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왕국을 세워라』를 펴낸 대한민국 사극의 산증인, <이산>의 PD 이병훈을 만나다
드라마 감독으로 걸어왔던 긴 여정과 앞으로 걸어갈 미래를 담은 책 『꿈의 왕국을 세워라』가 출간되었다. 책에선 특유의 솔직담백한 어조로, 오직 열정 하나로 드라마를 만들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는다.
200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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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훈’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그가 만든 드라마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허준> <상도> <대장금> <서동요> <이산>에 이르기까지. 그가 감독한 작품들은 ‘국민 드라마’가 되었고, 그는 우리의 ‘국민 사극 감독’이 되었다. 그가 만들어 낸 드라마는 우리 국민의 것만이 아니다. 세계가 그의 드라마를 통해 한국의 역사를 배우고, 한국의 문화에 매혹된다.
1944년 생. MBC PD 공채 2기로 입사해, 지금까지 그는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을 만들어 왔다. 데스크로 현장을 떠난 8년을 제외하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현장에서 배우들, 스태프들과 함께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 역사의 산증인이다. 드라마 감독으로 걸어왔던 긴 여정과 앞으로 걸어갈 미래를 담은 책 『꿈의 왕국을 세워라』가 출간되었다. 책에선 특유의 솔직담백한 어조로, 오직 열정 하나로 드라마를 만들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는다.
대한민국 사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다 <허준>
드라마 감독으로 그에게 이정표가 된 작품은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허준>이었다. 이전까지의 사극은 무겁고 칙칙하고 정사 중심의 딱딱한 드라마였다면, <허준> 이후의 사극은 화사하고, 우리 문화의 정수를 체험하게 해주며, 정사가 다루지 못했던 역사의 영역을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드라마로 변신했다.
“99년도에 만든 작품인데. <허준>은 저에게 굉장히 특별한 작품입니다. 8년 만에 드라마를 찍는 거라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학생이던 그의 딸은 아빠가 사극을 만든다고 하니 극구 반대했다.
“사극 하지 말라고, 자기만 안 보는 게 아니라 친구들도 다 안 본다고 그래요. 아들은 디자인을 전공해서 창작하는 아빠의 고통을 알아서 심한 말을 하지 않는데, 딸은 그렇지 않아요. 칼같이 정확하게 평가를 합니다.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잘라 말해요. 봐주는 게 없죠. 드라마를 보다가 ‘아빠, 재미없어.’라고 말하고 들어가 자기도 하니까요. (웃음)”
그런 딸의 반응에서 사극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허준>은 기존의 사극 시청자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들도 함께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려고 했어요. 극의 진행도 스피디하게, 등장 인물들이 사용하는 말도 현대어에 가깝게. <허준>의 극본을 쓴 최완규 씨는 사극을 한번도 써본 적이 없었지요. 아무래도 기존 사극을 쓴 사람은 사극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힘들 것 같아서 과감하게 최완규 씨와 작업을 했어요. 이 작품으로 감히 사극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허준>은 시청률도 높았고, 좋은 드라마라는 평가도 받았다. 대중의 인기와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쥔 셈이다. <허준>은 이병훈 감독에게,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선사해 준 작품이었다.
사극은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여줄 의무가 있다
<허준>은 사극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성공했고, 이병훈표 사극 드라마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사회에서 소외된, 중인 이하 출신인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딛고 자신의 목표를 정당한 방식으로 달성한다. 또, 사극을 통해 대중들이 좀더 친숙하게 역사에 다가갈 수 있도록 친절하면서도 꼼꼼한 고증을 거쳤고, 의학?음식?미술?상인의 문화 등 미처 잘 알지 못했던 우리 문화의 매력을 화면에 되살렸다. 그가 만든 사극을 보고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중고생이 많다.
“얼마 전부터 고등학교에서 국사가 선택 과목이 되어서, 우리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를 잘 몰라요. 또 역사라면 아직도 지루하고 딱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요. 그런데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자부심을 가지는 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건 젊었을 땐 잘 몰라요. 나이 들어서 해외 나가보면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느끼지요. 문화가 없는 민족은 참 초라합니다. 지구상에는 참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문화를 가진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물관에 가도 볼 만한 유물이 없는 나라가 수두룩하지요. 이건 나라가 가난하고 부유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예를 들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고 나면, 누구나 그 문화의 깊이와 신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웨덴 같은 나라를 가보면, 눈에 띄는 문화유산이 별로 없어요. 바이킹 시대의 배 정도가 진열되어 있는 정도죠. 자부심과 긍지, 자신감은 문화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역사를 접할 기회가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 더욱더 사극은 교육적인 역사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리고 제대로 가르쳐 줘야 합니다. 고증을 철저히 하려고 노력하지요.”
<허준> 이후로 그가 만든 드라마는 모두 해외에 수출되었다. “사극이 해외에 수출된다는 것은 굉장히 뜻 깊은 일입니다. 단지 드라마 한 편이 수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함께 수출된다는 의미니까요.” 드라마의 수출은 감독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며 그에게 남다른 보람을 안겨주었다.
특히 가장 많은 나라로 수출된 <대장금>은 그에게 가장 큰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대장금>은 NHK에서 방영되었는데, 드라마를 보고 한 일본인이 이렇게 엽서를 보냈더군요. ‘한국의 문화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 이런 곳을 우리가 침략했다니, 정말 부끄러웠다.’고요. 드라마 한편이 국가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드라마 감독으로 참 뿌듯했습니다.”
이병훈이 드라마에 담고 싶은 가치 ㅡ 정도(正道)를 가는 인간
이병훈 감독에게 드라마는 ‘재미’다. 그에게 재미없는 드라마는 드라마가 아니다. 동시에 드라마는 단지 재미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는 지금까지 드라마를 만들면서 윤리와 공익을 잊어본 적이 없다. 그는 드라마를 통해 인간다움의 가치를 보여주고자 했고, 동시에 역사를 통해 현대를 말하고자 했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이 참 없잖아요? 언뜻 보면 불의가 득세하고 착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장금이는 남을 비방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고 꿈을 이루잖아요. 착해도 성공할 수 있고, 남에게 사기 치지 않아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드라마는 그냥 한 시간 재미있게 보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래도 뭔가는 남아야 하지 않을까, 뭔가 좋은 영향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고민합니다. 그래서 제 드라마는 교훈적이지요. (웃음)”
그의 드라마 주인공들은 모두 독립적이다. 반상의 구분이 엄격하고 남녀가 유별했던 과거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찍지만, 그의 주인공들ㅡ특히 여주인공들ㅡ은 현대 여성들보다 더 독립적이며 강하게 삶을 견딘다. 장금이가 그러했고, 송연이가 그러했다.
“오늘날 여성들이 과연 신사임당이 되길 바랄까요? 남편 내조를 하고 자식을 잘 키운 것으로 만족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봐요. 지금의 여성들은 엄마, 아내, 이런 역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하고 뭔가를 이루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제 드라마의 여성들은 남성의 조력자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제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죽어라’ 고생을 하지요. (웃음)” 그러면서, 원래 드라마는 주인공이 힘들수록 재미있는 것이라는 농담도 덧붙였다.
장금이가 원한 삶은 임금의 후궁이 되어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의원이 되는 것이었고, 송연 역시 이산을 사랑했지만 그가 원한 것은 도화서의 뛰어난 화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다음 작품,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이야기를 다룰 <동이>(가제)는, 천민이었지만 누구보다 큰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아들을 키운, 강하면서도 현명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운 시각이 있을 뿐이다
지금 한창 스토리 작업 중인 <동이>는 약 10회까지 대본이 나온 상태다. “<허준>에서 우리 한의학과 내의원을 다뤘다면, <대장금>에서는 우리의 음식 문화, <이산>에서는 도화서를 통해 우리 그림을 다루었지요. 그리고 다음 작품인 <동이>에서는 국악이 등장할 예정입니다.”
사실 숙빈 최씨의 이야기는, 그간 수없이 드라마화된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이야기로 익숙하다. 사람들의 이러한 의문에 이병훈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오직 새로운 시각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답을 내놓았다.
“여자 이야기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찾다가, 너무 유명한 두 여인 뒤에 가려진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시각으로 이 시대를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인현왕후는 양반 명문가, 장옥정은 경제력을 가진 중인, 숙빈 최씨는 천민 신분입니다. 그런데 최후의 승자는 숙빈 최씨지요. 자기가 낳은 연잉군이 영조가 되었으니까. 조선 시대에 천민은 가축과 똑같은 존재였지요. 사고 팔았으니까요. 숙종 연간에 천민들의 지하 조직이 두 가지 생깁니다. 검계, 살주계가 바로 그것이지요. 신분제도를 뛰어넘어 스스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는, 일종의 자생적인 민권 운동이지요. 이런 시대적인 움직임을 배경으로, <동이>는 양반의 시각이 아닌 천민의 시각으로 삶을 다룰 것입니다. 기록이 거의 없는 숙빈 최씨를, 상상으로 되살려낼 겁니다. 제 상상이지만 그녀는 굉장히 매력적이면서도 뛰어난 지략을 가진 인간이었을 것이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애틋한 러브 스토리도 있겠지요.”
그는 사극 연출의 재미를 ‘인물’로 꼽았다. “현대물에서는 인간을 다루기가 힘들어요. 지금 하고 있는 현대물을 보세요. 재벌 2세, 삼각관계, 고부간의 갈등…… 이런 이야기밖에 할 수 없지 않은가요? 그에 비해 사극은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희로애락을 선 굵게 그려낼 수 있어요. 사극이라 제약도 있지만 사극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있는 셈이지요.”
또 사극의 경우, 오히려 인물에 대한 기록이 많을수록 창작하기도 힘들고 재미도 덜하다고 했다. “<이산>의 경우는 정조에 대한 기록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창작하기가 힘들었어요. 그에 비해 이력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송연의 경우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창조하면서 정조대를 보여줄 수 있었지요. 숙빈 최씨 역시, 남아있는 기록은 보잘것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장악원이나 검계, 살주계 등과 연관시켜 새로운 인물로 창조할 수 있었어요.”
연출 40년, 여전히 새 작품을 시작하는 것은 두렵다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할 때면 그는 늘 두렵다고 했다. 창작하는 사람이 숙명적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 두려움은, 처음 작품을 연출하는 감독이나 벌써 40년 동안 연출을 해 온 감독이나 똑같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
“시청률도 높고 의미도 있는 드라마를 늘 욕심 내게 됩니다. 이게 제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청률이 높으면서 작품성도 높은 드라마. 모든 드라마 감독들이 꿈꾸는 이상이지만 이루는 건 너무 힘들지요. 몇번 성공했다고 너무 겁도 없이 덤비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새 드라마를 시작할 때마다 늘 두렵습니다. 새로운 시각, 신선한 감각을 전해주고 싶어요. 조금이라도 재미없으면 바로 채널을 돌리는, 그 변덕 많은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는 재미를 늘 새롭게 창조해내야 합니다. 참 힘들지요. 드라마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여전히 현역 드라마 감독이고, 앞으로 만들고 싶은 드라마가 무궁무진하다. 동기들과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은 이미 현장을 떠나거나 직업에서 은퇴했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기록은 미야자키 하야오만이 깰 수 있다’라는 말처럼, 한국에서 이병훈 감독의 드라마의 기록은 오직 그만이 깰 수 있다. 그가 추구하는 드라마의 세계는 모두의 공감을 이끌어 내면서도 깊이가 있다. 그가 새롭게 보여줄 <동이>는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1944년 생. MBC PD 공채 2기로 입사해, 지금까지 그는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사극을 만들어 왔다. 데스크로 현장을 떠난 8년을 제외하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현장에서 배우들, 스태프들과 함께했다.
대한민국 사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다 <허준>
드라마 감독으로 그에게 이정표가 된 작품은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허준>이었다. 이전까지의 사극은 무겁고 칙칙하고 정사 중심의 딱딱한 드라마였다면, <허준> 이후의 사극은 화사하고, 우리 문화의 정수를 체험하게 해주며, 정사가 다루지 못했던 역사의 영역을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드라마로 변신했다.
“99년도에 만든 작품인데. <허준>은 저에게 굉장히 특별한 작품입니다. 8년 만에 드라마를 찍는 거라서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 학생이던 그의 딸은 아빠가 사극을 만든다고 하니 극구 반대했다.
“사극 하지 말라고, 자기만 안 보는 게 아니라 친구들도 다 안 본다고 그래요. 아들은 디자인을 전공해서 창작하는 아빠의 고통을 알아서 심한 말을 하지 않는데, 딸은 그렇지 않아요. 칼같이 정확하게 평가를 합니다. 재미없으면 재미없다고 잘라 말해요. 봐주는 게 없죠. 드라마를 보다가 ‘아빠, 재미없어.’라고 말하고 들어가 자기도 하니까요. (웃음)”
그런 딸의 반응에서 사극이 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허준>은 기존의 사극 시청자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들도 함께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려고 했어요. 극의 진행도 스피디하게, 등장 인물들이 사용하는 말도 현대어에 가깝게. <허준>의 극본을 쓴 최완규 씨는 사극을 한번도 써본 적이 없었지요. 아무래도 기존 사극을 쓴 사람은 사극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가 힘들 것 같아서 과감하게 최완규 씨와 작업을 했어요. 이 작품으로 감히 사극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허준>은 시청률도 높았고, 좋은 드라마라는 평가도 받았다. 대중의 인기와 작품성을 동시에 거머쥔 셈이다. <허준>은 이병훈 감독에게, 재미있으면서도 유익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선사해 준 작품이었다.
사극은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여줄 의무가 있다
<허준>은 사극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성공했고, 이병훈표 사극 드라마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사회에서 소외된, 중인 이하 출신인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딛고 자신의 목표를 정당한 방식으로 달성한다. 또, 사극을 통해 대중들이 좀더 친숙하게 역사에 다가갈 수 있도록 친절하면서도 꼼꼼한 고증을 거쳤고, 의학?음식?미술?상인의 문화 등 미처 잘 알지 못했던 우리 문화의 매력을 화면에 되살렸다. 그가 만든 사극을 보고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중고생이 많다.
“얼마 전부터 고등학교에서 국사가 선택 과목이 되어서, 우리 청소년들이 우리 역사를 잘 몰라요. 또 역사라면 아직도 지루하고 딱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고요. 그런데 자기 나라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자부심을 가지는 건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건 젊었을 땐 잘 몰라요. 나이 들어서 해외 나가보면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느끼지요. 문화가 없는 민족은 참 초라합니다. 지구상에는 참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문화를 가진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물관에 가도 볼 만한 유물이 없는 나라가 수두룩하지요. 이건 나라가 가난하고 부유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예를 들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보고 나면, 누구나 그 문화의 깊이와 신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웨덴 같은 나라를 가보면, 눈에 띄는 문화유산이 별로 없어요. 바이킹 시대의 배 정도가 진열되어 있는 정도죠. 자부심과 긍지, 자신감은 문화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역사를 접할 기회가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 더욱더 사극은 교육적인 역사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리고 제대로 가르쳐 줘야 합니다. 고증을 철저히 하려고 노력하지요.”
<허준> 이후로 그가 만든 드라마는 모두 해외에 수출되었다. “사극이 해외에 수출된다는 것은 굉장히 뜻 깊은 일입니다. 단지 드라마 한 편이 수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함께 수출된다는 의미니까요.” 드라마의 수출은 감독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며 그에게 남다른 보람을 안겨주었다.
특히 가장 많은 나라로 수출된 <대장금>은 그에게 가장 큰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대장금>은 NHK에서 방영되었는데, 드라마를 보고 한 일본인이 이렇게 엽서를 보냈더군요. ‘한국의 문화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다. 이런 곳을 우리가 침략했다니, 정말 부끄러웠다.’고요. 드라마 한편이 국가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드라마 감독으로 참 뿌듯했습니다.”
이병훈이 드라마에 담고 싶은 가치 ㅡ 정도(正道)를 가는 인간
이병훈 감독에게 드라마는 ‘재미’다. 그에게 재미없는 드라마는 드라마가 아니다. 동시에 드라마는 단지 재미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는 지금까지 드라마를 만들면서 윤리와 공익을 잊어본 적이 없다. 그는 드라마를 통해 인간다움의 가치를 보여주고자 했고, 동시에 역사를 통해 현대를 말하고자 했다.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이 참 없잖아요? 언뜻 보면 불의가 득세하고 착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장금이는 남을 비방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인생을 개척하고 꿈을 이루잖아요. 착해도 성공할 수 있고, 남에게 사기 치지 않아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드라마는 그냥 한 시간 재미있게 보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래도 뭔가는 남아야 하지 않을까, 뭔가 좋은 영향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고민합니다. 그래서 제 드라마는 교훈적이지요. (웃음)”
그의 드라마 주인공들은 모두 독립적이다. 반상의 구분이 엄격하고 남녀가 유별했던 과거를 배경으로 드라마를 찍지만, 그의 주인공들ㅡ특히 여주인공들ㅡ은 현대 여성들보다 더 독립적이며 강하게 삶을 견딘다. 장금이가 그러했고, 송연이가 그러했다.
“오늘날 여성들이 과연 신사임당이 되길 바랄까요? 남편 내조를 하고 자식을 잘 키운 것으로 만족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봐요. 지금의 여성들은 엄마, 아내, 이런 역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고 싶어하고 뭔가를 이루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제 드라마의 여성들은 남성의 조력자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제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죽어라’ 고생을 하지요. (웃음)” 그러면서, 원래 드라마는 주인공이 힘들수록 재미있는 것이라는 농담도 덧붙였다.
장금이가 원한 삶은 임금의 후궁이 되어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의원이 되는 것이었고, 송연 역시 이산을 사랑했지만 그가 원한 것은 도화서의 뛰어난 화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다음 작품,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이야기를 다룰 <동이>(가제)는, 천민이었지만 누구보다 큰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아들을 키운, 강하면서도 현명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로운 시각이 있을 뿐이다
지금 한창 스토리 작업 중인 <동이>는 약 10회까지 대본이 나온 상태다. “<허준>에서 우리 한의학과 내의원을 다뤘다면, <대장금>에서는 우리의 음식 문화, <이산>에서는 도화서를 통해 우리 그림을 다루었지요. 그리고 다음 작품인 <동이>에서는 국악이 등장할 예정입니다.”
사실 숙빈 최씨의 이야기는, 그간 수없이 드라마화된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이야기로 익숙하다. 사람들의 이러한 의문에 이병훈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오직 새로운 시각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답을 내놓았다.
“여자 이야기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를 찾다가, 너무 유명한 두 여인 뒤에 가려진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시각으로 이 시대를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인현왕후는 양반 명문가, 장옥정은 경제력을 가진 중인, 숙빈 최씨는 천민 신분입니다. 그런데 최후의 승자는 숙빈 최씨지요. 자기가 낳은 연잉군이 영조가 되었으니까. 조선 시대에 천민은 가축과 똑같은 존재였지요. 사고 팔았으니까요. 숙종 연간에 천민들의 지하 조직이 두 가지 생깁니다. 검계, 살주계가 바로 그것이지요. 신분제도를 뛰어넘어 스스로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는, 일종의 자생적인 민권 운동이지요. 이런 시대적인 움직임을 배경으로, <동이>는 양반의 시각이 아닌 천민의 시각으로 삶을 다룰 것입니다. 기록이 거의 없는 숙빈 최씨를, 상상으로 되살려낼 겁니다. 제 상상이지만 그녀는 굉장히 매력적이면서도 뛰어난 지략을 가진 인간이었을 것이고,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애틋한 러브 스토리도 있겠지요.”
그는 사극 연출의 재미를 ‘인물’로 꼽았다. “현대물에서는 인간을 다루기가 힘들어요. 지금 하고 있는 현대물을 보세요. 재벌 2세, 삼각관계, 고부간의 갈등…… 이런 이야기밖에 할 수 없지 않은가요? 그에 비해 사극은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희로애락을 선 굵게 그려낼 수 있어요. 사극이라 제약도 있지만 사극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있는 셈이지요.”
또 사극의 경우, 오히려 인물에 대한 기록이 많을수록 창작하기도 힘들고 재미도 덜하다고 했다. “<이산>의 경우는 정조에 대한 기록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창작하기가 힘들었어요. 그에 비해 이력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송연의 경우는 자유롭게 이야기를 창조하면서 정조대를 보여줄 수 있었지요. 숙빈 최씨 역시, 남아있는 기록은 보잘것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장악원이나 검계, 살주계 등과 연관시켜 새로운 인물로 창조할 수 있었어요.”
연출 40년, 여전히 새 작품을 시작하는 것은 두렵다
새로운 드라마를 시작할 때면 그는 늘 두렵다고 했다. 창작하는 사람이 숙명적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 두려움은, 처음 작품을 연출하는 감독이나 벌써 40년 동안 연출을 해 온 감독이나 똑같이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
“시청률도 높고 의미도 있는 드라마를 늘 욕심 내게 됩니다. 이게 제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청률이 높으면서 작품성도 높은 드라마. 모든 드라마 감독들이 꿈꾸는 이상이지만 이루는 건 너무 힘들지요. 몇번 성공했다고 너무 겁도 없이 덤비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새 드라마를 시작할 때마다 늘 두렵습니다. 새로운 시각, 신선한 감각을 전해주고 싶어요. 조금이라도 재미없으면 바로 채널을 돌리는, 그 변덕 많은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는 재미를 늘 새롭게 창조해내야 합니다. 참 힘들지요. 드라마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여전히 현역 드라마 감독이고, 앞으로 만들고 싶은 드라마가 무궁무진하다. 동기들과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은 이미 현장을 떠나거나 직업에서 은퇴했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기록은 미야자키 하야오만이 깰 수 있다’라는 말처럼, 한국에서 이병훈 감독의 드라마의 기록은 오직 그만이 깰 수 있다. 그가 추구하는 드라마의 세계는 모두의 공감을 이끌어 내면서도 깊이가 있다. 그가 새롭게 보여줄 <동이>는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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