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인간은 물질주의적이지도, 이기적이지도 않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일말의 회의가 없지 않은, 과연 그럴까 싶은 사회적 신념들이 전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경제성장보다는 분배의 정의(正義)가, 경제성장과 분배의 정의보다는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는 게 더 중요하다.
2008.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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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해야 건강하다-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김홍수영 옮김, 후마니타스, 2008)는『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정연복 옮김, 당대, 2004)에 이어 두 번째로 번역된 영국의 사회역학자(社會疫學者) 리처드 윌킨슨(Richard G. Wilkinson)의 저서다. 윌킨슨의 두 번째 한국어판은 현대사회가 갈림길에 서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었고, 그 결과 인간 사회의 물질적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가장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삶의 질과 물질적 생활수준의 관계는 그렇게 밀접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실질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경제성장이 가져오는 약발의 효과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더러는 혜택보다는 재앙을 안긴다. 반면, “물질적 여건만이 아니라 심리적?감정적 상황 등, 인간의 환경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표”로서 건강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건강이 매우 중요한 사회 지표인 이유는, 한 인간이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하며 고통스러워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질병에 걸릴 위험의 정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강은 불평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불평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그저 건강에만 국한하진 않는다. “심한 사회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불평등한 사회는 사회적 박탈감과 관련된 온갖 사회 문제들로 고생하고 있다.” 건강 수준이 낮은 사회는 강력범죄발생률과 10대의 임신비율이 높다. 아이들의 수리와 언어 능력이 떨어지며, 신뢰와 사회적 자본의 수준도 낮다.
윌킨슨이 인용한 많은 연구는 역학적(疫學的) 관점에 바탕을 둔다.『평등해야 건강하다』는 건강과 불평등에 대한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검토한다. 이 책이 그렇다고 건강 안내서는 아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을 다루진 않아서다. 그 대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개인과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밝히기 위해 건강불평등에 관한 연구들을 활용한다.
“이 책에서는 개별 인간의 건강 상태가 아니라 전체 사회나 전체 인구의 수준에서 각 집단의 건강 격차를 살펴볼 것이다. 개인의 상황에 따라 건강 수준이 우연히 달라지는 경우가 아니라, 더욱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고 신뢰도가 높은 유형과 인과관계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아울러 우리 모두의 주관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질을 증진하는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다.
『평등해야 건강하다』의 핵심 요지는 이렇다. “더 많은 평등이 가져다주는 이득을 이해하려면 인간이 불평등과 위계 서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와 같은 정치사상가들의 저술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원숭이들의 사회생활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등과 불평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대비된다. 불평등이 “더 자기중심적이고, 덜 친화적이며, 반사회적이고, 스트레스를 더 받게 하고, 폭력 수준을 높이며, 공동체적 결속을 약화시키고, 건강을 악화시키는 사회 전략들을 부추긴다”면, “평등한 사회는 친화적이며, 덜 폭력적이고, 상호 지지적이며, 포용적이고, 좀 더 나은 건강 상태를 가능하게 한다.”
윌킨슨은 건강에 미치는 물질적 궁핍의 효과가 잦아들자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심리적 요인들을 주목한다. 심리사회적(psychosocial)이라는 표현은,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의 감정상태는 사실 사회적으로 유형화되며, 개별적인 우연보다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그는 심리사회적 위험 요소로 낮은 사회적 지위, 빈약한 사회적 관계, 초기 아동기의 경험 등 세 가지를 꼽는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인간은 대우받고, 존중받으며, 친구를 사귀고, 초기 아동기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 심리사회적 요인들은 어째서 인류가 물질적 성공을 이뤘으면서도 삶의 질은 그만큼 개선하지 못했는지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사회적 경험을 하거나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에서 물질적 차원만이 아니라 심리적 차원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일말의 회의가 없지 않은, 과연 그럴까 싶은 사회적 신념들이 전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경제성장보다는 분배의 정의(正義)가, 경제성장과 분배의 정의보다는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는 게 더 중요하다. 경제성장은 건강한 사회의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필요하지만, 경제성장의 중요성은 거기까지다.
“무작정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근거 없는 허상을 붙잡는 것과 같으며, 엄청난 환경 비용까지 지불해야 할 것이다. 식수 고갈, 환경오염의 증가, 지구 온난화, 사막화, 미네랄과 여타 천연자원의 오염, 경제성장을 위해 배출된 쓰레기, 공해 등이 점점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한편, “사회가 부유해질수록 행복과 복지의 수준은 절대 소득보다 상대 소득과 사회적 지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러니까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건강이 안 좋은 사람들의 행동은 그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포함해서 사회 전체의 특성을 단적으로 반영”할 뿐더러 제 것을 지키려는 강박과 불안은 수명 단축으로 이어진다.
또 “소득 불평등보다 사회적 자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소득 불평등이 사회적 자본을 피폐하게 만든 것이다. 불평등한 사회는 불평등 때문에 생기는 불의들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형편없는 사회적 자본도 불평등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다. 심각한 불평등을 겪고 있는 사회는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그런 징후들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사회는 “약자가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강자들이 배를 채우는 사회”다. 여기서 약자는 어느 고교의 공부 못하는 90%이고, 강자는 상위 10%다. “이런 사회에서는 하층 차별이나 편견처럼 자기의 우월감을 표출하려는 다양한 지배 행동이 판을 칠 것이다.” 실제로 그런 행동은 ‘만발’한다.
투표참여에 강제성이나 반강제성이 없는 것을 전제로 “평등한 사회일수록 더 많은 사람이 투표에 참여한다.”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덜 도와주고, 하급 종업원을 덜 배려하며, 학교 운동장에서나 가정에서 더 자주 싸우고, 취약 계층들에게 더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맞다.
우리는 어쩌다가 시장을 맹신하고 떠받들게 되었지만, “시장은 덜 사회적인-때때로 반사회적인-심리를 조장한다.” 우리는 거꾸로 가려하고 있으나, 윌킨슨은 “의료보험, 교육, 공공 교통과 같은 부문을 시장메커니즘에서 분리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렇다고 윌킨슨이 시장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뭘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덜 위계적인, 그리고 좀 더 포용적이며, 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치를 갖는 사회적 환경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시장에 압도되지 않을 것이다. 시장은 앞으로도 우리 생활의 많은 영역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겠지만, 시장 논리를 부채질하고 시장을 지긋지긋한 감독관으로 만드는 불평등의 힘을 억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장의 마수로부터 어느 정도는 해방될 수 있다.”
“불평등의 아주 작은 변화로도 건강 수준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불평등을 줄이나? 윌킨슨은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의지”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정책적 “시도들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정부가 집권하게 된다면 쉽게 무산되고 만다. 소득 분배를 개선하는 여타의 대책들은 한번 시행되면 바꾸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퇴보하기는 여전히 쉽다.”
『평등해야 건강하다』에 나오는 두 개의 에피소드는 내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다. 둘 다 축구와 관련 있다. 우선, 책에 인용된 사이먼 찰스워스라는 사람의 말이다. “분명히 노동 속에는 우리 사회 노동자들에게 뿌리 깊은 영향을 미치고, 공포와 불안정과 환멸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노동자 밀집 거주지역에서 나서 자란 나는 약간의 반(反)노동자 정서가 있다. 초등학생 때 동네에서 축구공으로 공놀이를 하면, 지나가던 ‘공돌이’는 예외 없이 공을 뻥뻥 걷어찼다. 내 공은 더러운 물이 흐르는 도랑에 빠지거나, 남의 집 담 안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셋방살이를 한, 많을 때는 세 가구나 되었다,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노동자의식이나 계급의식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또 하나는 씁쓸한 기억이다. “두 번째 기사는 MRI 촬영을 이용한 어느 실험에 대한 것이다. 이 실험에 따르면, 사회에서 배제되었을 때 받게 되는 정신적 고통은 두뇌의 특정한 부위를 자극하는데, 그 위치가 육체적 통증을 느낄 때 반응하는 부분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런데 이 실험에 사용된 배제의 정도는 그리 대단치 않았다.
“이 연구자들은 그저 컴퓨터 게임을 이용한 모의실험 도중 실험 대상자를 아주 조금 배제했을 뿐이었다. 컴퓨터 공놀이 게임에서 실험 대상자들은 가상의 경쟁자 두 명과 함께 게임을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실험 대상자는 공놀이에서 배제된다. 이 실험은 이때 실험 대상자의 두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조사한 것이다.”
유신체제의 막바지인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아침 ‘새마을’ 대청소를 자주 했다. 5학년 어느 일요일 아침이다. 청소를 마치고 우리 반 아이들이 축구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초등학교 인근의 부원중학교라는 비인가 중학교 운동장이었다. 그런데 내 라이벌 격인 서울에서 전학 온 도영이와 불량스런 학교 축구부원 승원이가 편을 갈랐다.
축구를 하기 위해 남은 남자 아이들의 숫자가 불길하게도 홀수였다. 설마? 도영이와 승원이는 번갈아가며 자기편을 골랐다. 결국 나만 남았다. 나는 ‘깍두기’로라도 어느 편에 껴들 생각 같은 건 안 한 모양이다. 부원중학교 엉성한 철조망 담의 개구멍으로 서둘러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아마도 나는 이때부터 다신 축구 따윈 하지 않겠다 다짐했을 것이다. 아예 관심을 껐다.
공놀이 실험결과는 이랬다. “이를 통해 공놀이에서 소외당하는 일처럼 아주 사소한 따돌림을 당했을 때에도 인간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은 육체적 통증을 느낄 때와 비슷한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광고가 사람의 본질을 오도한다는 윌킨슨의 주장에 동조한다. “광고들은 ‘쇼핑 치료’로 위로받을 수 있다고 사람들을 부추기면서, 인간의 취약한 심리를 발판으로 삼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보다는, 인간이 본래 물질주의적이며 이기적이라는 잘못된 해석을 맹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인류가 오해의 거미줄에 얼마나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 주는 비극이다.”
신뢰에 관한 그의 성찰에도 공감한다.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속여서 권력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리사욕을 위해 힘을 행사하는 데 반대하고 그것을 제한하는 원리를 기반으로 사회관계가 이루어질 때에만 우리는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다.”
이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오래 사는 까닭을 둘러싼 논란의 마침표를 찍자. 지휘자의 장수 비결이 팔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지휘자에게 ‘자기통제력’이 있어서다. “인간이 자신의 일에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상태도 건강을 위협하는 주요 요인이자 건강 불평등의 원인이다.”
옮긴이는 ‘옮긴이 후기’에서 “윌킨슨은 건강 불평등을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적극적인 방식은 전체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일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완전한 평등이라는 거대한 이상에 가려서 소소한 실천과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를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덧붙인다.
『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와 비교했을 때, 이 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불평등이 개인의 건강을 해치는 중간 경로로 ‘스트레스’에 주목했다는 점”이 그 하나고, “최근에 중요한 사회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젠더나 인종 문제를 건강 불평등과 접목시켜서 해석하는 시도를 했다는 점”은 다른 하나다.
이런 비교가 ‘지난 저서’를 폄하하려는 뜻은 전혀 아닐 것이다. (필자의『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독후감은 <한겨레> 2004년 6월 5일자에 실린 리뷰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옮긴이는『평등해야 건강하다』의 높은 가독성을 편집자에게 돌리는 미덕을 보여준다. “이 책의 8할은 (편집자)이 두 분의 공이라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역학(epidemiology, 疫學)은 어떤 지역이나 집단에서 발생한 질병의 원인이나 변화를 연구하는 의학의 분과 중 하나다. 초기 역학은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목적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심리적?사회적 요인들이 사회 전체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으로까지 연구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평등해야 건강하다』옮긴이 각주에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었고, 그 결과 인간 사회의 물질적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가장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삶의 질과 물질적 생활수준의 관계는 그렇게 밀접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실질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경제성장이 가져오는 약발의 효과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더러는 혜택보다는 재앙을 안긴다. 반면, “물질적 여건만이 아니라 심리적?감정적 상황 등, 인간의 환경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표”로서 건강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건강이 매우 중요한 사회 지표인 이유는, 한 인간이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하며 고통스러워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질병에 걸릴 위험의 정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강은 불평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불평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그저 건강에만 국한하진 않는다. “심한 사회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불평등한 사회는 사회적 박탈감과 관련된 온갖 사회 문제들로 고생하고 있다.” 건강 수준이 낮은 사회는 강력범죄발생률과 10대의 임신비율이 높다. 아이들의 수리와 언어 능력이 떨어지며, 신뢰와 사회적 자본의 수준도 낮다.
윌킨슨이 인용한 많은 연구는 역학적(疫學的) 관점에 바탕을 둔다.『평등해야 건강하다』는 건강과 불평등에 대한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검토한다. 이 책이 그렇다고 건강 안내서는 아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을 다루진 않아서다. 그 대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개인과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밝히기 위해 건강불평등에 관한 연구들을 활용한다.
“이 책에서는 개별 인간의 건강 상태가 아니라 전체 사회나 전체 인구의 수준에서 각 집단의 건강 격차를 살펴볼 것이다. 개인의 상황에 따라 건강 수준이 우연히 달라지는 경우가 아니라, 더욱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고 신뢰도가 높은 유형과 인과관계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아울러 우리 모두의 주관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질을 증진하는 변화의 방향을 제시한다.
『평등해야 건강하다』의 핵심 요지는 이렇다. “더 많은 평등이 가져다주는 이득을 이해하려면 인간이 불평등과 위계 서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사회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와 같은 정치사상가들의 저술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원숭이들의 사회생활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등과 불평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대비된다. 불평등이 “더 자기중심적이고, 덜 친화적이며, 반사회적이고, 스트레스를 더 받게 하고, 폭력 수준을 높이며, 공동체적 결속을 약화시키고, 건강을 악화시키는 사회 전략들을 부추긴다”면, “평등한 사회는 친화적이며, 덜 폭력적이고, 상호 지지적이며, 포용적이고, 좀 더 나은 건강 상태를 가능하게 한다.”
윌킨슨은 건강에 미치는 물질적 궁핍의 효과가 잦아들자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 심리적 요인들을 주목한다. 심리사회적(psychosocial)이라는 표현은,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의 감정상태는 사실 사회적으로 유형화되며, 개별적인 우연보다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그는 심리사회적 위험 요소로 낮은 사회적 지위, 빈약한 사회적 관계, 초기 아동기의 경험 등 세 가지를 꼽는다.
그렇게 때문에 “모든 인간은 대우받고, 존중받으며, 친구를 사귀고, 초기 아동기의 혜택을 누려야 한다.” 심리사회적 요인들은 어째서 인류가 물질적 성공을 이뤘으면서도 삶의 질은 그만큼 개선하지 못했는지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사회적 경험을 하거나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에서 물질적 차원만이 아니라 심리적 차원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등해야 건강하다』는 일말의 회의가 없지 않은, 과연 그럴까 싶은 사회적 신념들이 전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경제성장보다는 분배의 정의(正義)가, 경제성장과 분배의 정의보다는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하는 게 더 중요하다. 경제성장은 건강한 사회의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필요하지만, 경제성장의 중요성은 거기까지다.
“무작정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근거 없는 허상을 붙잡는 것과 같으며, 엄청난 환경 비용까지 지불해야 할 것이다. 식수 고갈, 환경오염의 증가, 지구 온난화, 사막화, 미네랄과 여타 천연자원의 오염, 경제성장을 위해 배출된 쓰레기, 공해 등이 점점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한편, “사회가 부유해질수록 행복과 복지의 수준은 절대 소득보다 상대 소득과 사회적 지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러니까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건강이 안 좋은 사람들의 행동은 그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포함해서 사회 전체의 특성을 단적으로 반영”할 뿐더러 제 것을 지키려는 강박과 불안은 수명 단축으로 이어진다.
또 “소득 불평등보다 사회적 자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소득 불평등이 사회적 자본을 피폐하게 만든 것이다. 불평등한 사회는 불평등 때문에 생기는 불의들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형편없는 사회적 자본도 불평등이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다. 심각한 불평등을 겪고 있는 사회는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사회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그런 징후들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사회는 “약자가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강자들이 배를 채우는 사회”다. 여기서 약자는 어느 고교의 공부 못하는 90%이고, 강자는 상위 10%다. “이런 사회에서는 하층 차별이나 편견처럼 자기의 우월감을 표출하려는 다양한 지배 행동이 판을 칠 것이다.” 실제로 그런 행동은 ‘만발’한다.
투표참여에 강제성이나 반강제성이 없는 것을 전제로 “평등한 사회일수록 더 많은 사람이 투표에 참여한다.”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이방인을 덜 도와주고, 하급 종업원을 덜 배려하며, 학교 운동장에서나 가정에서 더 자주 싸우고, 취약 계층들에게 더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맞다.
우리는 어쩌다가 시장을 맹신하고 떠받들게 되었지만, “시장은 덜 사회적인-때때로 반사회적인-심리를 조장한다.” 우리는 거꾸로 가려하고 있으나, 윌킨슨은 “의료보험, 교육, 공공 교통과 같은 부문을 시장메커니즘에서 분리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렇다고 윌킨슨이 시장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뭘 모르는 사람은 아니다.
“덜 위계적인, 그리고 좀 더 포용적이며, 평등하고 민주적인 가치를 갖는 사회적 환경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시장에 압도되지 않을 것이다. 시장은 앞으로도 우리 생활의 많은 영역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겠지만, 시장 논리를 부채질하고 시장을 지긋지긋한 감독관으로 만드는 불평등의 힘을 억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장의 마수로부터 어느 정도는 해방될 수 있다.”
“불평등의 아주 작은 변화로도 건강 수준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불평등을 줄이나? 윌킨슨은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의지”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정책적 “시도들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정부가 집권하게 된다면 쉽게 무산되고 만다. 소득 분배를 개선하는 여타의 대책들은 한번 시행되면 바꾸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퇴보하기는 여전히 쉽다.”
『평등해야 건강하다』에 나오는 두 개의 에피소드는 내 유년의 기억을 떠올린다. 둘 다 축구와 관련 있다. 우선, 책에 인용된 사이먼 찰스워스라는 사람의 말이다. “분명히 노동 속에는 우리 사회 노동자들에게 뿌리 깊은 영향을 미치고, 공포와 불안정과 환멸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노동자 밀집 거주지역에서 나서 자란 나는 약간의 반(反)노동자 정서가 있다. 초등학생 때 동네에서 축구공으로 공놀이를 하면, 지나가던 ‘공돌이’는 예외 없이 공을 뻥뻥 걷어찼다. 내 공은 더러운 물이 흐르는 도랑에 빠지거나, 남의 집 담 안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셋방살이를 한, 많을 때는 세 가구나 되었다,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노동자의식이나 계급의식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또 하나는 씁쓸한 기억이다. “두 번째 기사는 MRI 촬영을 이용한 어느 실험에 대한 것이다. 이 실험에 따르면, 사회에서 배제되었을 때 받게 되는 정신적 고통은 두뇌의 특정한 부위를 자극하는데, 그 위치가 육체적 통증을 느낄 때 반응하는 부분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런데 이 실험에 사용된 배제의 정도는 그리 대단치 않았다.
“이 연구자들은 그저 컴퓨터 게임을 이용한 모의실험 도중 실험 대상자를 아주 조금 배제했을 뿐이었다. 컴퓨터 공놀이 게임에서 실험 대상자들은 가상의 경쟁자 두 명과 함께 게임을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실험 대상자는 공놀이에서 배제된다. 이 실험은 이때 실험 대상자의 두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조사한 것이다.”
유신체제의 막바지인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아침 ‘새마을’ 대청소를 자주 했다. 5학년 어느 일요일 아침이다. 청소를 마치고 우리 반 아이들이 축구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초등학교 인근의 부원중학교라는 비인가 중학교 운동장이었다. 그런데 내 라이벌 격인 서울에서 전학 온 도영이와 불량스런 학교 축구부원 승원이가 편을 갈랐다.
축구를 하기 위해 남은 남자 아이들의 숫자가 불길하게도 홀수였다. 설마? 도영이와 승원이는 번갈아가며 자기편을 골랐다. 결국 나만 남았다. 나는 ‘깍두기’로라도 어느 편에 껴들 생각 같은 건 안 한 모양이다. 부원중학교 엉성한 철조망 담의 개구멍으로 서둘러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아마도 나는 이때부터 다신 축구 따윈 하지 않겠다 다짐했을 것이다. 아예 관심을 껐다.
공놀이 실험결과는 이랬다. “이를 통해 공놀이에서 소외당하는 일처럼 아주 사소한 따돌림을 당했을 때에도 인간은 심한 정신적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은 육체적 통증을 느낄 때와 비슷한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광고가 사람의 본질을 오도한다는 윌킨슨의 주장에 동조한다. “광고들은 ‘쇼핑 치료’로 위로받을 수 있다고 사람들을 부추기면서, 인간의 취약한 심리를 발판으로 삼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보다는, 인간이 본래 물질주의적이며 이기적이라는 잘못된 해석을 맹신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인류가 오해의 거미줄에 얼마나 단단히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 주는 비극이다.”
신뢰에 관한 그의 성찰에도 공감한다.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나를 속여서 권력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사리사욕을 위해 힘을 행사하는 데 반대하고 그것을 제한하는 원리를 기반으로 사회관계가 이루어질 때에만 우리는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다.”
이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오래 사는 까닭을 둘러싼 논란의 마침표를 찍자. 지휘자의 장수 비결이 팔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지휘자에게 ‘자기통제력’이 있어서다. “인간이 자신의 일에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상태도 건강을 위협하는 주요 요인이자 건강 불평등의 원인이다.”
옮긴이는 ‘옮긴이 후기’에서 “윌킨슨은 건강 불평등을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적극적인 방식은 전체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일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완전한 평등이라는 거대한 이상에 가려서 소소한 실천과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태도”를 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덧붙인다.
『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와 비교했을 때, 이 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다고 말한다. “사회의 불평등이 개인의 건강을 해치는 중간 경로로 ‘스트레스’에 주목했다는 점”이 그 하나고, “최근에 중요한 사회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젠더나 인종 문제를 건강 불평등과 접목시켜서 해석하는 시도를 했다는 점”은 다른 하나다.
이런 비교가 ‘지난 저서’를 폄하하려는 뜻은 전혀 아닐 것이다. (필자의『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독후감은 <한겨레> 2004년 6월 5일자에 실린 리뷰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옮긴이는『평등해야 건강하다』의 높은 가독성을 편집자에게 돌리는 미덕을 보여준다. “이 책의 8할은 (편집자)이 두 분의 공이라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역학(epidemiology, 疫學)은 어떤 지역이나 집단에서 발생한 질병의 원인이나 변화를 연구하는 의학의 분과 중 하나다. 초기 역학은 병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목적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심리적?사회적 요인들이 사회 전체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으로까지 연구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평등해야 건강하다』옮긴이 각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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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최성일
camilia
2008.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