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노 게이치로, 일부일처제가 자연스러운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날 『나란 무엇인가』와 『던』의 출간기념으로 열린 한국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내세운 분인주의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건넸다.
글ㆍ사진 김이준수
201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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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는 1929년 이른바 ‘계약결혼’을 했다. 그 계약의 요지는 이랬다.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각자 다른 사람과 사랑할 권리를 인정한다! 당시 그것은 엄청난 파격이었고 충격이었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제쳐둔 채 오직 둘이서만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두 사람은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권태로 인해 죽는다”며 전통적인 결혼생활의 권태를 언급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고개를 갸웃해도 실은 ‘일부일처제(모노가미)’는 인류의 25%만이 법으로 정한 사회적 제도일 뿐이다. 절대적 당위나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덧붙이자면,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이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숱한 위기의 순간을 거쳤다. 그럼에도 그들의 계약(약속)은 1980년 사르트르가 먼저 죽기 전까지 이어졌다. 한 명이 죽기 전에는 헤어지지 않는다는 약속은 지켜졌다. 일본의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지난 3월 19일,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이런 ‘폴리아모리’(Polyamory?많음을 뜻하는 그리스어 ‘폴리’(poly)와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아모르’(amor)의 합성어, 파트너와의 합의가 전제된 다자간 사랑)에 대해 언급했다. ‘분인주의’라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 형성되는 ‘복수로서의 나’라는 개념을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주장하면서 내 안의 분인들이 각기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꺼낸 것.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날 『나란 무엇인가』와 『던』의 출간기념으로 열린 한국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내세운 분인주의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건넸다. 사회는 허희 문학평론가가 맡았다.   

 

한국 독자와의 만남이 이전에도 있었는데, 느낌이 어떠했나?

 

내 책이 외국에 처음 출판된 곳이 한국이었다. 한국에 처음 내 책이 출판됐을 때가 데뷔를 했던 시절이었는데, 일본에 독자들이 있다는 것 그 자체도 감동적이었는데 외국에도 독자가 있다는 것에 감동을 받았다. 내 책이 계속 출판되는 나라가 또 한국인데, 오늘도 많은 독자들이 와서 감격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 작가의 『나란 무엇인가』『던』 두 권이 나왔다. 『나란 무엇인가』가 몇 달 전 먼저 출간되고, 『던』이 최근 출간됐다. 일본에서는 이게 반대였다. 『던』에서 나타난 분인이라는 개념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나란 무엇인가』를 냈었다.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복수의 나라는 분인을 주창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받았다. 분인이 페르소나나 자아라는 개념과 다르지 않다는 대립적인 반응이 있었다. 분인에 대해 말해준다면?

 

대개 작품을 쓸 때 콘셉트를 만들어서 쓴다. 그러나 분인은 콘셉트화해서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던』 쓰면서 분인이라는 개념을 넣었고 그것을 집대성한 것이 『나란 무엇인가』이다. 왜냐하면 ‘나란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때 이를 추상적으로 생각하면 어렵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B, C와 만날 때 어떻게 다른지 생각한다는 것은 어렵다. 대신 소설처럼 주인공을 만들면 쉽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소설은 사람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장르인 것 같다.

 

 우리는 여러 사람과 만나는데, 애인과 함께 있을 때와 상사와 있을 때의 내가 다르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안다. 반면 진정한 나는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사회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여러 개의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상대에 맞춰서 연기를 한다며 진정한 나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일본에서도 이런 것을 ‘이중인격자’라고 표현하면서 앞뒤가 다르다고 부정적으로 말해왔다. 사회가 사람의 여러 개성을 인정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의 개성만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비난을 받는 사회가 되고 있다. 내가 여러분께 말한 분인주의라는 것은 진정한 내가 중심에 있고 얼굴을 여러 개 가지면서 분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 아니다. 여러 얼굴이 진정한 나이며 네트워크처럼 뻗어나가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내가 주창하는 분인주의다. 중심에 내가 있고 여러 개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이 다. 페르소나는 진짜 내가 있고 인격이 분리돼 있다는 개념이라서 분인주의와는 다르다. 

 

“분인이란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다양한 자기를 의미한다. 애인과의 분인, 부모와의 분인, 직장에서의 분인, 취미 동아리의 분인… 그것들이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분인은 상대와의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자기의 내부에 형성되어가는 패턴으로서의 인격이다.”(14쪽)

 

분인주의를 말하면서 일본 내에서 어떤 피드백이 가장 기억에 남나?

 

이 문제를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살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자살은 큰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본에서도 젊은이들의 자살이 큰 사회문제다. 나는 자살을 생각한 적이 없지만 스스로를 책망하거나 좌절한 적이 있어서 자살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는 간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려운 문제는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사랑하라고 얘기해도 웬만한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면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사랑해라고 말하긴 어렵다.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렇다고 즉답을 하기는 어렵다. 내가 가진 모습 중에 내가 싫어하는 모습도 있기 때문이다. 내 모두를 사랑하라고 말해도 그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누구와 함께 있을 때 스스로의 모습을 사랑하는지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다. 장소나 상대방에 따라 괜찮은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긍정해보면 어떨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뿐 아니라 그런 사람과 함께 있는 내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타자를 경유하면서 그 누군가 덕분에 나를 좋아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나르시시즘과는 다르다. 그리고 본인이 어떤 모습이 싫다고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 모습 전부를 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다. 왕따를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을 보면 왕따를 당한 내 모습이 싫지만 가족과 함께 있거나 다른 친구와 어울렸을 때 내 모습이 좋았음을 생각한다면, 누구와 있었는지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일부를 싫어함에도 내 전체를 부정하기보다 내가 좋아하고 즐겁게 생각하는 분인을 발판으로 삼아서 살아보면 어떨까. 『던』을 쓴 이후 분인과 자살을 많이 생각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생각했다가 『나란 무엇인가』를 읽고 분인에 대해 알고는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는 사람의 감상평을 받기도 했다. 내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감상평이 내겐 굉장히 인상에 남는다. 일본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살 대책을 마련하기도 한다. 대책본부를 마련하고 대학병원 정신과 의사 등과 자살방지 대책 활동을 하는 곳들이 있다. 나도 강연 요청을 받고 강연을 하고 있으며, 정신과 의사들 중에서도 내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소설을 쓰는 일 외에도 지금을 살아가기 어려운 젊은이들을 위해 강연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어떤 분인이 있고, 어떤 분인으로 살아가는 시간을 길게 혹은 짧게 만들고 싶은지 상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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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이라는 문제에서 출발한 분인이라는 개념에 대한 반론도 있다고 보는데, 신영철 평론가도 분인에 대해 토론해보자고 얘기했었다. 한국에도 출간된 『자살의 전설』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인 데이비드 밴은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10여년을 고민하면서 자전적인 책을 썼다. 여러 분인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인을 이끌어내 그것을 주축으로 삶을 꾸리는 방법도 있지만, 『자살의 전설』을 보면 아버지는 자신의 가장 긍정적인 분인을 긍정 못하면서 그런 결과를 낳았다. 과연 의지와 선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자살은 그 바탕에 여러 문제가 얽히고설킨 것이 있어서 일반화하기가 어렵다. 내 주변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들이 있어서 이런 것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봤다. 일본에서는 자살은 주체적인 결단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죽자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생명을 경시하는 것 아니냐,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아보는 것이 낫지 않느냐고 얘기한다. 그런데 나는 정말 그럴까, 라는 생각을 한다. 소설을 쓰면서 정신과 의사들도 취재했는데, 자살을 시도했다가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죽지 않고 진료를 받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 다시 말해 죽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너무 싫어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부분때문에 자살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시 말해 내가 싫어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나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자살을 하겠다고 결심한 사람도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쉬고 싶거나 너무 싫은 내 모습을 지우고 괜찮은 내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는데, 잘못된 행동이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한 사람 안에 의식이 갈등하는 경우가 많다. 부정적인 나, 긍정적인 나가 대립하고 있는데, 어떤 계기를 통해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분인을 구체화해서 생각하고 내 자신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던』은 대중에게 SF장편소설로 소개되고 있다. 20여년 후의 미래를 다뤘는데, 이런 가까운 미래를 소재로 택한 이유가 있었다면?

 

나는 데뷔한 이래 한동안은 과거를 무대로 한 작품을 썼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알 수가 없어서 어떤 과거의 역사를 거쳐서 지금 이러한 시대가 됐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과거에 대해 썼는데, 거기에는 하나의 딜레마가 있었다. 과거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필연적인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어서 이런 현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한 개인이 어린 날 학대를 받은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 어떤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면 그 인과관계에만 갇힌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서는 현재 무엇을 할까 생각하면서 미래를 무대로 한 소설을 쓰게 됐다.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미래 각각을 떠올려보고 지금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것도 좋겠다.

 

『던』에서는 CCTV를 통해 한 사람이 어디를 거쳐 왔는지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나온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소성형’이 있다. 상황이나 기분에 맞춰 여러 얼굴을 드러내는 것인데, 『던』에서는 또 어떤 실험을 했나?

 

정체성은 내 문학의 오래된 테마다. 『결괴』라는 소설의 테마는 병적이고 연속적인 살인사건이었다. 『던』을 쓰기 위해 경찰을 오래 취재했었다. 취재하면서 놀란 것이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천재 형사가 나타나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CCTV나 휴대전화 착발신 기록을 보면서 수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런던은 시민과 합의하여 CCTV를 여러 군데 설치했다. 그런데 일본은 편의점이나 자기 집 앞에 개인들이 CCTV를 단다. 경찰은 나중에 범죄가 발생하면 동의를 구해 CCTV를 본다. 즉 CCTV가 시민과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설치됐다. 일본 경찰은 단돈 1원도 쓰지 않고 전국에 CCTV를 설치한 셈이다.

 

하나의 권력이 개인 정보를 쥐는, 『1984』와 같은 경우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시대의 재미는 국가권력이 모든 정보를 쥐었을 때 그것에 대해 시민 모두가 알려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국가권력이 정보를 독점하려고 할 때 모두가 공유하자고 주장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그래서 『던』에는 CCTV를 통한 얻은 정보를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나온다. CCTV에서 벗어나기 위해 특수한 물질을 집어넣어서 자신의 특정 부위를 바꾸는 것을 소설에 넣었다. 분인에 대해 말해도 얼굴은 하나뿐이지 않나. 사람이 속에는 많은 분인을 가지고 있어도 얼굴이 하나로 통합해버리는 거지. 분인이 많은 것처럼 얼굴도 늘여간다면 완벽하게 분인화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다. 사람은 분인화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모두 통합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시소처럼 갈등하고 대치되고 있지 않을까. 인간은 통합과 분인화라는 두 가지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 같다. 

 

『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주인공이 저지르는 불륜이라고 할까, 분인이 아닌 한 인간 전체끼리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분인이라면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웃음) 어떻게 생각하나?

 

분인주의에 공감하는 분들도 연애 문제에 대해선 어떠냐고 흥미를 가진다. 통념상으로 일대일 존재 자체로서 사랑하지, 동시다발적으로 여럿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인류가 시작된 이래 이른바 불륜이라는 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고려해서 모든 것은 개개인의 가치에 맡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일대일의 가치관을 가질 수도 있고, 분인마다 다른 애인을 갖고 합의하에 그렇게 사랑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이런 일이 얼토당토하지 않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상호 계약을 통해 이런 사랑을 했던 프랑스 작가들도 있었다. 철학자 사르트르와 보브아르가 계약을 맺고 이런 사랑을 했다. 이들은 서로 존중하면서 서로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이런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 느슨하게 복수의 연애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내가 자주 하는 이야기를 하겠다. 내 주변에는 예쁘고 성격 좋고 일도 잘 하나 결혼하지 않은 분이 있다.

 

왜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느냐고 물었다. 연애를 3~4년하고 헤어지고 1년 있다 다시 비슷한 패턴으로 연애를 하다 보니 결혼적령기라고 할 시기에 3명 정도밖에 못 만났고,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고르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답하더라. 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성 친구들을 보면, 어느 시기에 동시 진행으로 몇 명의 남자들을 만나면서 그 중 하나와 결혼하고, 결혼하기 전까지는 동시에 여러 사람과 연애를 진행한 것 같더라. 인간의 연애관이 평생 같을 수만은 없다고 본다. 연령에 따라 연애관이 변할 수도 있다. 그리 생각하다보면 인생에 어떤 시기엔 여러 사람과 동시에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인간이라는 동물은 질투심이 강하다. 분인 마다의 동시다발적 연애를 머리로는 인정할 수 있겠지만 그걸 감정이나 마음으로 이해하는 일은 다르다. 사실 나도 이리 말하지만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분인으로서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화가 날 것 같다(웃음).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듣고 싶다.

 

지금 마이니치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는데, 연애가 주제다. 분인주의가 아닌 일대일로 순수한 사랑을 하는 소설이다. 번역이 돼서 한국에서도 출간되면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웃음). 많은 독자들이 와주셔서 고맙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도 모순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임을 알아주면 좋겠다. 그래도 내 진심은 소설 속에 있다고 생각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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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Dawn히라노 게이치로 저/이영미 역 | 문학동네
데뷔 이후 현대인의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꾸준히 천착해온 작가가 이번에는 ‘개인(個人)’이라는 개념이 점점 모호해지고 ‘분인(分人)’으로 나뉘어가는 근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 본연의 가치, 상실과 희망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제19회 드마고 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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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준수

커피로 세상을 사유하는,
당신 하나만을 위한 커피를 내리는 남자.

마을 공동체 꽃을 피우기 위한 이야기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