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막판, 파산에 이르렀던 마블은 위기를 기회로, 도약의 전기를 마련했다. 체계적인 영상화, 캐릭터의 재구축, 다양한 상품 개발 등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우선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등 외부 인력을 스토리에 투입했던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점원들> <체이싱 아미> 등을 연출하며 인디영화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케빈 스미스는 2001년 <데어데블>의 스토리를 썼다. 드라마 <버피와 뱀파이어> <파이어플라이>를 만들었고 후일 영화 <어벤져스>의 감독이 된 죠스 웨던은 <어스토니싱 엑스맨>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SF드라마 <바빌론5>를 만든 마이클 J.스트라진스키에게는 스파이더맨 등의 스토리를 맡긴다.
(맨 왼쪽) 마이클 스트라진스키 [출처:wikipedia]
(가운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집으로 (오른쪽)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 탄로 [출처:wikipedia]
마이클 J.스트라진스키가 쓰고 존 로미타 주니어, 스콧 한나가 그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 집으로>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탄로>에서 피터 파커는 스파이더맨의 힘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숙모와의 관계도 안정된다. 이전에 스파이더맨 만화를 보지 않았던 독자라도, 이 이야기만으로 스파이더맨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다. 2천 년대 초반 마블의 전략은 캐릭터의 기원을 되짚어보고, 더욱 충실한 스토리로 무장하는 것이었다. 영화 <엑스맨>이 성공하면서 울버린의 기원을 그린 <울버린:오리진>도 시작했고,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블랙 이슈’에서는 2001년 벌어진 9.11 사건을 집어넣어 참혹한 현실에서 ‘히어로’는 대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위) 얼티미츠 (아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출처:wikipedia]
2002년에는 ‘얼티미츠’ 타이틀이 안착하며 마블의 희망적인 미래를 예고했다. <원티드> <킥애스>의 작가인 마크 밀러가 스토리를 맡은 <얼티미츠>는 마블 캐릭터의 영상화를 위한 전초기지였다. 2000년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 2002년에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파산 위기였던 90년대의 마블은 영화 판권을 팔아치우면서 위기를 넘겼지만 21세기에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다. 마블의 캐릭터를 만화와 애니메이션만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로 전개하며 더욱 방대하고 치밀한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캐릭터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고, 정서적 깊이를 만들어야 했다. 캐릭터의 동시다발적인 이야기도 필요했다. 만화에서 전개되는 ‘유니버스’와는 다른 지평에서 움직이는 ‘유니버스’를 위해서.
마크 밀러의 <얼티미츠>에서는 정부 주도하에 새로운 어벤져스가 조직된다. 닉 퓨리가 쉴드의 수장을 맡고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토르 등을 끌어들인다. 반항적이고 정부에 불신을 느끼는 캐릭터인 울버린과 스파이더맨은 자연스럽게 빠진다. 진짜 이유는 엑스맨과 스파이더맨의 판권이 마블에 없기 때문이지만. <얼티미츠> 초반에,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농담처럼 스타크 역에는 어떤 배우가 좋고, 닉 퓨리는 누가 좋고 등등. 비록 만화대로 캐스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닉 퓨리만은 만화의 선택대로 사뮤엘 L 잭슨이 되었다. 원래 닉 퓨리는 백인이었지만 <얼티미츠>에서는 흑인 닉 퓨리가 등장했다. 애초에 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마크 밀러의 <얼티미츠>는 보다 현대적이고 영상적인 스토리텔링으로 눈길을 끌었다.
21세기의 마블은 영상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파산 위기를 겪었던 마블은 자신들의 캐릭터를 주류에 안착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마니아들이 수요일에 만화 서점에 들러 신간을 구입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했다. 캐릭터를 현실화시키고, 편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즉 슈퍼히어로 영화와 만화가 함께 발전해야 했다. <엑스맨>과 <스파이더맨> 이후로는 마블 캐릭터 영화가 거의 매년 관객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만화책 시장은 마니아 시장을 넘어 확산되었다. 다시 발행된 타이틀이 인기를 얻으면서 기존 만화 시장이 커지고, 그래픽노블은 일반 서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신간만 반짝하면서 팔려나가고, 마니아용 소장판이 뒤를 잇는 흐름에서 벗어나 영화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새로운 독자가 과거의 만화를 언제든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언맨 [출처:wikipedia]
마블은 독자적인 영화사를 설립하여 제작을 추진했다. 가장 인기 있는 엑스맨과 스파이더맨이 없는 상황에서, 마블은 다소 지명도가 떨어지는 아이언맨을 첫 영화로 선택했다. <엘프>와 <자투라> 등을 만들었던 존 파브르를 감독으로 영입한 마블은 <아이언맨>을 성공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일단 필요한 것은 캐스팅이었다. 평범한 액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연기력이 있는, 개성적인 배우가 필요했다. 그래야만 ‘아이언맨’이 그저 슈트를 입고 날뛰는 천방지축 난봉꾼이 아니라 내면의 콤플렉스, 불안과 갈등하며 성장하는 현실적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기네스 펠트로우에 이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캐스팅되었을 때 존 파브르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아카데미상까지 받은 뛰어난 배우들이 ‘슈퍼히어로’ 영화에 출연하다니. 마블의 선택은 주효했고 <아이언맨>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캡틴 아메리카 적색 공포 1,2 / 버키 [출처: 마블]
<아이언맨> 제작에 들어가면서 마블의 영상화 전략은 궤도에 올라갔고, 만화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컨셉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 에드 브루베이커, 마크 밀러 등등 새로운 작가들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에드 브루베이커가 쓰고 스티브 엡팅, 마이클 라크 등이 그린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와 <캡틴 아메리카 적색 공포>는 캡틴 아메리카의 사이드킥이었던 버키를 ‘윈터 솔져’로 부활시킨다. 에드 브루베이커는 좋아했던 버키가 어느 순간 죽은 것으로 처리된 것에 늘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캡틴 아메리카의 스토리를 맡았을 때 버키를 부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버키가 의문의 암살자인 윈터 솔져로 변신하고 어떻게 캡틴 아메리카와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지 만화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워런 엘리스와 아디 그라노프가 쓰고 그린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는 아이언맨이 주인공인 다른 만화를 보지 않았어도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 ‘강철의 슈트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자유를 얻은 사람을 꿈꾸는’ 토니 스타크는 아이언 맨이 단지 기계인간이 아니라 미래의 ‘초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
어벤져스 디스어셈블드, 하우스 오브 엠
이처럼 2천 년대 초반은 캐릭터들을 근원부터 다시 시작하고 세우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크로스오버를 다시 시작할 때가 되었다. 마블은 DC의 성공적인 크로스오버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와 <인피닛 크라이시스>에 주목하여 더욱 거대하고 복잡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 시발점은 <어벤져스 디스어셈블드>와 <하우스 오브 엠>이다.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가 쓰고 데이비드 핀치가 그린 <어벤져스 디스어셈블드>는 1963년 로키와 싸우기 위해 처음으로 결성된 이래 주요 멤버들이 바뀌고 숱한 위기를 맞으면서도 지속되었던 어벤져스가 마침내 해체되는 이야기다. 죽었다고 확인되었던 잭 하트가 어벤져스 본부를 파괴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사건이 동시에 벌어진다.
비전이 울트론 로봇을 이끌고 어벤져스를 공격하고, 난데없이 크리 제국의 함대가 나타난다. <어벤져스 디스어셈블드>에 이어지는 <하우스 오브 엠>은 모든 사건의 근원이었던 스칼렛 위치의 능력이 세상을 바꿔버리는 이야기다. 모든 슈퍼히어로들의 소원이 이루어진 세상. 뮤턴트는 사라지고 누구나 행복한 일상을 꾸리는 ‘새로운’ 세계. 하지만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 울버린은 모든 것을 되돌리려 한다. <하우스 오브 엠>은 마블 유니버스가 과거와 미래로만 확장되는 게 아니라 무한대의 상상력을 통해 전혀 낯선 시공간으로도 전개되는 새로운 스핀 오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마블의 유니버스는 더욱 더 광대한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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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앙ㅋ
2014.07.08
. ‘강철의 슈트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자유를 얻은 사람을 꿈꾸는’ 토니 스타크는 아이언 맨이 단지 기계인간이 아니라 미래의 ‘초인’ 인류의 구원자가 되나요??
metalmaniac
2014.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