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향기를 뿜어내는 탄광
칙칙한 탄광 단지를 예상하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하게 큰 공원이 나왔다. 이렇게 공원같이 넓은 대지 위에 과거 탄광 공장과 코크스 공장으로 쓰였던 수많은 건물들과 이와 관련된 독특한 형태의 철골 구조물들이 몇 개의 단지로 나뉘어 들어서 있었다. 작은 구조물들까지 합치면 수백 개는 족히 될 것 같은 참으로 놀라운 규모였다. 규모뿐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훌륭했다.
글ㆍ사진 이은화
2014.03.26
작게
크게

산업운동의 쾰른 대성당


옛 화력발전소 건물을 현대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런던의 테이트 모던은 무조건 새로 짓는 것보다 폐건물을 재활용하는 역발상의 성공을 잘 말해준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버려진 건물 하나가 아니라 폐광 단지 전체를 최소한으로만 개조해 새로운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변신시킨 예가 있다. 한때는 유럽 최대의 탄광 단지였던 촐페어라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 150여 년간 검은 연기와 먼지를 내뿜었던 탄광단지가 이제는 초대형 복합문화 단지로 변신해 유럽의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다. 과연 촐페어라인이라는 폐광 단지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세계문화유산’ ‘문화수도’ ‘쾰른 대성당’과 같은 문구들도 함께 소개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해 전부터는 문화예술인들뿐 아니라 전 독일 대통령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까지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에센을 ‘나의 독일 미술관 여행 답사 리스트’ 1번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올림1.jpg

촐페어라인 전경

 

조각공원 같은 탄광 단지


에센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촐페어라인으로 향했다. 독일의 탄광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던 터라 더욱 궁금했다. 독일의 탄광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산이 아니라 지하 1,000미터 정도 깊이의 땅속에 위치해 있다는 정도가 내가 가진 유일한 상식이었다.

 

올림2.jpg

촐페어라인의 상징인 골리앗 탑

 

그런데 이곳은 그 입구부터가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칙칙한 탄광 단지를 예상하고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하게 큰 공원이 나왔다. 이렇게 공원같이 넓은 대지 위에 과거 탄광 공장과 코크스 공장으로 쓰였던 수많은 건물들과 이와 관련된 독특한 형태의 철골 구조물들이 몇 개의 단지로 나뉘어 들어서 있었다. 작은 구조물들까지 합치면 수백 개는 족히 될 것 같은 참으로 놀라운 규모였다. 규모뿐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훌륭했다. 각각의 기능에 맞게 설계된 철제 구조물들은 모양이 제각각이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건물 주변이 모두 초록의 자연으로 덮여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독일이라지만 대규모의 공장 단지까지 숲과 나무로 가꾸어져 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탄광 단지라기보다 대형 철제 조각들로 꾸민 거대한 조각공원이나 산업유물로 만든 신新로마 유적지 같은 인상을 주었다.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아무런 정보 없이 가게 되면 어디부터 가야 할지 무엇을 봐야 할지 막막할 뿐 아니라, 지도가 없으면 단지 내에서도 길을 잃기 일쑤다. 초입에 있는 안내소에서 지도와 안내서를 받아들고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단지는 크게 A, B, C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각각 샤프트12, 샤프트 1/2/8, 코킹플랜트Coking Plant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들이었다. ‘샤프트Shaft’는 우리말로 수직 갱도라는 뜻으로, 1847년에 지은 샤프트 1이 가장 오래된 갱도 건물이고 뒤에 붙은 번호가 클수록 늦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지도 가장자리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 있는 개별 공간에 대한 정보를 한참을 읽어 내려가다가 낯익은 이름 두 개를 발견했다. 바로 루르 박물관Ruhr Museum과 레드닷 디자인 박물관Red Dot Design Museum이었다. 이 두 곳은 촐페어라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소이자 대중에게 항상 열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산이 없어도 나무를 수출하는 나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12미터로 먼저 갔다가 17미터와 6미터로 가세요.” 박물관 입장권을 샀더니 안내 직원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 모습에 직원은 다시 천천히 설명을 해줬다. 그랬다. 지하 석탄을 효율적으로 캐기 위해 지은 이 건물은 여느 건물들과 층의 개념이 달랐던 것이다. 1층, 2층, 3층이 아니라 건물이 위치한 지상 높이에 따라 층을 표기하고 있었다. 상설 전시는 17미터 층, 12미터 층, 6미터 층에서 전시되고 있고, 12미터 층의 절반가량은 기획 전시실로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전 티켓까지 산 내게 직원은 12미터 층을 먼저 관람한 후 세 개 층으로 나뉜 상설 전시를 보라는 것이었다. ‘현재’ ‘기억’ ‘역사’라는 주제로 구분된 각각의 상설 전시실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루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고, 기획 전시실에서는 촐페어라인 탄광의 역사와 함께한 독일 철강 그룹 크루프사의 200년 역사를 조망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올림3.jpg

각 층의 높이를 알려주는 미터 표시

 

올림4.jpg

 샤프트 12의 24미터 높이에 위치한 루르 박물관 카페

 

각 전시 층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지만 새로 지은 계단이 관람객들에게는 더 인기 있었다. 계단 전체에 설치된 오렌지색의 강렬한 조명 덕분에 마치 댄 플래빈의 라이트 아트 위를 걷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파노라마’라고 불리는 45미터 높이의 꼭대기 층은 주변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라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명소인 듯했다. 꼭대기 층에서 내려다본 단지 주변의 풍경은 더욱 놀라웠다. 탄광 단지가 아니라 그냥 초록으로 범벅된 거대한 숲 속에 와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올림5.jpg

상설전시실로 향하는 계단

 

올림6.jpg

 박물관 전시실 모습

 

독일은 산이 없어도 나무를 수출하는 나라다. 알프스 산에 면해 있는 남부 지역을 제외하면 국토의 대부분은 구릉지로 산이 없다. 하지만 ‘산이 없으면 숲이라도 만든다’는 생각으로 독일 정부는 일찍부터 전 국토에 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기름이 고갈돼도 나무 연료로 100년은 견딜 것이다’ ‘나무만 팔아도 몇십 년은 버틸 수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독일 지역 어디를 가도 나무가 많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탄광 단지에까지 이렇게 많은 나무를 심어 울창한

숲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후대를 생각하는 혜안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산업?정치?문화가 만나는 곳, 레드닷 디자인 박물관

 

올림7.jpg

 

올림8.jpg

레드닷 디자인 박물관 전시 모습

 

다시 오렌지색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 다음으로 발길을 옮긴 곳은 레드닷 디자인 박물관이었다. 사실, 촐페어라인이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게 된 것도 루르 박물관보다는 이 디자인 박물관 덕이 크다. 1997년 개관한 이곳은 4,000평방미터가 넘는 공간에 2,000점 이상의 현대 디자인 작품들을 전시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박물관이다. 특히 디자인 분야 전문가나 학생이라면 꼭 방문해야 할 디자인의 성지이자 메카와도 같다. 재미있는 점은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이 대부분 제품 디자인들이다 보니 전시품들 중 한두 개쯤은 자신의 집이나 사무실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관람객들이 더 친근하게 여기고 이곳을 찾는지도 모른다. 천장에 매달린 승용차에서부터 가구, 각종 사무용품이나 주방기구, 욕실용품, 건설공구, 가전제품, 시계 및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디자인 명품들은 죄다 모여 있다. 그리고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의 수상작이라는 것이다. ‘디자인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는 상품디자인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국제 공모전 중 하나다. 촐페어라인 단지 내에는 루르 박물관이나 레드닷 디자인 박물관 외에도 갤러리와 각종 공연이 열리는 이벤트, 스튜디오와 사무실, 카페와 레스토랑, 서점, 각종 상점, 유명 예술대학과 연구소, 유치원 등 참으로 다양한 공간들이 들어서 있다. 말 그대로 ‘초대형 복합문화 단지’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복합문화 단지 덕분에 과거의 공업도시 에센은 이제 문화예술의 거점 도시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img_book_bot.jpg

자연미술관을 걷다 이은화 저 | 아트북스
이 책은 대도시 유명 미술관 코스에 싫증난 이들, 한가로운 미술관 여행을 꿈꾸는 이들을 독일과 네덜란드의 국경에 자리한, 라인강 주변 자연미술관으로 안내한다. 현대미술과 관계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은화가 지난 10년간 직접 다닌 미술관 여행을 바탕으로, 여느 여행서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비밀 루트를 공개했다. 미술관의 탄생 배경뿐 아니라 건축 콘셉트, 전시 프로그램, 작가와 작품에 얽힌 뒷이야기 등을 충실히 담아 여행을 계획하는 독자를 위한 내실있는 가이드북이 될 것이다.

 



[관련 기사]

-휴식과 명상을 선물하는 특별한 미술 여행
-그림에 빠져 루브르만 3천 번 넘게 갔어요
-‘꽃보다 할배’ 제작진이 이 책을 읽었더라면
-갖고 싶은 유럽의 현대작품들 - 『가고 싶은 유럽의 현대미술관』
-화랑과 미술관의 차이를 아시나요? - 박파랑 『큐레이터와 딜러를 위한 멘토링』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촐페어라인 #독일 #골리앗 탑 #탄광
1의 댓글
User Avatar

woojukaki

2014.03.26

오늘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 받았어요.첫 미술관 소개지부터 홀릭하며 읽고 있는 중이랍니다.온천탕을 미술관으로 만들수 있는 저력을 부러워 하면서 말이져..^^
답글
0
0
Writer Avatar

이은화

이은화는 현대미술가, 평론가, 독립 큐레이터, 대학 강사 등 미술과 관계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술사학과 대학원을 다녔으며, 이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여 캐빈디시 대학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고, 윔블던 스쿨오브 아트에서 순수미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세계 최대의 미술 경매회사인 소더비 옥션하우스에서 최고의 예술 전문 인력을 키우기 위해 세운 런던 소더비 인스티튜트에서 ‘현대미술학(이론 및 행정)’ 석사를 취득했고 맨체스터대학과 소더비 인스티튜트가 함께 운영하는 아트비즈니스 전공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런던에서는 다수의 그룹전에 기획자와 작가로 참여했으며, 윔블던 드로잉 센터 갤러리에서 근무했고, HDT 기업 컬렉션의 아트 컨설턴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2002년 겨울 귀국한 이후 작가 및 평론가,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며 현재 중앙대학교와 성신여자대학교, 삼성문화 아카데미 등에서 ‘유럽 미술관과 컬렉션’‘현대미술’ 등의 주제로 강의를 맡았다. 미국 온라인 예술잡지 『아트크러시(Artkrush)』를 비롯 『월간 미술세계』 『퍼블릭 아트』 등 국내 미술 매체에 글을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2004년 아트스페이스 미음 기획으로 “웰컴-감정의 에스페란토”라는 주제의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성곡미술관을 비롯해 서울시립미술관, 선화랑, 세줄 갤러리, 한전프라자 갤러리 등의 테마 기획전에 초대작가로 참여하여 활약한 바 있다. 현재 서울과 런던을 오가며 더 많은 이들을 현대미술의 매력 속에 빠져들게 하기 위해 강연과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