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윤고은(왼쪽)과 정소현
“지나가버린 여덟 명의 애인이 한자리에서 날 보고 있는 거예요.”
정소현(이하 정)_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는 소설집으로는 세 번째, 장편을 포함하면 다섯 번째 책이에요. 작가의 궤적을 함께 따라 읽은 독자이자 동료로서 매우 반갑기도 하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작가의 시선과 노련함이 읽혀 독서를 하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이번 소설집을 내는 감회가 어떠신가요?
윤고은(이하 윤)_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이 꼭 여덟 명의 애인 같아요. 지나가버린 여덟 명의 애인이 한자리에서 날 보고 있는 거예요. 이게 약간 무슨 몇 자 대면하는 느낌이랄까. 여덟 명의 애인에게 다 나를 남발한 거 같기도 하고요. ‘난 오직 너뿐이야’ 이렇게요. (웃음)
정_ 첫 책이 장편소설로 나왔고, 그 이후로도 장, 단편을 고르게 발표하셨어요. 몸 바꾸기를 해가며 둘 다 성공적으로 쓰고 있는데, 본인은 둘 중 어느 쪽이 더 자신의 사고 체계, 언술 방식과 맞는다고 생각하나요? 특히, 단편을 쓸 때 느끼는 장점과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윤_ 이번 책이 단편집이잖아요. 그래서 단편이 더 잘 맞는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다음 책은 아마 장편일 텐데……. 그때 한 번 더 물어봐 주시면 좀 더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무튼, 지금은 단편을 모으니까 그래, 단편이지 이런 느낌이 들었어요. (웃음)
정_ 그래, 역시 소설은 단편이야 이런 느낌 말이죠? (웃음)
윤_ 네. (웃음) 시간을 묶는 느낌도 들었고요. 지난 2년 동안 쓴 단편 여덟 편을 묶은 건데, 소설을 쓰던 당시의 기억들도 새삼 떠오르고 해서요.
정_ 이번 소설집을 엮으면서 생긴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소설의 씨앗이 되었던 일, 쓰면서 겪은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윤_ 제 실수에서 소설이 시작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알로하』에 실린 단편 〈요리사의 손톱〉도 제가 ‘셰프스 노트(Chef’s Note)’란 간판을 ‘셰프스 네일(Chef’s Nail)’이라고 잘못 보면서 시작된 거였거든요. 어떻게 레스토랑 이름에 손톱이 들어가지? 혼자서 그런 착각을 하고 놀랐는데, 알고 보니 흘림체를 제가 잘못 본 거였어요. 이런 경우가 아주 흔해요. 얼마 전에는 ‘단소, 대금, 손금’이 적혀 있는 간판을 발견했거든요. 또 놀랐죠. 단소 학원에서 이젠 손금까지 봐주어야 하는구나, 하고요. 다시 보니까 손금의 ㄴ이 있어야 할 자리가 현수막으로 가려져 있었어요. ‘단소, 대금, 소금’이었던 거고, 문맥상 당연히 그런데도 없던 받침까지 붙여가며 오독을 한 거죠. 그런 사소한 지점들을 기록해둬요. 이번 소설집에서도 술에 취한 채 다른 집 대문을 제집으로 착각해 두드린다거나(「전설적인 존재」), 문장이든 펜이든 잃어버린 뭔가를 찾으러 종점까지 가는 것(「책상」)은 제가 경험한 거예요. 차이가 있다면 전 술도 안 마시고 다른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는 것 정도죠. 제 소설에는 길을 잘못 들거나, 차를 잘못 타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종종 있는데요. 그런 건 제게 아주 흔해요.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에서처럼 장거리는 아니지만요.
얼마 전에 운전 연수를 받았는데, 선생님이 매일 똑같은 차를 가져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제가 이렇게 물었죠. “매일 다른 차를 가지고 오시는 거죠?” 선생님이 묘한 표정으로 대답하시더라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재미있는 건 매일 그 차가 다른 차라고 생각했던 저는 매일 다른 느낌들을 발견했다는 거예요.
길에서 주운 말들도 소설이 될 수 있어요. 언젠가 딱 두 번 나갔던 댄스 학원에서 주워들은 말이 「된장이 된」의 재료가 됐거든요. 탈의실에서 한 명이 그러더군요. “에이 씨. 아빠가 어제 30만 원 받아오기로 했는데 된장을 받아와 가지고.” 그때 딱, 무언가 온 거죠. 아빠가 돈 대신 된장을 받아왔다, 거기서 시작하게 된 게 「된장이 된」이에요. 제 동료들도 돈 대신 배나 고추장을 받은 경험을 얘기했던 적이 있거든요.
정_ 어떻게 된장을 받아왔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는데, 실제 누군가가 경험한 이야기였군요. 비싼 된장을 받아왔겠네요. (웃음)
윤_ 사기꾼 남자의 몸무게 정도는 되어야 할 거 같아서 좀 확장하다 보니 1000만 원이 되었어요.
윤고은_ⓒ이상민
“제 소설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정_ (웃음) 여덟 편의 단편을 쓰고 엮는 동안 ‘윤고은’이란 사람에게 생긴 변화는 무엇인가요? 또 그럼에도 결코 변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윤_ 이 책을 읽을 사람에 대해 상상하게 됐어요. 독자만 작가를 상상하는 게 아니라 작가도 독자를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특히 이번 소설집에는 「된장이 된」의 ‘아버지’라든지 「책상」의 ‘기암’이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의 ‘홀튼’처럼 좀 나이 있는 남자들이 많이 등장해요. 사실 저는 우리 아버지 세대에 초점을 맞춰서 쓴 적은 없었어요. 『무중력 증후군』이나 「해마, 날다」 같은 예전 작품에서 아버지가 등장하긴 하지만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 소설에 60대 이상의 남자들이 등장하고 있어요. 제 아버지가 자주 60대 이상 남자가 읽을 만한 소설을 쓰라고 주문하시는데, 사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그래도 그 주문이 반영된 걸까요?
아, 아버지는 제 소설을 안 읽으세요. 제 첫 소설인 『무중력 증후군』의 첫 문장 ‘외로움은 최고의 비아그라다’에서 버퍼링이 걸려서 무한으로 돌고 계세요. (웃음) ‘이게 무슨 말이냐.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사실 부모님이 제 소설을 읽는 건 원하지 않아요. 뭔가 자꾸 저와 작품 속 화자를 동일시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불타는 작품」에서 는 ‘최 부장’을 한 60대 정도로 상상하고 썼는데요. 사실 제 소설 속에서는 20대나 30대나 60대나 같은 고민을 하는 처지라 그 자체가 이전과 비교해서 아주 큰 변화는 아니에요. 다만 그 60대의 ‘최 부장’이 개 한 마리를 상사로 모신다는 게 어떤 걸까, 개와 사람 사이의 통역을 한다는 게 어떤 걸까, 그런 지점에 시선이 오래 멎더라고요. 아버지를 투영하게 되는 거죠. 생활과 소설이 같이 맞물리기도 해요. 요즘엔 제 소설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아주 따뜻한 소설은 아니지만요.
정_ 윤고은 작가는 나이 들면서 노후화되는 게 아니라 재기 발랄함은 그대로 보존된 상태로 숙성되는 것 같아요. 유산균이 보존된 상태로 맛은 점점 깊어지는 오래된 된장처럼 말이에요.
“잘못 선택했으나 끝까지 읽는 그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정_ 이번 소설집에 실린 소설을 포함해 지금까지 발표했던 소설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작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작품은 무엇이고,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윤_ 음…….
정_ 애인이 너무 많아 기억을 할 수 없나요? (웃음)
윤_ 항상 이런 질문을 받으면 바로 직전에 쓴 소설을 얘기했거든요. 그래야 공평한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제 마음도 날씨처럼 매일 달라서요. 이번 소설집이라는 전제하에, 태어난 순서를 떠나서 얘기하자면 아무래도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가 가장 마음에 남아요. 주인공이 생존배낭 만드는 일을 하는데 제가 그 세계에 많이 몰입했던 것 같아요. 서바이벌 키트, 초경량 멀티 용품…… 그런 게 재미있어요. 취미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꽤 절실하게 여기는 거예요.
정_ 예전에 우리가 전쟁 공포와 재난 공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공감한 적이 있었지요. 남들은 웃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심각하잖아요. 공포를 공감할 수 있어 역설적으로 안심이 되네요.
윤_ 그렇죠? 단지 매일 그 생각만 할 수는 없으니까 잊고 있을 뿐인데. 그러다가도 퍼뜩 생각이 나죠. 생존배낭의 세계가 저한테는 아주 낯선 건 아니었어요. 단골 식당 메뉴처럼 외울 필요 없이, 체화된 게 조금 있었거든요. 다만 생존배낭에 대한 지식이나 장비보다 더 중요한 게 따로 있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한 거죠. 생존배낭에 의해서 연장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게 사실 3일 정도예요. ‘겨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며칠을 연장하기 위해 배낭을 채우는 것과 생존에 필수적인 장비라 할 순 없지만 어떤 심리적인 지지대가 될 수 있는 거로 배낭을 채우는 게 어떻게 다를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소설 속 위키의 배낭 속에는 비에 젖지 않게 잘 포장한 사진이라든지, 추억이 담긴 가위 같은 게 들어 있는데, 그 물품의 효용은 일반적인 생존배낭의 계산법으로는 측정할 수가 없잖아요.
정_ 저도 개인적으로 이 소설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읽다 보니 인물들이 구상 단계에서 단단하게 만들어놓은 인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쓰는 동안 작가가 인물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을 것 같아요.
윤_ 위키요?
정_ 위키도 그렇고, 다른 인물들도요. 읽다 보니 소설이 어디로 튈지 모르겠더라고요. ‘나’가 차를 잘못 올라타기 전까지 제가 읽고 짐작했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더군요. 엉뚱한 차를 타더니 차 주인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같이 살았던 남자의 이야기가 더해지는데, 그 가슴 아픈 사연들을 다 읽고 나니 이야기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랄까, 아니 인물들이 내 마음속으로 쿡 박혀 들어왔다가 나간 기분이 들었어요.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때 독자인 내가 느꼈던 감정을 가지고 이 안에서 오래 헤매 다니고 서성거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_ 소설 쓸 때 소리 내어 읽기도 하는데, 위키의 빈자리를 소리 내어 읽기는 좀 힘들었어요.
정_ 그래서 표제작이 된 건가요?
윤_ 그것도 맞고요. 또 히치하이크해서 ‘늙은 차’를 타지만 결국 잘못 올라탄 거잖아요. 전 지금도 버스에 잘못 올라타서 한참 돌아가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요, 생뚱맞게 완행을 탄 기분에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런 노선에서 또 의외의 기분을 만날 때가 있어요. 버스 자체가 목적지가 되는 거죠. 이 책이 그랬으면 좋겠어요. 잘못 선택했으나 끝까지 읽는 그런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책이 아니었는데, 하면서도 계속 읽는 그런 책이요.
정_ 생각해보니 제가 그런 경험을 한 거였네요. 잘못 올라탄 것은 아니었지만, 예상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어 ‘어,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끝까지 읽었어요. 그게 더 풍부한 재미와 이상한 쾌감을 가져다준 것 같아요.
정소현
“한 편의 소설을 쓰는 과정이 정말 연애랑 비슷한 거 같아요.”
정_ 주로 소설을 어디에서 쓰세요? 소설을 구상하고 쓰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을 하고 또 막히면 어떻게 풀어가나요? 일종의 개인적인 의식이랄까 그런 것이 있나요?
윤_ 카페에 가서 써요. 주로 스타벅스요. 전 원래 커피를 안 좋아했는데, 제 나름대로 규칙을 만든 거예요. ‘너는 커피를 마시면 글을 써야 한다’ 이런 식으로. 결과적으로 커피 중독만 되었고 그 조건부에 대한 효과가 별로 없지만요. 스타벅스에 가서도 차도에 인접한 통유리창 자리는 선호하지 않아요. 차가 갑자기 돌진해 들어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정_ 저보다 중증인데요? (웃음)
윤_ 명랑한 톤으로 얘기했다고 꼭 적어주세요. (웃음) 제가 면허를 따보니까 운전이란 걸 더 못 믿겠어요. 브레이크를 밟고 있다가 무릎에 힘이 풀려서 잠깐 발을 들어도 차가 나갈 수 있다는 거잖아요. 어떤 시스템이 발로 조절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정_ 심지어 손도 아니고 발이에요. (웃음)
윤_ 자동차의 목적이 멈춰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데 있다는 걸 생각하자면 그런 운동 방식을 허술하다 말할 순 없는데 말이에요. 아무튼, 운전을 한 이후로는 더 통유리창을 피해요. 명당은 아무래도 가게 안쪽, 벽 앞이나 그런 곳이죠. 뒷문이 가까이 있으면 더 좋고요.
정_ 화장실 가까운데. (웃음)
윤_ 물이 중요하죠. 보통 비상구도 그런 쪽에 있고요. (웃음)
정_ 재난에 대비하는 거죠? (웃음)
윤_ 겁만 많은 거예요. 심리적 안정을 존중할 뿐이지, 막상 준비된 건 하나도 없어요. 저 같은 사람이 막상 어이없게 죽을 수도. (웃음)
정_ 소설을 시작하기까지 힘든 편인가요? 아니면 술술 풀려나 가나요?
윤_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한 편의 소설을 쓰는 과정 이 정말 연애랑 비슷한 거 같아요. 맨 처음엔 썸 타는 단계가 있어요. 얘랑 만나 볼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과정, 슬쩍 떠보는 과정, 그렇게 쓸까 말까 간 보는 과정이 제일 신나요. 무책임하게 이것저것 다 건드려보고. 그 다음 단계가 힘들죠. 확신과 의심이 거의 밀물 썰물 수준으로 번갈아가면서 오기도 하고요. 의심이 몰아치기 시작하면…… 쓰면서 얘가 아닌가 보다, 얘는 아니었어, 얜 내 사람이 아니었어, 잘못 선택했어, 이제 와서 버릴 수도 없고. (웃음) 뭔지 알죠?
정_ (웃음) 너무 적절해요.
윤_ 퇴고 단계까지 가면 어쩔 수 없어요.
정, 윤_ 정으로 써야겠지요. (웃음)
윤_ 그런데 퇴고 단계까지 갔다는 건 이미 그 이야기와 엄청난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라서 설사 완성이 되지 않는다 해도 이미 쓰는 행위 자체로도 보상받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이야기가 막히기도 하지만요. 쓰다가 막힐 때는 입으로 해결하는 편이에요. 주변 사람들한테 이 소설에 대해 얘기하다가 저 스스로 출구를, 비상구를 찾게 될 때도 있어요. 누구나 말을 하다 보면 듣는 사람을 설득하려는 욕구를 갖게 되잖아요. 그래서 여기저기 ‘이 얘기 좀 들어봐’ 하고 말하고 다니죠. 혼자서도 자주 말하고요. 허공에 대고.
정_ 재밌게 쓰시네요. 개인적인 의식은요?
윤_ 안전지대에서 써요. 쓰다 죽지 말자는 마음으로. (웃음) 가장 무서운 건 자꾸 가동되려고 하는 제 상상이에요. 이 공간으로 차가 돌진한다거나, 전기 플러그 위로 커피를 쏟는다거나, 갑자기 화재경보기가 울린다거나, 아니면 2층 바닥이 폭삭 무너진다거나, 누군가가 뛰어들어 절 공격한다거나, 뭐 그런 장면들로부터 도망가야 해요. 뭔가를 쓰다 보면 잊게 돼요. 그러다가 글이 막히면 또 모서리를 봐요. 천장에 균열 같은 거요. 저 균열은 언제 생긴 건가, 하면서요. 균열이 안 보이면 시야를 더 넓게 확보해서 뭐라도 찾으려고 해요. 이 모든 건 의식하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져요. 습관처럼. 저는 이런 거 보는 게 너무 좋아요.
정_ 제 증상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요. (웃음)
윤_ 대담 마무리에 그들은 예약된 병원으로 갔다, 하고 써야 할 거 같아요. (웃음)
정_ 재난을 대비하는 모임이라도 만들어야 할 거 같아요. (웃음)
"사실 그 공포와 공생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정_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뭔가요? 소설 외적이든 내적이든 상관없이 이야기해주세요.
윤_ 빛인 거 같아요. 조도라고 해야 할까요. 물리적으로도 적당한 조명이 필요한데, 노란 불빛을 받고 있으면 무대 위에 올라선 배우가 된 것 같기도 하고요. 통유리를 꺼리는 건 사실 너무 밝아서이기도 해요. 자외선은 그냥 피부 노화를 불러올 뿐이지만, 노란 조명은 영감을 주죠. 노란 등이 정수리까지 내려오는 술집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인 것 같아요. 술 마실 때도 영감의 고갈을 걱정해야 하니까요. 물론 제가 빛으로 충전되는 로봇은 아니니까, 빛이 없을 때도 쓸 수는 있지만 속으로 그런 빛을 상상해요. 제 피부가 태양열 집열판이라고 생각하고 뭔가를 모으는 느낌이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감정은 아니에요. 불안하고 심지어 절망적이기까지 한, 그런 느낌이에요. 안전지대의 명당을 원하는 사람치고는 좀 그렇죠.
정_ 저도 조금 불안하고 화가 난 상태에서 소설을 쓰곤 해요. 소설이 행복한 감정에서 촉발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윤_ 맞아요, 우리 둘 다 공포증에 대해 얘기했지만, 사실 그 공포와 공생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나를 기억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쓴 게 소설로는 처음이에요.”
정_ 왜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요? 첫 소설은 어떤 작품이었을 지 궁금하네요.
윤_ 고등학교 때, 나이가 지긋하고 로빈 윌리엄스를 닮은 문학 선생님이 좋아서 잘 보이고 싶었어요. 제 욕망은 하나였어요. 그냥 나를 알리고 싶었어요. 나를 기억해주었으면 했어요. 담임선생님도 아니었고, 가르치는 수많은 애들 사이에서 제가 튀는 것도 아니었어요. 반장도 아니었고, 엄청나게 공부를 잘하지도 않았어요. 어필할 게 뭐가 있나, 하던 참에 선생님이 얼핏 시나 소설 쓰는 제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바로 저 부분인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또 문예부였어요. 제가 왜 문예부에 들어갔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돌아보면 마침 거기 들어가 있었더라고요. 선생님께 문예부 누군데요, 제 소설을 읽어주실 수 있느냐고 물어봤어요. 다음 주에 가져 올 수 있냐고 물으셔서 네, 하고 대답하고는 그날부터 썼어요. (웃음) 3일 만에 식물인간 얘기로 한 70매를 썼어요. 사랑의 힘이었죠. 선생님이 도입부가 시처럼 아름답다고 해줬어요. 그때부터 도입부가 무조건 시처럼 아름다운 소설만 쓰리라, 다짐했죠. 물론 지금은 ‘도입부가 시처럼 아름답다’는 문장에 대해 여러 각도로 의심해요. 일단 그 소설을 지금 다시 읽어보면 도입부가 시처럼 아름답지 않은 것 같고, 또 시처럼 아름답다는 문장도 의심스러워요. 시가 아름다운 건가, 그렇게 되묻게 되는 거죠. 어쨌거나 그게 제 첫 소설이었어요.
“아닌 건 확실히 얘기할 수 있어요. 일단, 요리는 아닐 거 같아요.”
정_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나요?
윤_ 아닌 건 확실히 얘기할 수 있어요. 일단, 요리는 아닐 거 같아요. (웃음) 최근에 지질학이 재밌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진이나 화산, 화석 같은 거, 지구의 피부나 근육 같은 거, 자꾸 관심이 가요.
정_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있나요?
윤_ 네. 태평양을 떠다닌다는 쓰레기 섬이 궁금해요. 예전에 장편 《밤의 여행자들》에서 싱크홀이나 쓰나미를 다뤘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였어요. 그 이야기도 원전 쓰레기가 어디까지 흘러갔는지 그런 경로를 더듬다가 발전한 거고요. 우리가 지구에 딱 고정된 게 아니고 맨틀 위에서 흘러가잖아요. 아주 느린 벨트컨베이어 위에 올려진 것처럼. 그렇게 내가 어딘가에 고정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무섭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고 그래요. 전 아보카도를 좋아하는 데 생김새가 마음에 들어서예요. 반으로 갈라 그 안의 씨를 볼 때마다 지구 핵이 떠오르거든요. 지질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 좀 해봤어요.
정_ 의외의 답변이었어요. 저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분야라 독특하고 재미있는 생각처럼 느껴져요. 누비 장인이 된다면 모를까, 지질학자라니요.
윤_ 누비 장인이요?
정_ 네, 누비 바느질 장인이요.
윤_ 제 영역이 아닌 것 중에 하나예요. 고등학교 1학년 가사 수업 때 알았어요. (웃음) 누비 장인은 지금도 도전할 수 있잖아요?
정_ 눈 나빠지고 허리 아파서 안 돼요. (웃음) 소설 쓰면 마음이 시끄러운데, 무념무상한 상태로 바느질을 하면 편안하고 좋더라고요. 그런데 저의 이런 대답은 예측 가능하고 상투적이지 않나요? 윤고은 작가의 대답은 재미있네요. 지질학자 같은 대답을 들을 줄 몰랐어요.
윤_ 전 ‘누비 장인’이란 말이 더 이국적으로 들리는데요. 우리 둘 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영화 〈쇼생크 탈출〉을 다시 보다가, 팀 로빈스가 그 악명 높은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재발견했어요. 그는 돌에 관심이 많았죠. 지질학이 그의 탈출을 도운 거예요. 그가 벽이나 바닥의 성질을 살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탈출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이상은, 윤고은의 소설집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에 실린 윤고은, 정소현 작가의 대담을 축약한 내용입니다. 대담 전문은 소설집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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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차와 히치하이커윤고은 저 | 한겨레출판
2014년부터 2016년까지의 작품을 묶은 이번 소설집에서 조금 더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서서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따스하고도 고유한 여덟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소설가 정소현과의 대담은 소설가 윤고은의 솔직 담백함과 사랑스러움을 확인하게 해주어 소설의 매력을 더한다.
한겨레출판
김승철
2016.06.24
언강이숨트는새벽
2016.06.14
애독하고있어요. 윤고은 작가님 글들 ..이렇게 보니 더 반갑네요..
저역시 오독을 넘 즐겨요!^^
jijiopop
2016.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