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에 누워 기억을 맞이하다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정신이 붙들려서 멍해지고, 돈을 쓰고, 몰입하고, 사랑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휩쌌던 건 ‘설렘’이었다. 한때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감정이었다. 지금은 희귀해진 그 이름을 다시 가져볼 수 있을까?
글ㆍ사진 송인희
201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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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란의 산문집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를 읽고 있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문장이 많다. 작가의 개인적인 삶에 밑줄을 그으며 내 삶을 채우는 일이 꽤 기쁘다.
기억이란 이상해서 가장 인상적인 기억에서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한다. 결국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순간이다. 그날의 바람, 햇빛, 소음과 냄새 같은 환경이 절묘하게 만난 그 한순간이다.-「순간, 그리고」 중에서



기억이란 정말 이상하다

S와 나는 칠 년 전에 처음 만났다. 교환학생으로 있을 때였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미국의 조용한 도시였다(우리는 그곳을 ‘P타운’이라고 부른다). 기숙사에는 공용 화장실과 부엌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방이 있었다. 803호의 나와 804호의 S는 혈기왕성했다. 자신감이 넘치던 때였다. 욕망이 있으면 곧이곧대로 따라다녔다. 치기 어렸지만, 노랫말처럼 ‘원하는 대로’ 살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날마다 설렜다. 무언가에 많이 홀려 미쳐있었다.

1년을 P타운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각자 졸업하고 취업하며, 살고 또 살았다. 마음이 메마른 날엔 P타운의 추억이 떠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거침없었던 때였다. 앞으로의 삶도 다름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과 예상의 괴리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진을 보다 모니터 앞에서 울기도, 변기 위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다.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는 회상 장면에 내려야 할 전철역을 놓치기도 했다. 빈도는 줄었지만, 그때로 돌아가는 꿈도 꿨다. S와 만나는 때면 옛이야기로 만담을 펼쳤다. 우린 ‘P타운’을 꽤 오래 앓았다.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리워하는 공원이 있다. 캠퍼스 한가운데를 가로지를 만큼 면적이 큰 곳이다. 공원은 대학의 맨 첫 번째 건물부터 시내까지 2km 정도 기다랗게 이어져 있다. 그곳엔 4층 건물 키를 너끈히 넘는 짙푸른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이국적인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기에 완벽한 도심 속의 숲이었다.

책을 읽고, 밥도 먹고, 이야기를 나누던 풀밭과 벤치. 느린 전차가 섰던 숲 속의 정거장. 밤이면 공원을 가로질러 맥주를 마시러 갔던 오솔길.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불 꺼진 강의실, 새벽바람, 나무 냄새…… 그때 우리를 둘러싼 몇몇 순간들이 모여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었다. 절묘하게 어우러진 순간의 기억들은 칠 년이 지난 지금도 제자리걸음이다.


제목 미정의 온천 여행에서

지난주, 홋카이도엔 순백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했다. 그때 S가 삿포로에 다녀갔다.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챘다. 그녀는 제대로 ‘P타운앓이’를 하고 있었다. S의 회사 생활은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와중에 연애도 결말이 났다. 그녀의 입술은 곪아 터졌고, 울긋불긋 뾰루지가 난 얼굴은 푸석했다. 겉이 그 정도니 속에선 천불이 나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목요일에 비행기와 호텔을 예약하고, 금요일에 홋카이도에 도착하는 무모한 일을 저질렀으리라.


“여긴 갑자기 웬일이야? 뭐야, 얼굴은 왜 이래?” 삿포로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S를 만났다. “몰라, 잠깐 지옥에서 탈출했어. 이번 여행은 제목 미정이야. 아무 계획도 없어. 그냥 나 좀 살려줘.”

S를 데리고 온천으로 갔다. 사람들의 살 냄새와 쾌쾌한 유황 수증기가 차가운 공기에 섞여 묻어났다. 노천탕 한쪽의 바위를 베개 삼아 머리를 괴고 누웠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이구, 아아…” 소리를 절로 냈다. 온천수가 얕게 흐르는 평평한 바닥에 등을 대고 다리를 폈다. 41도로 맞춰진 물이 이불처럼 목부터 발끝까지 덮었다. 담벼락 바로 뒤엔 눈사태가 날까 무서울 정도로 허연 숲이 가까이 다가왔다. 퍼런 하늘은 너무 커서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차가운 입김을 불었다. 매끈하고 뜨끈한 물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면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 여기 꼭 그때 그 바닷가 같다. 거기서 잤던 낮잠이 세상에서 가장 달았어.” 뜨거운 태양 아래서 S와 함께 누워있던 모래사장이 온천과 겹쳐졌다. “응, 신기하다. 날씨는 완전히 다른데, 뭔가 비슷하네. 정말로.” S와 나는 분명 다른 유기체인데, 떠올리는 7년 전의 기억과 느낌은 닮은 점이 참 많았다. 정말로 그날의 바람, 햇빛, 소음, 냄새가 우리를 동시에 홀렸던 걸까? 그것들이 태평양을 건너 홋카이도의 온천에 다다르기라도 한 걸까? 청춘과 설렘이 우리 몸을 다시 흐르는 중이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무슨 소식을 기다리는 것처럼 설렜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 오지 않고 집에 갔다면 여기 이런 장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앞으로도 설렐 일이 생각보다 많을지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중에서



오랜 그리움의 끝

삿포로가 고향인 쇼코는 당시 807호에 살았다. 지금은 홋카이도 박물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칠 년 만에 P타운 이웃 셋이 다시 모였다. S와 내가 현실 탈출을 꿈꾼다면, 쇼코는 반대였다. “난 여길 떠나고 싶지 않아. 사실 P타운과 삿포로는 닮은 게 많아. 나무가 많고, 공기도 좋아서 많이 걸을 수 있지. 도심을 가로지르는 느린 전차도 똑같아. 사람들도 느긋하고 순한 편이야. 지금 하는 일도 참 재미있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이곳에 살기 시작한 이후로 특별히 추억을 앓은 적은 없다. 오랫동안 그리웠던 어떤 순간의 환경이 정말로 여기에 머물고 있는 걸까.

‘P타운’의 모습과 많이 닮은 이곳에서, S는 설렘을 다시 느꼈을까? 나는 그녀가 오래된 추억 앞에서 충분히 무력해지고 외로웠기를 바란다. 그래서 또다시 시간이 지나면 오늘을 기억하며 앓고, 외로워하고, 극복할 수 있기를.
오래된 것들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한없이 무력해진다.
여행지에서 나는 극한까지 외로워지고 싶다.
「이시카와, 샤미센 가락에 밤이 저문다」 중에서
삿포로에서의 며칠이 지친 S를 모두 치유하진 못했겠지만, 그 시작이었기를 바란다. 어쩌면 이건 사치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가장 행복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시절이 있다. 그 청춘의 기억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인가.




다시 설렐 것이다

그녀와 온천을 다녀온 밤에 꿈을 꾸었다. 멀리서 새벽이 오는 밤이었다. P타운 숲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출렁였다. 어딘가에 단단히 홀린 청춘이 혼령처럼 공원을 떠돌고 있었다. 바람, 햇빛, 소음과 냄새, 모두 예전 그대로였다. 그걸 낚아채려 애쓰다 심장이 두근대고 땀이 났다.

꿈에서 깨어나 이런 생각이 스쳐 갔다. ‘우린 그때를 기점으로 자라기 시작한 거야. 우리가 가끔 앓았던 건 성장통이었겠지.’

시간이 지나면 S와 나는 P타운을 앓았던 것처럼 오늘을 그리워할 것이다. 몇 번이든 미끄러져도 좋으니 되돌아가는 길이 있다면, 거침없이 발을 내디디려 할 것이다. 다시 청춘이라면, 그러고도 남으리라. 우리가 사랑한 그 절묘한 환경을 만나 홀리는 순간 또한 다시 오겠지. 그때도 지금처럼 그리워하고 앓으며, 결국은 다시 설렐 것이다.




* 짧은 후기

제목과 다르게 다른 나라 이야기만 해서 민망하다. ‘P타운’은 미국 서부의 오레건주 포틀랜드다. (Portland, Oregon)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와는 1959년부터 자매 도시다. 두 도시는 공통점이 많다. 나무가 많고, 깨끗하고 광활한 자연 환경으로 유명하다. 도심에는 노면전차가 있다. 각각 자국 내에서 ‘걷기 좋은 도시’, ‘가장 살고 싶은 도시’ 등으로 선정되었다.


* 삿포로에서 당일치기가 가능한 조잔케이 온천(定山溪溫泉)

식사와 온천만 즐기고 하루 만에 돌아오는 ‘히가에리’ 플랜을 소개한다. 삿포로 근교에 여러 온천이 있지만, 그 중 가장 가까운 곳은 조잔케이 온천이다.(http://jozankei.jp) 당일치기 고객을 위한 무료 셔틀버스가 있는 온천장은 아래와 같다. 요금은 700엔~1,200엔 선이다.

-코가네유(小金湯) : 본 편에 S와 함께 간 온천이다. 지하철 난보쿠선 ‘마코마나이’역 앞에서 일 4회 셔틀버스가 있다. (9:30 / 11:00 / 13:45 / 15:45) (홈페이지 http://koganeyu.jp/)

-모리노우타(森の歌) : 뷔페와 온천을 묶은 히가에리 플랜이 있다. 사전에 버스와 뷔페, 온천을 모두 예약해야 한다. ‘마코마나이’역 앞에서 일 3회 셔틀 버스가 있다. (9:30 / 11:30 / 15:30) (홈페이지 http://www.morino-uta.com/)

-호헤이쿄 : 약 200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대형 노천탕이 있다. 단, 성별에 따라 노천탕 이용 일자가 다르니 사전에 꼭 확인해야 한다. 셔틀 버스는 삿포로 프린스 호텔에서 9:15에 출발한다. (홈페이지 http://www.hoheikyo.co.jp/)


[관련 기사]

-홋카이도의 수다를 시작하며
-삿포로, 눈보다 달이 먼저 차오르는 마을
-실연했다면 홋카이도로 오라
-하코다테의 심야식당
-일본에 ‘스끼다시’는 없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홋카이도 #하성란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삿포로
6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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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롬

2014.03.21

누구에게나 추억의 장소..지친 마음을 설레게 하고 힘을 주는 그런 공간..기억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이었어요^^
되돌아가고픈 어떤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홋카이도..그 곳에서 소중한 기억을 함께 나눈 오랜 벗과의 시간이 정말 부럽네요. 힘드셨을 그 분도 지친 마음가득 설렘과 따뜻함 등 좋은 기운으로 힘을 내셨으면 좋겠어요. 글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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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보석

2014.02.15

점점 나이가 들면서 매일매일이 똑같은 일상속에서 <설렘>이라는 단어도 내곁에서 멀어져 가는것 같은 서글픔을 느낍니다. 많은것에 설레임이 많았던 청춘시절을 가끔씩 떠올려 보면서 그때를 그리워해 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설렘이라는 단어를 잊은듯해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를 읽고 제 삶을 설레임으로 채워야 겠습니다. 정말 설레는 일은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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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우산

2014.02.09

아직 설레는 일이 많다! 공감합니다.^^물론 그래서 다시 설렐것이고요~.이국에서의 온천도 그 설렘의 순간에 놓인 한 장면이겠지요.따뜻하게 온천욕하고 싶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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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