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받아든 성적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1무 2패 이후 16년 만의 최악의 성적이라고 한다. 이미 예견된 결과였지만 축구 팬들의 실망은 이만저만 아니다.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드러난 경기 결과는 당연히 축구 대표팀 감독인 홍명보에게로 쏟아지고 있다. 원칙 없는 팀 운용과 특정 선수만 감싸고 도는 ‘의리 축구’ 등 홍 감독의 팀 운영과 전술은 초라한 성적보다 더욱 팬들을 실망시켰다. 귀국한 대표팀에서 엿을 투척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말이다.
생활에 찌들어(?) 이제 스포츠 관람을 멀리 하는 나지만, 한때 축구를 사랑했던 팬으로서 홍 감독에 대한 이런 논란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지금이야 홍명보라는 이름은 악의 축에 가깝지만, 2002년 월드컵 당시만 해도 믿음직스러운 대표팀의 주장, 국민 영웅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2002년 월드컵을 경험했던 우리였기에 그 실망이 더 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2002년 월드컵이 양산해낸 얼치기 축구 팬이었다. 정작 월드컵 기간에는 ‘축구를 보지 않을 권리, 열광하지 않을 권리’를 달라고 주장했으며, 포르투갈전 당시 극장에서 ‘소림 축구’를 관람하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스페인전과의 승부차기에서 키커로 나서 마지막 골을 성공시킨 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가던 홍명보의 모습이 TV에서 무한 반복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덧 팬이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 저 분은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긴 우리 홍명보 주장님이시구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고 했던가. 당시 홍명보의 소속 팀은 포항 스틸러스였는데, 200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미국 프로 리그팀인 L.A. 갤럭시로의 러브콜을 받고 이적이 결정되어 있던 터라 팬의 마음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올해가 지나면 홍명보는 L.A.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럼 주장님(=홍명보) 한 번 보러 갈까?’로 시작했던 K리그 올스타전 관람에 이어 부천, 수원 원정 경기까지 섭렵하니 이제 전국 팔도를 누비는 것 따위는 가뿐한 일이 되어 버렸다. 포항행 고속 버스에 몸을 싣는 것도 몇 번 반복하니 부산 원정 경기도 비행기 타고 가서 무박으로 관람하고 돌아오는 무모함까지 선보일 수 있었다. 그래 뭐 주장님의 경기를 보러가는 거라면…! 포항에 경기 보러 갔다가 선수 차를 얻어 타기도 하는 등 짧은 포항 팬 생활은 다채로웠다.
처음엔 분명히 홍명보를 보겠다는 소박한 야심(?)에서 비롯된 축구 관람이라 선수만 눈에 들어왔지만 보다 보니 선수들의 움직임이나 4-4-2나 4-2-3-1과 같은 포메이션, 팀 전술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구분하지 어렵다는 오프사이드도 제법 구별해내는 경지에 이르기도 했었다. 알면 보이나니 그 때는 전과 같지 않으리라 했던가, 얼치기로 시작했던 축구 팬 생활은 2002년 이후 약 2년 간이나 이어졌다. 주장님이 없어도 축구는 충분히 재미있었고, 경기장에서 보는 축구는 TV보다 훨씬 더 박진감 넘치고 흥미로웠다.
2014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의리 축구를 남발하며 아집으로 가득 찬 홍명보 감독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운동장을 뛰어다니다가 허리에 손을 짚고 경기장을 바라보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멋지게 공을 막아내거나 약간 옆으로 휘게 킥을 하고선 머리를 쓸어올리던 홍명보 주장이 있다. 평소 잘 웃지 않았기에 더욱 화사하게 느껴지던 스페인전 마지막 승부차기의 웃음도-.
2002년엔 주장님 미국으로 가시다니,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부르짖었지만, 2014년의 주장님은 과연 이제 어디로 가실 것인가? 대표팀 감독 유임인가 아니면 사퇴 혹은 경질일까. 그 어느 쪽이 되었던 간에, 부디 2002년의 사랑받던 주장님으로 다시 거듭나시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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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도서1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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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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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