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다시 생각해 본 단어들
5월 23일 시공사가 주관하고 예스24와 KT&G 상상Univ.(상상유니브)가 후원한 상상북토크가 열렸다. 상상북토크는 매달 문화계 인사를 초대해 청중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주인공은 여행작가로 알려진 변종모. 그간 서울에서만 진행하던 상상북토크가 이번에는 수원에서 개최되었다. KT&G 코스모수원타워 2층에 모인 60여 명의 독자와 변종모 작가의 만남은 신간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출간 기념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는 이전까지 변종모 작가가 써왔듯, 사진과 글이 어우러진 책이다. 특이할 점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그가 낸 책 중에서는 가장 두껍다. 그만큼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길 위에서 배운 말’이라는 부제에 나타나듯, 이 책은 여행하면서 일상에서 쓰던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가 떠올린 단어의 목록을 나열하자면 이렇다.
길, 꽃, 대화, 여행, 천국, 사랑, 산책, 집, 도시, 시장, 바다, 거울, 진심, 어린이, 청춘…
이렇게 단어를 중심으로 책을 엮은 이유가 있다. 작가는 중학교 때부터 매일 일기를 써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생각해 왔고, 마음에 품어왔던 단어로부터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여행을 하면서 하늘, 바다, 대화라고 한 단어로 지칭할 수 있는 게 장소마다 달라져 보이기 시작했다.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단어에 관해 써 온 게 책으로 이어졌다. 이 중에서 ‘대화’에 관한 대목을 살펴보자.
사실 오래오래 길 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대부분 견디지 못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 말보다 전할 수 없는 마음이다. 물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다양하다면야 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자신의 의지를 조금 더 자세하게 전할 수 있을 것이므로. 하지만 무슨 수로 이 지구상의 언어를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질문 속에 가장 크게 있는 의도는 자신의 안전이나 편리함에 대한 보장일 것이다.
그런 소통만 한다면 크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몇 가지의 생존 언어만 터득해 떠나면 되니까. 하지만 그들이 또는 내가 길 위에 서는 이유가 단지 그게 전분가? 아니지 않은가? 세상과의 소통이 아니던가? 그것이 단지 말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고맙다 또는 미안하다는 아주 간단한 이 한마디의 말만 생각해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말은 간단히 전할 수 있지만 진심대로 전하는 건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그 말을 전하기 전 진심으로 당신은 고맙고 진심으로 미안하길 바란다.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34-35쪽)
여행의 목적이 세상과의 소통이고, 인간의 언어만으로는 세상에 전할 수 없는 게 있다는 작가의 말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불립문자, 이심전심, 교외별전 등으로 표현했다. 선불교에서 화두로 스승과 제자가 소통하듯, 이날 자리에 선 변 작가도 독자에게 물음을 던졌다.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가 그것. 이 물음을 다루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직장생활을 관두고 여행작가가 되기까지
지금은 여행작가로 책도 여러 권 냈지만, 원래 그는 여행이나 문학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대학에서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림을 좋아해 전공을 선택할 때도 부모님의 강압이나, 사회적인 요구는 전혀 없었다. 좀 더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일본 유학은 실패였다.
한국으로 돌아왔고 전공을 살려 직장에 들어갔다. 광고대행사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했다. 그 회사에서 2년 동안 ‘정로환’을 비롯하여 여러 제품의 광고를 만들었다. 당시에 그는 자만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인정받았고 자신의 동기 중 가장 먼저 직장을 잡았다. 그렇게 2년을 일하면서 자괴감이 왔다.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내야 해서 피곤했다. 유학파와 국내파 간의 암묵적인 경계 때문에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다시 일본으로 갈 결심을 했다. 하지만 이미 한 차례 유학을 갔던 터라 여행비자나 비즈니스비자만 허용됐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게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을 끝내고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회사에 들어가면 1년 정도 워밍업을 하고, 나머지 1년은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보여줘라. 그래야 더는 그 회사에 미련을 못 느낀다. 그렇다고 2년마다 회사를 관두라는 말은 아니다.”
어떤 일이든 10년은 해 봐야
이어서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이어졌다. 독일에는 오버라머가우라는 마을이 있다. 예수의 고난극을 10년에 한 번씩 올리는 마을로, 주민은 5천 명 정도다. 그런데 이 5천 명이 모두가 단원이다. 10년에 한 번 있는 무대를 위해 마을 주민들은 10년 동안 준비한다. 변종모 작가는 2010년에 공연을 보러 찾았는데, 그때 깨달았다. 어떤 일을 하든 최소한 10년은 해 보고 결정해야 한다고.
“뭐든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을 때는 10년은 아무 말도 없이 그 일을 쭉 해 보라. 나도 사회생활 할 때 많은 생각이 들더라. 이렇게 생각이 많이 들 때는 선택이 잘못됐을 수도 있는데, 빨리 도망가는 것도 답이긴 하다. 하지만 최소 10년은 해야겠더라.”
그렇게 해서 그는 10년 동안 사회생활을 해 보고 여행작가로 전업했다. 그림을 좋아해서 광고 대행사에 갔고 10년이 지나고 보니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공교롭게도 이제는 여행작가로서의 10년째가 돌아오고 있다. 아직은 긍정적이다. 지금까지는 즐겁고, 예전보다 시간도 훨씬 여유로워졌다. 통장 잔액이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것을 10년은 밀어주겠다는 게 변종모의 결심.
독자에게 질문을 받기 전에 그가 먼저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을 공개했다. 왜 여행을 가는지, 여행을 갈 때 어디를 가는지가 그것. 다소 맥 빠질 수도 있지만, 변종모는 여행을 가기 전이나 갔다 온 뒤나 변하는 건 “없다”고 말한다.
“여행 가는 이유는 한 가지다. 한국에 굳이 없어도 될 때. 누군가 나를 불러주고 사랑해 주면 갈 이유가 없다. 여행 가도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두 번째 책에 써 놓았듯, 지구를 몇 바퀴 돌아도 스스로 변하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 여행에서 얻는 건 그리 크지 않다. 먼 곳으로 여행 간다고 친구들 불러 모아서 ‘나 멀리 갔다 올게’ 하는데, 사실은 그 친구를 2번 정도 안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 친한 친구라도 사회생활 하다 보면 1년에 2~3번 보는 관계가 참 많다. 나도 첫 여행 갔다 와서 경비 아저씨에게 오랜만이라고 잘 지냈느냐고 물었는데, 아저씨가 관심도 없더라. 그렇다. 삶에서 여행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여행을 간다고 남이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고. 그럼에도 여행을 중요하게 만들 수 있다.”
독자와 나눈 대화
변 작가의 말이 끝난 뒤에는 독자가 묻고, 그가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에세이를 쓴다는 건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한다는 의미다. 사생활 공개하는 데 거부감은 없나?
중학교 때부터 일기를 매일 썼다. 하루에 한 줄이라도 쓴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이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걸 대신 경험해 드린다. 모든 사람이 1년씩 여행을 갈 수 없지 않나. 나는 시간이 많다. 내가 대행해 드린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써야 한다. 책을 많이 팔겠다고, 인기를 끌어보겠다고 내 사생활을 부풀리거나 줄여서는 안 된다. 에세이스트가 기본으로 갖춰야 할 자세다.
젊을 때 가봐야 할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
여행지를 결정할 때는 이미 가고 싶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그걸 남과 비교하지 마라. 젊을 때는 돈이 없으니 싼 곳을 갈 수밖에 없다. 그런 곳을 불편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위험한 데를 찾아가라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이 내게 왜 그렇게 인도를 자주 가느냐고 물어본다. 먹는 것 자는 것보다는 사람, 풍경, 그들의 마음 씀씀이에 매료된다. 그쪽에 있을 때는 못 먹고 못 자지만 감동 받는 게 크다. 중학교 때부터 쿠바를 꿈꿨다. 언젠간 한 번 갈 것 같았는데, 거의 15년 만에 결심하고 갔다. C.U.B.A 이런 글자가 오라고 말할 때가 있다. 이럴 때 가면 된다. 평범하게 갈 수 없는 곳을 시도해 봐야 한다. 여행을 가서도 일상과 똑같다. 오늘처럼 사람 만나고, 밥 먹고, 풍경 본다. 여행은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것인데, 여자친구나 남자친구 만날 때와 같다. 만나기 전에 대강의 프로필만 듣고, 막상 가서 상상했던 것과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삶과 여행은 비슷하다. 3개월만 계획하고 갔는데 1년, 1년 반 머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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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변종모 저 | 시공사
섬세한 시선, 나지막한 글소리로 삶을 이야기하는 변종모 작가의 다섯 번째 에세이. 이번 에세이는 작가가 1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며 맞닥뜨렸던 순간의 편린들을 모아 엮은 ‘인생 사전’이다. 길 위에 섰던 그 첫날부터 집으로 돌아온 바로 어제까지 일어났던 마음의 모든 일을 낱말로 다시 정리해 작가의 근간을 보여준다. 지난 에세이들에서 중간 중간 가슴을 움켜쥐게 했던 작가만의 아포리즘을 총망라해 다듬고 매만진 이번 에세이에는 가장 깊이 있고 면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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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규(인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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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ee78
2014.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