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이는 손길, 속살거리는 위안
<나에게서 온 편지>는 잔잔하게 다가와 지친 오늘의 내 어깨를 살포시 끌어안고 다독여주는 영화이다. 크고 화려한 영화의 틈새에 여전히 아날로그적 감수성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내겐 위안이었으니 정말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소중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글ㆍ사진 최재훈
201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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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간만에 만난 친구를 통해 연락이 끊긴 다른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소식도 직접 연락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여행까지 갔다 오고 잘 사는 것 같더라.’거나 지금도 여전히 ‘드라마 얘기만 늘어놓는 것 같다.’는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서 얻은 단편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현실의 친구 대신 페이스북의 친구가 모두 자신의 친구라 착각하는 사람, ‘좋아요’ 혹은 리트윗 횟수에 집착하는 사람을 흔히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어쩌면 손을 마주잡고, 눈을 마주한 채 나누던 진지한 대화 같은 진짜 소통을 잃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위안의 또 다른 방법이 아닌가 싶다. 사실 디지털의 즉시성 때문에 친구의 수는 급속도로 늘어나고, 나의 글이 인기를 얻는다면 순식간에 또 전파되기도 하지만, 모니터 속 세상이 아무리 따뜻하게 굴어도 그저 묵묵히 다 알았다는 듯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려주고, 따뜻한 손을 통해 전해지는 정서적 위안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나에게서 온 편지>는 잔잔하게 다가와 지친 오늘의 내 어깨를 살포시 끌어안고 다독여주는 영화이다. 크고 화려한 영화의 틈새에 여전히 아날로그적 감수성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내겐 위안이었으니 정말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소중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서 온 편지>는 소녀 라셸이 죽음과 삶이라는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는 성장영화이다. 개학전날 책가방을 메고 잘 정도로 걱정과 수줍음이 많은 라셸은 자신과 달리 발랄하고 말 많은 친구 발레리를 만나 친구가 된다. 라셸은 발레리와 함께 처음 해보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 대부분의 일들은 라셸이 하지 못했던 소소하지만, 금기된 일들이다. 무단횡단, 시험지 바꿔치기, 선생님 미행하기 등. 아우슈비츠에서 혼자 살아남은 라셸의 아빠 미셸,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엄마 콜레르, 그리고 죽음을 앞둔 치매 걸린 할머니 등 라셸의 고독을 보듬기에 모두 결핍으로 가득한 가족들 사이에서 발레리는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친구이다. <나에게서 온 편지>는 이렇게 결핍된 평범한 가족들 사이에 ‘죽음’의 그림자를 무겁지 않게 녹여낸다. 불시에 찾아온 ‘죽음’은 라셸과 함께 그녀의 엄마, 아빠도 성장시킨다.

여기에 섹스에 대한 농담도 담겨 있다. 영화는 누구나 섹스하고, 누구나 죽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아이의 눈을 통해 때론 익살스럽고 때론 발칙하게 풀어낸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시선으로 영화는 시종일관 밝고 천진난만하며 과하게 명랑하다. 라셸과 발레리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가 80년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종일 볼 수 있는 IP TV도, 게임기나 스마트폰이 없어 ‘친구’가 더욱 소중했던 시기였다. 21세기라면 라셸은 디지털 기기에 푹 빠져 발레리와의 소통 자체를 거부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숨어들었을지 모른다.


시종 밝고 맑은 영화의 논조처럼 영화는 격정적인 엔딩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슴 속 깊이 기분 좋은 떨림을 가져다준다. 의문을 가질 필요도, 영화를 평가할 필요도 없이 그저 그 감정을 품어내고 흐뭇한 미소 한 번이면 족한 영화, 그래서 <나에게서 온 편지>는 더욱 가치 있는 영화가 되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전 온통 수수께끼투성이인 세상의 기호 속에서 사는 게 버거운 건 계속 자라나야 하는 소녀뿐만 아니라, 여전히 성장해야만 하는 덜 자란 어른들도 마찬가지라는 공평한 시선으로 영화는 줄곧 두 아이의 발랄한 무용담과 함께 라셸의 엄마 콜레르의 성장도 묵묵히 지켜보고, 싱글 맘으로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발레리의 엄마의 고독과 어린 시절 생존의 고통을 딛고 여전히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아빠 미셸의 결핍까지도 포근하게 품어낸다. 그리고 이들의 결핍은 타인에게 생채기를 내는 대신, 관계를 맺고 서로를 보듬어주는 계기가 된다. 자칫 너무 교훈적이고 상투적일 수 있는 부분은 생략과 편집을 통해 유연하게 넘어가는 연출력 때문에, <나에게서 온 편지>는 낯 뜨겁지 않게 반성하고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예쁜 영화이다.


죽음을 관조하며 삶을 위안하는 영화들


<굿’바이>

<나에게서 온 편지>처럼 죽음을 관조하면서 삶을 위안하는 작지만 알찬 영화들이 있다. <나에게서 온 편지>와 함께 보면 더욱 좋을 것 같아 몇 편 추천해 본다. 다키타 요지로 감독의 <굿’바이>는 영혼이 떠난 육신을 마지막으로 단장해서 영원한 여행길에 오르도록 채비해주는 납관사가 마주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죽음이 삶과 늘 함께 하는 현실이라는 점을 일본영화 특유의 관조적인 유머를 담아 보여주는 영화다. <굿’바이>는 영원한 이별, 즉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오히려 삶을 정리하는 그 마지막 순간이 치열하지 않고, 평온하다면 그것이 인간이 누리는 마지막 축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열두 살 샘>

죽음을 통렬한 슬픔으로 보여주지 않고, 삶을 마무리하는 하나의 소중한 과정이라는 관조적인 태도로 훈훈한 감동을 주는 영화로 구스타보 론 감독의 <열두 살 샘>이 있다.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아빠, 울지마세요』를 영화화한 <열두 살 샘>은 3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열두 살 소년이 살아있는 동안의 기록을 영상과 글로 남기면서 어떻게 보면 유쾌하기까지 한 버킷 리스트를 통해 삶의 소중함과 그 따뜻함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실사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열두 살 남자아이의 머릿속을 들락거리면서 환상적인 요소를 가미했고, 흔히 시한부 인생을 사는 소년의 이야기에서 상상할 수 있는 무겁고 우울한 이야기를 가뿐하게 걷어냈다.


<원더풀 라이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의 기억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배경은 이승과 저승의 중간지대라고 하는 림보다. 이승을 떠난 사람들이 일주일을 머문다는 그 곳에서 죽은 자들이 하는 일은 면접관들과 상담을 하면서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골라내는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거창하고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아주 소소한 순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레스트리스>

1997년 독일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시한부 인생의 삶을 유쾌하게 그려낸 영화였다. 2007년 7세 정신연령에 머물러 있는 소녀 상은이 사랑하는 엄마를 떠나보내야 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허브>는 사랑과 죽음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다소 감정과잉인 부분들이 곳곳에 산재해있긴 하지만 강혜정을 통해 재현되는 상은의 캐릭터는 신선하고 사랑스럽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의 2011년 작품 <레스트리스>는 부모님의 죽음 이후 세상에서 숨어버린 에녹, 말기 암 판정을 받고 3개월의 시간만이 주어진 애나벨,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에녹의 오랜 유령 친구 히로시의 이야기다.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이끌린 에녹과 애나벨은 서로의 상처와 두려움을 보듬어 준다. 하지만 즐거운 만남이 이어질수록 이별의 시간도 다가온다. 히로시는 에녹에게 찾아온 눈부신 삶과 애나벨이 맞이할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빛을 밝혀준다. 이 영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두 남녀의 만남과 사랑을 유쾌하면서도 환상적으로 그려내며 삶의 소중한 순간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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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서 온 편지 #굿'바이 #열두 살 샘 #노킹 온 헤븐스 도어 #허브 #레스트리스
5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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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우민

2013.08.30

덕분에 사랑스러운 영상까지 잘 보았어요^^
지금 극장에서 볼 순 없을 것 같아 조금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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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dldodh

2013.08.24

오랜만에 소박한 영화가 나온 것같네요ㅎ 담백하고 소소한, 소탈하고 편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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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라새

2013.08.16

스틸컷을 보니 영화 `플립`이 떠올라요. 특유의 분위기가 닮아보여서요ㅎㅎ플립을 재미있게 봐서 이 영화도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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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