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가 열렸던 지난 4월 23일, 마침 이날은 대문호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가 사망한 날에서 유래된 ‘세계 책의 날’이기도 했다. 강연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중심으로, 밀란 쿤데라의 삶과 그의 소설에 나타난 작품세계를 다루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이현우는 먼저 이달의 주인공인 작가 밀란 쿤데라에 대한 소개로 문을 열었다.
“먼저 작가 소개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작가의 삶과 작품을 연관 지어서 읽고, 이해하는 것을 꺼려하는 작가가 바로 밀란 쿤데라입니다. 예전에는 인터뷰도 자주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들을 상당히 기피하고, 대외적으로 자신을 거의 노출하지 않는 작가입니다. 쿤데라가 29년생인데, 몇몇 작품들은 나중에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를 대비해서 사전예방조치 차원에서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후에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대비책을 마련한 것이죠. 쿤데라는 싫어하는 일이지만 그가 죽으면 개인적 사생활이나 삶의 이력이 들춰질 것이고,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쿤데라의 작품들이 새로운 방식과 해석으로 다시 읽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쿤데라는 사실 처음에 시인으로 출발했고 세 권의 시집을 낸 이력이 있다. 하지만 쿤데라 자신은 그 사실 자체를 굉장히 싫어하고 드러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이현우는 말했다.
“쿤데라는 시인으로서의 경력뿐만 아니라 20대 초반의 경력도 세탁하고 싶어해요. 개인적으로 그의 처녀작인 『농담』도 경력 세탁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쿤데라는 『삶은 다른 곳에』 같은 작품에서 시인을 등장시키는데, 아무래도 20대 초반은 괜히 우쭐한 상태에서 자신과 세상을 대등하게 놓으려고 하는 것이 가능한 나이잖아요. 쿤데라도 그런 시기를 겪기는 했지만 그 시절을 미성숙한 경험이라든가 행동으로 치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작품 『삶은 다른 곳에』는 시인에 대한 자서전 형태이지만 자신의 미숙한 시절에 대한 반성까지 포함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쿤데라는 1968년 프라하에서 있었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진압되고,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경험을 겪고 그 후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어 1981년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다.
“작가가 국적을 바꾸는 경우가 드문 일은 아니지만, 쿤데라는 언어까지 바꾸게 되어서 『불멸』까지만 체코어로 썼고 『느림』, 『정체성』, 『향수』 등 그 이후 작품들은 불어로 썼습니다. 그런데 언어를 바꾼 이후의 작품들은 분량이 좀 짧습니다. 기존의 작품들과는 스타일과 구성에 변화가 있는데 저는 쿤데라가 다른 작가로 탄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밀란 쿤데라에게 소설이란?
이현우는 쿤데라가 소설에 대해 어떤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소개하면서 그와 관련된 쿤데라의 에세이 몇 가지를 언급했다.
“쿤데라의 에세이는 『소설의 기술』부터 『배신당한 유언들』, 『커튼』, 『만남』까지 국내에 총 4권이 나와있습니다. 『소설의 기술』 안에 첫 번째로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라는 에세이가 있는데 여기에 쿤데라가 소설가로서 소설 장르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고대문학은 운문부터 시작됐고 그것을 배경으로 산문문학이 진화하게 됩니다. 산문문학의 한 갈래로서 소설은, 엄밀히 정의하자면 세르반테스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르반테스가 근대소설의 효시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가 중세의 ‘로망스’ 시대를 끝냈기 때문입니다. 쿤데라 자신이 세르반테스와 함께 소설의 아버지라며 높게 평가하는 또 한 명의 작가는 프랑스 중세 말의 작가 라블레입니다. 라블레가 문학에서 보여주는 소설적 인간관이 있는데, 그는 형이하학적인 인간의 예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먹고 싸는 존재라는 것이 라블레가 내리는 인간의 정의인데, 쿤데라는 이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쿤데라 문학의 중심 키워드 중 하나로 저속한 예술이나 그러한 취향을 일컫는 말인 ‘키치’를 들 수 있다. 쿤데라는 그 의미를 상당히 확장시켜, 키치는 그의 소설 미학의 키워드로까지 나아간다.
“쿤데라 식의 유머는 고상한 의미의 기저에 있는 저급한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 이 두 가지를 다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배제하는 일을 쿤데라는 혐오합니다. 키치란 인간 존재의 본질에서 똥을 저속하다고 여기고 배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쿤데라는 그러한 허위 의식이 어떻게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귀결되는가를 즐겨 다룹니다. 이러한 것이 철학적 이해와 다른, 인간에 대한 소설적 이해입니다. 철학에서 먹고 싸는 인간은 빠져있습니다. 소설이 철학보다 똑똑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이것들을 포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우거나 은폐하지 않고 다 다루는 것이 소설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 쿤데라는 체코라는 국적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보헤미안이라고 불러왔다. 그는 소설만이 자신의 유일한 집착 대상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자신은 소설가 이외에 다른 어떤 소속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쿤데라는 자신의 에세이를 통해 소설적 ‘인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은 독자에게 어떤 앎과 진리를 제공해주고,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인식은 보증된 앎입니다. 왜 재미없는 소설까지도 읽을 가치가 있는가. 보통 사람들은 소설을 무언가 알기 위해서 읽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쿤데라는 소설만이 제공할 수 있는 인식을 소설이 우리에게 던져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소설이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가장 잘 알려준다고 말했습니다. 즉 소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기 때문에, 재미 삼아 읽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참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죠.”
한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안에는, ‘영원회귀 사상’이 나타난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된다면? 그리고 그 반복 역시 무한히 반복된다면? 이현우는 쿤데라가 영원회귀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기 전에 먼저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니체가 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총 4부로 되어있는데 그 중에서도 영원회귀는 뒷부분에 나옵니다. 니체는 먼저 초인에 대해서 말하고, 중간 부분에서 영원회귀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초인은 다른 말로 주인, 즉 자신이 결정하고 지배하는 사람입니다. 영원회귀는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인데 니체를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것을 무시합니다. 말이 안 된다는 이유로 니체의 핵심사상에서 배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니체는 영원회귀에 대해 말하면서, 시간은 무한하고 이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유한하다고 생각했기 무한한 시간의 지평 속에서 이 세계가 언젠가는 반복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것을 대단한 발견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놀라워합니다. 영원회귀는 자기 의지와 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초인과 상충합니다. 주권성과 자연세계의 인과원리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죠. 니체는 주인인 내가 정해진 운명을 원하고 긍정한다고 말하면서 양립할 수 없는 둘의 충돌을 해소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의 최종 철학이 ‘운명애’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회귀를 통해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영원회귀가 허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갖는 의의는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원회귀가 왜 나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계속 반복되어야 하고 일회적인 삶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면 정말 한 순간인데, 한번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바로 영원회귀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영원회귀라는 말이 등장하자마자 우리의 삶은 왜소해지면서 우리는 그것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일회적인 삶의 무게를 재보고자 했고, 그것을 영혼과 육체,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연관시켜 말합니다.”
무거움과 가벼움,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쿤데라가 보기에 영원회귀 사상이 역으로 주장하는 바는,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이란 그림자에 불과하며 아무런 무게도 갖지 않는 무의미한 삶이라는 것이었다. 쿤레라는 독자들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거움인가, 아니면 가벼움인가. 이현우는 소설 속의 구성 방식이나 주제 배치 등을 통해 쿤데라가 암시하고 있는 일종의 답안이 있다고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토마시가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가벼움에 속합니다. 반대로 한 여자와 오래 사는 것은 무거움에 속합니다. 쿤데라는 토마시가 처해있는 상황을 통해서, 이 주제를 놓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줍니다. 독자로 하여금 학습할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이 작품에서 결국 토마시가 가벼움에 속하는지 무거움에 속하는지 구별하는 것은 약간 애매합니다. 그것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쿤데라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쿤데라는 중간적인 것을 선택하는데 이러한 선택은 작품의 구성 상에서 두 주인공을 구제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미 두 주인공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작품 앞부분에 나오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미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대신 작품의 결말은 가장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있는 토마시와 테레자를 보여주는 시점에서 끝이 납니다. 즉, 작가는 이들의 삶을 구제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죽은 것으로 소설이 끝나면 순차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이니까 조금 더 현실적이겠지만, 이 소설의 결말은 쿤데라의 트릭인 것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사실 가벼웠지만, 쿤데라는 그들이 행복했던 시점에서 소설을 마무리하면서 일시적으로 그 가벼움에서 조금 벗어나게 한다. 가벼움에 무게를 부여하는 것. 이것이 쿤데라의 선택이었다. 단지 배치만 바꿨을 뿐인데 그들의 삶은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의 진동. 오직 한 번뿐인 삶을 살 수 있다면 어느 쪽이 옳은 것인가?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한 가치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며 바로 그것이 영원회귀 사상이 던져주는 메시지라는 말을 전하면서, 밀란 쿤데라와의 유익했던 만남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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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저/이재룡 역 | 민음사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로, 다양한 지적영역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우연히 서로 만났다가 사고로 함께 죽는 테레사와 토마스. 그들의 운명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정들과 우연한 사건들과 어쩌다가 받아들이게 된 구속들의 축적이 낳은 산물에 불과하지만 죽음을 향한 그 꼬불꼬불한 길,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완만한 상호간의 파괴는 영원한 애매함을 드러내 보이려는 듯 어떤 내면의 평화를 다시 찾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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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예원
재미있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책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antineo
2015.05.14
감사합니다.
달개비
201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