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싱글 「My last song」은 국내 음원사이트에서는 판매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음악이 너무 싸게 팔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음악이 조금은 더 비싸게 팔리길 원합니다.”
다음은 안승준이 자신의 공식사이트에 올린 글의 일부다.
보드카레인의 보컬 안승준이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첫 솔로 싱글을 냈다. 유튜브에 음원을 공개하며 노래를 듣는 건 무료로 하되 소장은 아이튠즈와 밴드캠프를 통해 유료화한, 조금은 색다른 방식을 통해서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그는 동일한 글에서 '애초부터 아티스트가 할 수 있는 선택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3월의 어느 날, 홍대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현재의 왜곡된 음악 산업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에만 머무르지 않고, 안승준은 새로운 유통방안을 고민하고 실행하며 이에 저항하고 있었다. “사실 아직은 시기상조잖아요. 이 방식으로 계속 싱글을 이어가서 EP가 나올 정도의 성과가 있을 때 '저 이랬어요'하고 자랑하고 싶어요.” 이제 겨우 첫걸음이라며 조심스러워했지만, 그의 말은 담담하면서도 막힘이 없었다. 어떤 질문에도 시종일관 허심탄회했다. 길게 이어진 대화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향한 차분하고도 단단한 열의가 숨길 길 없이 배어나왔다.
안승준이라는 이름으로 내는 첫 자작곡인데 제목이 First song이 아닌 「My last song」이다. 제목의 의미가 궁금하다.
이 노래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는 노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쓴 곡이에요. 가사에도 나와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틀어줄래? 내가 언젠가 침대에서 나올 수 없게 된다면'하고요. 영국에서 아내랑 지내면서 공부하느라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좋았어요. 그 행복했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가사로 옮겼는데, 좋으면서도 이런 순간이 다시 올 수 없겠지 하는 깨달음이 동시에 올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이게 나의 라스트 송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고, 또 반어적인 의미도 담긴 것 같아요.
유통 방식이 독특하다. 국내 음원사이트에는 유통하지 않고 아이튠즈와 밴드캠프를 통한 판매 방식을 취했는데, SNS에 이번 싱글을 소개하면서 매달 같은 방식으로 낼 거라고 적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내는 걸 목표로 하고 있는데, 제가 윤종신 선배처럼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매달 낸다기보다는, 싱글을 주기적으로 내서 그것이 모아져서 하나의 피지컬 앨범이 나오기까지의 행보를 지켜봐주십시오 하는 개념이 더 큰 거 같아요. 한 번에 앨범을 듣는 시대도 아니고. 더군다나 안승준이라는 사람의 앨범이 많이 노출될 리도 없는데. 12곡을 피 토해서 써도 타이틀곡 한 곡으로 앨범을 인식하게 되는 시장 형태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있었고, 제 능력에 있어서도 끊임없이 지연될 수밖에 없는 부분도 있고. '잘 안 되네' 그러면서 손을 놔 버릴 수도 있거든요. 복합적인 것 같아요. 음. 가치를 하나하나 더 높이고 싶어요. 판매 유통에 있어서도 한곡 한곡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죠. 일종의 실험 비슷한 거죠.
영국에서 뮤직 비즈니스를 공부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러한 유통방식을 선택한 데는 유학하며 공부한 영향도 있는가?
제일 친한 친구도 제가 뭘 공부했는지 잘 몰라요.(웃음) 뭉뚱그려서 뮤직 비즈니스 관련된 거라 말하고 다녔는데, 골드스미스 대학의 'Creative and Cultural Entrepreneurship'학과라고, 아티스트를 위한 경영자 과정을 배워요. 경영에 대한 전통적인 방식을 가르치진 않아요. 거기서 원하는 것도 혁신적인 방법이고, 사례 위주, 네트워크 위주죠. 미디어와 예술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강해요. 뭐를 가르치기보다는 어떻게 사는지 다양한 면면을 보여 줌으로써 깨닫게 해 준 거 같아요. '내가 왜 시스템을 따라가야 하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시스템을 따르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선배들이나 친구들 만나면 그런 이야기들을 해요. “한 곡이 600원에 팔리면 69원 돌아오는데, 작사 작곡에 노래 다 불러도 10% 좀 넘는 건데...” 그럼 아예 거기에다 유통을 안 하면 안 되냐고 제가 그러면, 다들 대안이 뭐냐고 물어요. 그런데 그만한 가치에 상응하는 대안은 없죠. 그래서 완전 혼자 해 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혼자 해야 가능한 부분이 있으니까요. 회사도 없고 멤버도 없고, 이때 안 하면 언제 하나, 내가 무엇을 배우고 느꼈으며, 언제까지 시스템에 종속될 것인가, 좋은 시스템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쭉 쌓여 왔던 생각들이 그쪽에 가서 다른 생각들과 방식들 태도들을 만나면서 더 발전한 거 같아요.
주위 반응은 어땠나?
정말 말리더라고요. 지지하는 건 아내밖에 없고요. 다 좋은데, 그래도 하나는 백업을 마련해 두는 게 어떻겠냐고. 그런데 하나를 덜어내면 눈에 띄는 1만 인식하잖아요. 나머지 9는 안 보고요. 걱정하시는 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10 자체가 아예 안 보일 수 있다고 염려하죠. 노출되는 게 0인데, 그래도 1은 보여야하지 않겠냐고. 그런데 저는 1이 보이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해요. 그게 성공하면 멋있어도 실패하면 어쩌냐 하지만, 예술은 한 번도 대안을 생각한 적이 없어요. 대안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바뀌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내가 뮤직비디오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영상에 사랑스러운 시선이 담긴 게 느껴졌다. 뮤지션이 본인의 사생활을 내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 영상은 틈틈이 아이폰으로 찍어놓은 거예요. 학교에서 배운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해서 많이 돌아다녔고, 특히 페스티벌이나 공연 같은 델 주로 다니다 보니 춤출 일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춤추는 장면이 많이 나오게 됐죠. 뮤직비디오로 쓰려고 찍은 건 아니지만, 그 당시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래서 영상에 진정성이 담기지 않았을까 싶어요. 음. 뮤지션은 그래도 신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냥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저도 뮤지션은 언제나 섹시해야 한다고 믿어요. 또 섹시하고 싶고요. 그런데 사생활이 드러난다고 섹시해지지 않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생각이 섹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드카레인 때와 비교했을 때, 창법과 스타일이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역시 유학의 영향이 아닌가 싶은데 음악적으로 영향 받은 부분이 있다면.
외톨이가 되면서.(웃음) 제가 외향적인 편인데도 영국에 가니 위축이 되더라고요. 말은 다 할 수 있어도 못 알아듣는 순간이 있으니까요.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러면서 음악을 무척 다양하게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정말 좋은 노래는 많은데 나 같은 목소리는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노래를 잘한다는 게 아니라, 세상에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하고, 나는 나의 매력을 100% 갖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어요. 한국에서는 노래를 어설프게 하는 정도라고 여겼거든요. 가창력을 비교하니까 스스로 목소리에 대한 자부심도 없어졌는데 그걸 극복했어요. 제가 가진 게 그거(목소리)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 목소리에 가장 어울리는 키와 진행으로 노래를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저는 저음이 별로 안 예쁜 편이라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그런 걸 없애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점층법을 위한 쓸데없이 낮은 벌스는 필요 없다, 그냥 가장 예쁜 목소리로 시작하자! 전 악보도 못 그리고 기타도 못 치고 화성악도 몰라요. 아이패드에 가라지 밴드라는 툴이 있는데 그걸 갖고 흥얼거리다 이 목소리가 난 가장 마음에 들어, 그런 식으로 시작해서 키 잡고, 근데 이게 무슨 키지? 그러면 화면에 코드가 나와요. 그렇게 혼자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 치듯이 만들었어요. 제일 중요한 건 내 목소리에 가장 맞게 만든다는 거였죠.
중간에 등장하는 트럼펫 사운드가 인상적이었다.
최근에 들은 음악들이 관악기의 따뜻함을 많이 갖고 있었어요. 관악기를 넣은 음악을 꼭 하고 싶었어요. 쓸쓸한 사랑노래지만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언젠가 우리는 끝난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춤을 지금 추자는 건데, 그래서 조금 신나고 즐겁더라도 쓸쓸함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트럼펫이 그 쓸쓸함을 담은 튠에 가장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방식으로 곡 판매를 시작하면서 기대와 다른 부분도, 거꾸로 애초의 우려가 기우로 변한 부분도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경험도 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제일 중요하는 건 음악의 힘이 있느냐 없느냐인 거 같아요. 제 음악의 힘이 있다면 살아남겠죠. 소셜 네트워크가 좋은 게, 힘이 있는지 없는지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걸 보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기대보다 실망한다거나 그런 건 없어요. 밴드캠프에서 음악을 팔면 곧바로 메일이 날아오거든요. 사람들이 거기서 사고 메시지를 보내요. 제가 처음으로 받은 메시지가 'Thank you for your beautiful song'이었어요. 고시가격이 1달러인데 3달러를 주고 보냈더라고요. 그걸 받는 순간에 내가 이거 하길 잘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이 한순간만으로도 나는 한 거다! 누가 제 음악을 3배의 값으로 사 준 거잖아요. 나는 내 음악이 600원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의 10%인 69원이 아니라. 누군가가 내 음악을 원하고 있고 그것에 맞게 사고 있다는 걸 체감해 본 건 처음인 것 같아요. 평생 잊지 못할 3달러죠.
밴드에 대한 질문을 좀 하고 싶다. 보드카레인은 현재 어떤 상황인가? 잠정 중단인가 아니면 해체한 건가?
사실은 해체 상황이죠. 멤버가 이 자리에 다 있는 게 아니라 저만 뭐라 말하기는 좀 그래요. 제 입장만 전달되면 안 되니까요. 그만큼 해체에 대한 멤버들의 관점이 다 달라요.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해체를 결정하게 된 건 제 선택이었다는 거예요. 저 때문에 해체한 거예요. 제가 더 이상 못할 거 같았어요. 같이 하는 것보다는 혼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고 그 이유는 말씀 드렸듯 (새로운 유통 방식 같은) 혼자 해야만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어요. 사실 그게 이상적인 것에 가깝지 부귀영화는 아니거든요.
3집 앨범이 괜찮았는데 영국 유학을 갔다. 굳이 유학행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
그건 보드카레인 시작할 때부터 생각하던 거였어요. 3집 가수라는 말이 있어요. 음악계에선 3집 정도 냈으면 살아남았다고 인정해 주는 풍토가 있는데, 3집까지 내보고 나는 그때 유학을 가서 비즈니스를 공부할 테니까 그 후에는 회사를 만들어서 하자. 그게 10년 전에 윤하랑 보드카레인을 해 보자고 하면서 우리가 술 마시며 하던 이야기예요. 갑작스럽게 간 건 아니고, 사실은 그걸 다 지킨 거죠.
유학을 가 있는 동안, 다른 멤버들은 모두 개인 독집을 냈다. 멤버들의 작품은 어떻게 들었나?
윤하의 앨범은 유학할 때 들었는데 윤하만의 감성이 보여서 좋았어요. 막 터프할 거 같은데,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섬세한 면이 있거든요. 해완이는 완전 변했죠. 보사노바, 삼바로 갔으니까. 제가 볼 때 해완이는 브라질 음악을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거 같아요. 가사에 비치는 삶에 대한 태도도 달라져 있더라고요. 상준이 음악은 한국 와서 들었는데, 워낙 드럼을 잘 치는 애니까......, 그래서 혼자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멤버들만의 면면들을 계속 가져가고, 이걸 유닛 형태로 합칠 수 있다면 어떨까. 처음 우리가 홍보될 때 '대한민국의 비틀스가 되고 싶어요'라고 나왔는데, 비틀스가 되고 싶은 건 맞아요. 그런데 거기서 중요한 건 멤버 하나하나가 살아 있다는 거거든요. 자기 앨범이 다 있고요. 아무리 전설적인 밴드라 하더라도 퀸의 베이시스트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콜드플레이 베이스가 누구며 드럼이 누군지 매니아가 아닌 이상 누가 알아요. 유일하게 전 세계 사람들이 모든 멤버를 다 알고 있는 건 비틀스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 면에서 비틀즈를 닮고 싶었죠.
보드카레인은 음악적인 면보다 이미지나 대중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분위기가 있는데, 이런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보드카레인 첫 EP가 나왔을 때는 되게 자신감이 있었어요. 당시 우리가 좋아했던 게 브리티시 팝이니 그걸 구현해보자 했죠. 제일 큰 문제는 보드카레인이 데뷔할 때 '서울대 아티스트'라는 꼬리표를 달았다는 거예요. 지금도 소속사 형과 술 마시면 제가 욕을 해요.(웃음) 사실 멤버들도 그렇고 회사에서도 당시엔 그런 이미지가 주는 효과가 더 클 거라 기대했었어요. 그런데 그건 하루 히트에 불과한 거였죠. 흔히 말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는 순간 촌스러워졌어요. 진정성이 전해질 리가 없잖아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저희를 저런 워딩을 하는 애들 중 하나구나 하시면서 그저 그렇게 생각해 버리게 만들었죠. 그런 부분이 저희를 오랫동안 잡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더욱 아트적인 지점에서 시작하려는 건가. 이런 방식이 홍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앨범이 나오기까지는 사막을 걸어가는 과정일 것 같다.
쉬울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이상하게 터져서 잘되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 같고. 사막을 걸어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걸어야겠죠. 저는 저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딱 4명만 있어도 남들이 어렵다는 거 해 볼 만한 힘은 얻는다고 생각해요. 이게 훨씬 어려운 환경에서 노력하시는 분들에겐 건방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예술계라고 제한했을 때, 아무리 남들이 어렵다고 가지 말라고 해도 지지하는 사람이 서너 명만 있으면 충분히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 같아요.
인터뷰 : 김반야, 윤은지
정리 : 윤은지 (theotherso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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