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소설은 보통 스파이가 등장하는 소설을 말한다. 정보기관이 등장하면서 일반인이 연루되는 경우도 있다. 스파이라면, 가장 유명한 캐릭터인 제임스 본드가 전형 같지만 현실의 스파이는 많이 다르다. 제임스 본드 영화에는 관객이 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스릴, 서스펜스, 총격전, 자동차 추격전, 위험한 사랑, 팜므 파탈 등등 현대 사회의 모든 위험과 불안 그리고 로망이 일상으로 존재한다. 현실의 스파이는 영화 <시리아나>와 <굿 셰퍼드>의 우울한 그들처럼 암울하고 삭막하다. 첩보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냉혹하고 잔인하고 야비하다.
첩보 소설은 추리 소설의 한 분야로서 출발했다. E. 필립스 오펜하임 등의 통속적인 소설들에 이어 존 버컨의 『39계단』, 한때 정보요원으로 일하기도 한 서머셋 모옴의 『어센덴』, 그레이엄 그린의 『밀사』와 『제 3의 사나이』, 에릭 앰블러의 『어느 스파이의 묘비명』 등이 등장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했다. 첩보소설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냉혹한 첩보전의 세계에서 파괴되거나 몰락하는 인간성, 또 하나는 냉혹하고 복잡한 국제 정세를 예리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전후에 출간된 이언 플레밍 원작의,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닥터 노>,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 <나를 사랑한 스파이> 등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언 플레밍의 007 시리즈는 기본적으로는 고전적인 영웅의 모험액션물이었다. 2차 대전 이후 급속하게 냉전으로 돌입했던 시대적 환경은 새로운 영웅을 원했다. 직접적인 전쟁터가 아니라 은밀한 곳에서 악당들을 물리치는 영웅. 이언 플레밍은 첩보 분석관의 경험을 통해 스파이 업무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저널리스트로서 세계정세와 흐름은 물론 개인의 내면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기자로서의 명료한 문체도 도움이 되었다. 다만 영화의 제임스 본드를 생각하고 소설을 읽는다면 지루하고 낯설 수 있다.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는 영화보다 섬세하고, 신실하고, 차갑다. 전통적인 스파이 캐릭터에 가깝다. 영화 같은 제임스 본드를 만나고 싶다면 후배 작가들이 쓴, 제프리 디버의 『카르트 블랑슈』 등을 보는 것이 좋다.
진짜 냉엄한 스파이의 세계를 보고 싶다면 존 르 카레를 읽어야 한다.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가 베스트셀러가 된 후, ‘스파이’ 존 르 카레는 전업 작가가 되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스마일리의 사람들』, 『리틀 드러머 걸』 등의 걸작을 줄줄이 발표한다. 존 르 카레의 소설에 나오는 스파이는 제임스 본드와는 조금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세계를 떠돌면서 정보를 캐오는 것은 동일하지만 방식이 다르다. 암살이나 체포도 있지만 그것은 스파이 중에서도 극소수가 하는 일이다. 보통은 엄청난 양의 서류를 뒤지거나 기약 없는 감시와 미행 등으로 소일한다. 게다가 1970년대에 이르르면 냉전이 고착화되면서 동과 서 모두 내부적으로 썩어 들어가고 있다. 존 르 카레의 말에 따르면 ‘두 경제 강국의 강박관념은 자체의 정체성과 의도, 세력과 약점을 드러내면서, 1970년대에는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상호 감시와 과대망상에 빠진 상황’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서 내부의 이중 스파이를 잡아내는 임무를 맡았던 스마일리는 『스마일리의 사람들』에서 숙적인 KGB의 카를라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조지 스마일리는 스파이로 일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아내도, 가족도, 친구도, 자신의 정의와 인간성도. 『스마일리의 사람들』은 냉전이라는 시대, 첩보전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고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희극’을 만들어냈는가를 보여준다. 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싸우는 것인가. 체제를 위하여, 라는 대의명분은 그 무엇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위안조차 주지 못한다. 거대한 환상일 뿐이다.
존 르 카레에 비하면 『자칼의 날』의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소설은 엄청나게 스펙터클하다. 드골 암살을 기도한 재칼이라는 테러리스트의 행적을 그린 『자칼의 날』에 이어 나치 잔당들을 쫓는 『오데사 파일』, 무기 암거래상과 용병의 세계를 그린 『전쟁의 개들』, 세르비아 전범에게 복수하는 『어벤저』, 글로벌 마약소탕 작전 『코브라』 등을 발표하며 명성을 드높인다. 공군 조종사를 거쳐 BBC 기자가 되었고 소설가가 되어 직접 무기 암거래상을 취재하다가 죽을 뻔하기도 한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삶처럼 소설 역시 흥미진진하다.
존 르 카레와 프레데릭 포사이드는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탁월한 첩보소설들을 발표했다. 영화로도 나온 존 르 카레의 『모스트 원티드 맨』은 냉전의 유산이 여전히 사람들을 옭아매고 파멸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레데릭 포사이드의 『아프간』은 우연히 파악된 알 카에다의 비밀작전을 파헤치기 위해 조직에 침투하는 특수부대원의 이야기다. 동과 서의 양대 진영이 확고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는 차라리 좋았다. 이중첩자 때로는 삼중첩자까지 있다 해도, 그 시절에는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 어느 정도는 가능했으니까. 지금은 첩보전이 모든 나라를 대상으로 하고, 갖가지 비정규 조직을 동원하여 기괴한 공작을 피고 있다. 누가 적이고, 동지인지 더욱 혼란스러운 시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정보기관의 임무는 적을 완벽하게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보기관이 계속 번창할 수 있는 불안한 세계의 유지가 된다. 21세기의 첩보소설은, 세계가 변한만큼 변했다.
‘하이테크 스릴러’는 톰 클랜시의 소설을 설명할 때 주로 쓰던 말이었다. CIA 전력분석관 잭 라이언이 등장한 <붉은 10월>, <패트리어트 게임>, <긴급 명령>, <썸 오브 올 피어스>의 원작을 쓴 톰 클랜시는 첨단 무기와 시스템을 이용한 현대전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다. 『스마일리의 사람들』의 존 르 카레와 『아프간』의 프레데릭 포사이드가 현대 첩보전의 핵심을 꿰뚫어 보면서 비정함과 추잡함을 그려냈다면, 톰 클랜시의 하이테크 스릴러는 냉전이후 변화한 미국 중심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스펙터클한 첩보전을 그려냈다. 잭 라이언이 대통령이 된 건, CIA 국장이었던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이 된 것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21세기 들어 톰 클랜시가 소설보다는 게임 등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리면서, ‘하이테크 스릴러’의 거장 자리를 이은 작가는 ‘미치 랩’ 시리즈의 빈스 플린이다. 자비로 2003년 출간한 『임기종료』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힘차게 출발한 빈스 플린은 CIA요원 미치 랩을 주인공으로 한 『권력의 이동』 『제 3의 선택』 『권력의 분립』 등을 발표하면서 최고의 스필러 작가로 부상한다. ‘미치 랩’ 시리즈는 잭 바우어를 주인공으로 한 미국 드라마 <24> 시리즈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24>는 하루 동안에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따라가는 스릴러인데, 미치 랩 시리즈의 첫 작품 『권력의 이동』 역시 백악관에 테러리스트들이 진입하여 벌어지는 긴박한 상황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냈다. 미국정보기관과 군부의 시스템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첨단 무기와 전략에도 해박한 빈스 플린은 미국인이 좋아하는 스릴러 작가였지만 요절하면서 후속작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미치 랩을 대신할 새로운 액션 스릴러를 꼽는다면 넬슨 드밀의 『플럼 아일랜드』 『나이트 폴』 등 대테러 요원인 존 코리가 주인공인 시리즈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도 첩보전은 대단히 흥미로운 소재다. 하지만 영화의 <쉬리> <간첩 리철진> 등 다양하게 다루어진 것에 비하면 소설에서는 김진명이 조금씩 건드리기는 했지만 뛰어난 작품이 없었다. 이제는 첩보전이 단순히 국가 간의 경쟁이 아니라 기업을 둘러싼 암투와 각양각색의 테러조직을 대상으로 하는 전방위적인 정보 수집으로 변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첩보소설은 여전히 미개척지이지만 건드릴 구석이 너무나도 많은 영역이다. 첩보전은 선과 악의 아마겟돈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한 야비하고 폭력적인 투기장이고, 그렇기에 궁금하고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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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앙ㅋ
2015.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