있도록 했어요.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으로도 독서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상병님의 삶속에 혹 잔인한 인간들을 접하면서 안타깝고 마음아팠을 천상병님을 늦게나마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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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1930년에 태어난 천상병 시인은 1945년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정착했다. 1949년 마산 중학 5년 재학 중 당시 담임 교사이던 김춘수 시인의 주선으로 시「강물」이 [문예]지에 추천되었다. 1950년 미국 통역관으로 6개월 근무하였으며, 1951년 전시 중 부산에서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하여 송영택, 김재섭 등과 함께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였다. [문예]지 평론 ‘나는 겁하고 저항할 것이다’를 전재함으로써 시와 평론 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 1952년 시 「갈매기」를 [문예]지에 게재한 후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1954년 서울대 상과대학을 수료하였으며, 1956년 [현대문학]지에 집필을 시작으로 외국서적을 다수 번역한 바 있다. 1964년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비서로 약 2년 간 재직하다가 1967년 동백림 사건(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약 6개월 간 옥고를 치르고 무혐의로 풀려난 적이 있다.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음주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 정신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그 사이 유고시집 『새』(조광)가 발간되었으며, 이 때문에 살아 있는 동안에 유고시집이 발간된 특이한 시인이 되었다. 1972년 친구 목순복의 누이동생인 목순옥과 결혼한 후 1979년에 시집『주막에서』(민음사),『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오상사)를, 1985년에 천상병 문학선집『구름 손짓하며는』을, 1987년에 시집『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일선)을 출간했다. 1988년 간경화증으로 춘천 의료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 도중,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통고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회생하였다. 1989년 시집『귀천』(살림), 공동시집『도적놈 셋이서』(안의), 1990년 수필집『괜찮다 괜찮다 다 괜찮다』(강천), 1991년 시집『요놈 요놈 요 이쁜놈』(답게), 1993년 동화집『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을 간행하였다. 1993년 4월 28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