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 운동가를,
술보다는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 1994 -
그해 여름 끝자락의 무더위는 아스팔트도 녹일 듯 뜨거웠다. 청춘들의 심장도 뜨거웠다. 세기말이 다가오고 있어서였을까? 막걸리 잔 부딪치며 ‘나는’으로 시작되는 대화의 끝과 시작 속에 시대의 아픔이 잔류하고 있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파격적인 새로운 가치와 문화의 태동이 있었으며, 우리의 청춘은 끝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타임슬립을 한 듯, 우리는 세기를 뛰어넘어 21세기 2014년 어느 날을 살고 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외모가 변한 것으로 우리의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소소한 관심사부터 세상을 보는 시각과 인생의 가치관 정도의 변화라면 납득할 수준일까? 많은 유부남들이 공감할 만한 기혼자라는 정체성? 이런저런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체감하기에 육체적 변화(라고 쓰고 ‘노화’라고 읽는다)만큼 드라마틱한 것이 있을까 싶다. 외적으로 세월을 맞은 흔적도 있겠지만, 인체의 말단인 팔다리의 관절에 해당하는 근골격계, 적은 양의 신체활동에도 쉬이 지쳐버리는 신경계 그리고 한번씩 탈이 날 때마다 덜컥 겁이 나는 소화계, 심혈관계, 내분비계 등등. 현상 하나하나 감각 하나하나는 대신할 수 없는 느낌으로 세월을 느끼게 해준다.
때로는 작은 결심, 작은 계기 하나가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북경의 나비가 날개를 파닥이면 태평양에 파도가 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저 세월이 만든 변화이겠거니 받아들이지만, 작은 결심과 계기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까지도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을 힘이 있다. 그것으로부터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일 가능성이 크다.
생물학적으로 우리의 체세포도 시간이 지나면 의식과 기억을 제외하고 모두 바뀐다. 우리는 1년 전, 2년 전의 우리와는 생물학적으로 다른 존재들인 것이다. 그 변화는 인생이라는 잔치의 끝을 향해 있다. 우리가 도달할 곳은 그렇게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스스로 바라는 모습으로 존재하고픈 열망과 의지뿐이다. 그것으로 ‘그럴 수 있다’와 ‘없다’로 답은 극단적으로 갈린다.
시작이라는 선택은 언제나 망설여진다. 결과의 두려움보다는 과정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과 의심이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늦은 건 아닐까?’, ‘힘들진 않을까?’라는 자신을 향한 의문도 있을 것이고, ‘남들이 어떻게 볼까?’라는 타인의 시선을 향한 의문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술잔을 치우고 그릇을 정리하는 잔치의 끝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다. 시작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존재하는 스스로를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 또래의 의뢰인들은 어느 정도 운동하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지 묻곤 한다. 3개월, 6개월처럼 명확한 숫자로 답을 듣고 안도하길 원하지만, 필자의 답은 한결같다. 어디까지 가고 싶은가에 따라 답은 다르다. 필자는 종교인도 아니고 철학자도 아니다. 번뇌나 고뇌를 형이상학적인 관념에 대한 현답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다만, 육체의 변화로 건강한 의식까지 얻기를 바라는 것이 부동의 명제다. 그 육체의 변화가 어디까지인가에 따라 답은 달라질 수 있다.
해서 권유하건데, 변화에 대한 욕망은 소박하지 않아도 된다. 살 좀 빼고 컨디션 챙기는 정도라고 해도 그리 만만치는 않다. 좀더 많은 것을 욕망한다고 해도 그 중간 어딘가에서 주저하고, 멈춰서고, 맴돌게 된다. 그것은 순수하게 자신의 의지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론 환경에 의해 그럴 때가 많다.
욕망하는 바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정에 의미가 있다는 약해빠진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전력을 기울여도 순간의 단절과 체념으로 또 긴 시간을 허비한 끝에 다시 운동을 결심하는 출발선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의 과정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연마과정이 힘들수록 단단해지는 공산품과는 다르다. 의식과 의지를 가진 존재이기에 한 번, 두 번 맥이 빠질 때마다 우리의 의지도 약해진다.
좀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살아온 세월의 무게 정도 되시겠다. 세상만사 특별할 것 없다는 선험적인 경험 안에 있는 ‘해도 안 되는 것’과 ‘해보니 되는 것’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말해줄 것이다. 본능에의 욕망이 관념이나 윤리와 충돌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과, 운동을 통한 강한 신체와 의지에의 욕망으로 ‘해보니 되는 것’ 아니, ‘해야 되는 것’으로 말이다. 적어도 해도 되는 욕망 앞에 망설일 필요는 전혀 없다.
1994년 필자는 철없던 열아홉 대학 새내기였다. 그때 있었던 에피소드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때 필자, 문학소년이었다. 특히 시를 참 좋아했는데, 1994년도 시문학계를 그야말로 평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집이 바로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였다. 우연히 종로에 있던 대형서점에 들렀다가 최영미 시인의 저자 사인회에서 시집에 사인도 받았더랬다. 돌이켜보면 어린 소년의 치기였겠지만, 사인을 해주는 시인에게 간신히 용기를 내어 “나도 책을 쓰고 싶은데, 나중에 내 이름으로 된 책을 갖게 되면 꼭 사인해서 드리겠다”고 말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게 벌써 이십 년 전 일이라니! 어제 일처럼 손에 잡힐 듯하지만, 그때의 치기 어린 소년은 문학작품은 아니지만 몇 권의 책을 쓴 저자가 되었고, 마흔의 중년이 되었다. 치기 어린 소년 같은 중년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중년에 대한 책을 썼고, 나와 같은 친구들이 많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살아오며 도달한 마흔이라는 나이가 어색하긴 하지만, 사십 대의 나이도 이십 대와 삼십 대처럼 내게 영원히 머물러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함께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당시 삼십 대이셨던 시인에게 열아홉 치기 어린 소년의 마음으로 졸필을 선물해 드리고 싶다. 아직도 철없는 마음에 친구들 선동해 운동하면서 놀자는 글, 쓰고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본 칼럼을 쓰면서 필자가 들었던 앨범 리스트
Coldplay-
Radiohead -
Nirvan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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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민
운동칼럼니스트와 기능성 운동 전문 트레이너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 국가대표 선수가 선수 출신 지도자가 아닌 저자에게 코칭을 받는 걸 보면 그의 운동 내공을 짐작할 수 있다. 2012년부터 블로그나 각종 매체에 건강과 운동에 관련된 칼럼을 기고했고, 그 인연으로 몇 권의 책을 냈다. 여전히 호기심 많은 40대로, 최근에는 오리엔탈 피트니스의 세계에 눈을 떠가고 있는 중이다. 지은 책으로 《불량헬스》《강한 것이 아름답다(공저)》가 있다.
앙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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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티샨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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