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트위터처럼 시 읽기] 이성복 『남해금산』
생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아갈 때 생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나의 생을 가엾게 여기기 시작하는 나이. 우리는 이성복의 시집을 읽으며 그 나이를 미리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글ㆍ사진 허연(시인, 매일경제신문 문화부장)
2016.04.05
작게
크게

1603-이성복-남해금산.jpg

 

허연 Retweeted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이성복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흐르는 안개가 아마포처럼 몸에 잠길 때,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 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이 가엾다면 우린 거기
묶일 수밖에 없다

 

남해금산은 멀었다. 이십여 년 전쯤 서울에서 차를 몰고 무작정 경상남도 바닷가의 남해금산을 찾아갔다.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 때문이었다. 강렬하면서도 허무적인 연애시들이 나를 흔들었고, 나는 그 기억을 더듬으러 남해금산을 찾았다.

 

남해금산은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바닷가에 있어 상당히 높아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뛰어내려도 바다가 왠지 포근하게 안아줄 것 같은 착시가 느껴졌다. 깎아 지른 벼랑에 안개가 가득했고 이따금씩 이슬비가 내렸다. 한 여자가 돌 속에 갇혀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집의 표제시인 작품 「남해금산」은 짧은 시다. 전문을 보자.

 

"한 여자 돌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속에 나 혼자 잠기네"

 

영원할 것 같았던 돌 속의 사랑도 어느 날 식고 여자는 돌 속을 떠났다. 그리고 나만이 돌 속에 남아 사랑을 추억하고 있다. 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 인간의 사랑이나 신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조금씩 알아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시집에서 발견한 가장 좋은 시는 서두에 인용한 「세월의 습곡이여 기억의 단층이여」였다. 시집에 있는 다른 시들 대부분이 허무와 무위(無爲)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시는 삶의 의연함에 시선을 들이대고 있었다.

 

"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짐 실은 말 뒷다리가 사람다리보다 아름다울 때 삶은 거기에 묶일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 앞에서 나는 무릎을 쳤던 것 같다.

 

나는 이성복의 시집 『남해금산』에서 이제 막 중년 한복판에 접어든 한 예민한 남자의 고백을 읽었다. 혁명도 사랑도 흐릿해지는 어느 날 한 남자가 울고 있었다. 떠나간 여자와 남아있는 생을 부여잡고 울고 있는 한 남자. 그의 시는 무거웠고 그만큼 훌륭했다.

 

마부의 채찍을 맞는 말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내 니체. 니체와 같은 족속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짐 실은 말 뒷다리’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일. 시인이 해야 할 일이다.

 

생이 무의미하다는 걸 알아갈 때 생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나의 생을 가엾게 여기기 시작하는 나이. 우리는 이성복의 시집을 읽으며 그 나이를 미리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갔다.


 

 

img_book_bot.jpg

남해금산이성복 저 | 문학과지성사
<남해금산>에서 시인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뛰어난 시 세계를 새로이 보여준다. 서정적 시편들로써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우리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바라보면서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켜 드러낸다.



[추천 기사]

 

- [특별 기고] 시리 허스트베트, 틈새의 존재, 틈새의 욕망
- [맨 처음 독자] 『13ㆍ67』 찬호께이 작가
- [같은 책 다른 표지] 장미의 이름
- 젊은 독자에게 ‘초판본’은 신제품

- [특별 기고] 가둘 수 없는 이야기 - 『통조림 학원』을 읽고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허연 #시 #남해금산 #이성복
0의 댓글
Writer Avatar

허연(시인, 매일경제신문 문화부장)

Writer Avatar

이성복

경북 상주 출생으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여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경기고교에 입학하여 당시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원호를 통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때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수영의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71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진형준 등과 친분을 쌓았고 1976년 복학하여 황지우 등과 교내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1977년 「정든 유곽에서」 등을 『문학과 지성』에 발표, 등단했다. 대구 계명대학 강의 조교로 있으면서 무크지 『우리세대의 문학1』에 동인으로 참가했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평가하는 말로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철저히 니체적이며 철저히 보들레르적”이었던 시인은 1984년 프랑스에 다녀온 후 사상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그리고 논어와 주역에 심취했다. 그리고 낸 시집이 동양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남해금산』이다. 이 시에는 개인적, 사회적 상처의 원인을 찾아나서는 여정이 정제된 언어로 표현되었다. 시인은 보다 깊고 따뜻하며,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뛰어난 시 세계를 새로이 보여준다. 서정적 시편들로써 서사적 구조를 이루고 있는 이 시집에서 그는 우리의 조각난 삶과 서러운 일상의 바닥에 깔린 슬픔의 근원을 명징하게 바라보면서 비극적 서정을 결정적으로 고양시켜 드러낸다. 이 심오한 바라봄-드러냄의 변증은 80년대 우리 시단의 가장 탁월한 성취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환상소설의 한 장면처럼 납득하기 힘든 상황의 묘사, 이유가 선명하지 않은 절규 등을 담아냈다는 비판도 받았다. 또한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언어 파괴에 능란하다. 의식의 해체를 통해 역동적 상상력을 발휘, 영상 효과로 처리하는 데도 뛰어나다. 그러나 객관적 현실에 대해 냉소적이라거나 『그 여름의 끝』 이후의 관념성을 비판받기도 했다. 그는 초기 시의 모더니즘 경향에서 벗어나 동양의 형이상의 세계에 심취하였다. 1989년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1991년 프랑스 파리에 다시 갔다. 다른 삶의 방법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시인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와 함께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테니스. 시인에게 마치 애인과도 같은 테니스는 그에게 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삶을 보다 즐겁게 만들었다. 2007년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나무인간 강판권」등으로 제53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계명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