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번째 문제
<문제>
1966년 컴퓨터 공학자 요제프 바이첸바움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자연어 소통을 실현한 컴퓨터 프로그램 ‘엘리자(Eliza)’를 개발했습니다. ‘엘리자’는 사용자가 타이핑한 문장에 인쇄된 문자로 응답하며 대화를 완성하는데요, 말하자면 인공 지능과 채팅을 하는 프로그램인 셈입니다. 다음은 바이첸바움이 제출한 연구 보고서 중 일부입니다. 빈칸에 어울리는 ‘엘리자’의 대답은?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자넷 머레이 지음에서 인용한 대화입니다.)
환자 : 저…, 제 남자친구가 여기에 한 번 와 보라고 하더군요.
엘리자 : 당신의 남자친구가 당신을 여기에 와 보라고 했군요?
환자: 그는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우울한 상태에 있다고 말해요.
엘리자 : 당신이 우울한 상태에 있다니 참 안됐군요.
환자 : 정말이에요. 나는 불행해요.
엘리자 : 당신이 여기에 온 것이 그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어떤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나요?
환자 : 나는 도움을 원해요. 확실한 도움을요.
엘리자 : 당신이 도움을 원한다고 할 때, 그 말이 당신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죠?
환자 : 아마 나는 어머니와 사이 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고 싶은가 봐요.
엘리자 : ( )
1)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고 싶군요?
2)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다니 참 불행하군요.
3) 확실한 도움을 원하신다면, 요금을 더 내셔야 합니다.
4) 확실하게 알고 싶은 게 생겼을 때 다시 방문해 주시겠어요?
5) 당신 가족에 관해 좀더 얘기해 주시겠어요?
<해설>
이세돌과 알파고의 역사적인 대국을 지켜보는 동안 방송을 중계하는 사람들의 표현이 재미있었다. “과연 알파고의 의도가 무엇일까요?”라거나 “알파고에게 복수를 해줄 기회가 왔습니다.”라거나 “얘는 왜 이렇게 공격을 하지 않고 정석적인 수비만 할까요?”라는 해설을 듣고 있으면 알파고를 살아 있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감정이입을 잘 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이 우리에게 던져 준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우리는 대체 ‘알파고’와 같은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가?”일 것이다.
‘튜링 테스트’는 수학자이자 암호해독가인 앨런 튜링이 제시한 인공 지능 판별법이다. 튜링은 컴퓨터가 스스로 사고할 수 있음을 확인하려면 대화를 나눠보면 되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컴퓨터 역시 의식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러 과학자들은 ‘튜링 테스트’가 진정한 인공지능을 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했지만, 인간과 인공지능의 정의를 고민하게 하는 흥미로운 테스트임은 분명하다. 2014년에는 영국의 레딩대학교가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 ‘유진 구스트만’이 처음으로 테스트를 통과하기도 했다. ‘유진’은 우크라이나 국적의 13세 소년으로 설정됐고, 심사위원 25명 가운데 33퍼센트가 진짜 인간이라고 판단했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것으로 바뀌고 있다. 최근에는 ‘포스트 휴먼’이라는 용어가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는데, 급변하는 인류의 생활방식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인간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이다. 포스트 휴먼이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아이언맨’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수많은 슈퍼히어로들이 인간들과는 출생 성분부터가 다른 데 비해, 아이언맨은 자신의 돈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었다. 첨단 장비를 갖추고, 수명을 연장하며, 하늘을 날 수도 있다. 캐서린 헤일스의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에는 포스트 휴먼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신체를 가진 존재와 컴퓨터 시뮬레이션, 사이버네틱스 메커니즘과 생물학적 유기체, 로봇의 목적론과 인간의 목표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나 절대적인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단계다.
인간은 머지않아 자유롭게 우주 비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개인용 우주선이 생길 테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산책 삼아 지구를 한 바퀴 둘러보고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을 올려보며 별을 세는 게 아니라 지구를 둘러보며 불빛을 세는 날이 곧 올 것이다. 그때쯤이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완전히 바뀔 것이고, 세계를 인식하는 감각 역시 달라질 것이다. 그때의 인간은 지금의 인간과 무척 다를 게 분명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정의할 때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단어 역시 그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요제프 바이첸바움이 만든 ‘엘리자’는 하나마나한 말로 인간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엘리자’는 좋은 친구가 될 수는 없었지만, 좋은 상담자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엘리자’에게는 현명한 규칙이 있었다. 상담자가 “그는 내가 너무 많은 시간을 우울한 상태에 있다고 말해요.”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어떤 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위로할 수도 있겠지만 ‘엘리자’의 스승은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영국의 의사였다. 의사는 이렇게 답변한다. “당신은 스스로를 우울한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군요.” 특수한 규칙을 적용한다면, “당신이 우울한 상태에 있다니 참 안됐군요.”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발짝 더 나아간다면 “당신을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엘리자’를 믿게 된 데에는 중립적인 태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상담자들은 자신이 기계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렸다.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써낸 소설이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인간의 언어야말로 인공지능이 복사하기 힘든 무엇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을 도식화할 수는 있다. ‘엘리자’처럼 하나마나한 말들로 신뢰를 얻을 수도 있다. 대화의 패턴을 만들 수도 있고, 이야기와 플롯의 공식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중얼거림은 절대 흉내 낼 수 없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은 것들, 말했지만 말하지 않은 것들, 중얼거리지만 들리지 않는 것들, 들리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들 같은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은 아닐까. 얼마 전에 읽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가 떠올랐다. 「나의 시에게」라는 작품이다.
가장 좋은 경우는
나의 시야, 네가 꼼꼼히 읽히고,
논평되고, 기억되는 것이란다.
그 다음으로 좋은 경우는
그냥 읽히는 것이지.
세번째 가능성은
이제 막 완성되었는데
잠시 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
네가 활용될 수 있는 네 번째 가능성이 하나 더 남았으니
미처 쓰이지 않은 채 자취를 감추는 것,
흡족한 어조로 네 자신을 향해 뭐라고 웅얼대면서.
웅얼거리고 마는 실패의 기록이 성공적인 이야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포스트 휴먼이 되어서도 나는 문학을 하게 될 것인가. 문학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인가. 아직은 장담할 수 없지만 여전히 중얼거리는 문학을 하고 있지 않을까.
정답은, 5번이다. ‘엘리자’는 인간보다 이야기를 더 잘 들어준다. “가족에 대해서 좀더 얘기해 주겠어?”라는 질문을 던지려면 앞으로 닥칠 수십 분, 수십 시간의 지루함을 각오해야 한다.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에는 ‘엘리자’의 또 다른 이야기도 나온다. 어떤 회사의 부사장이 ‘엘리자’를 재택 근무하는 직원으로 생각하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하나마나한 이야기만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따라 하기만 하는 ‘엘리자’에게 화를 내던 부사장은 급기야 “당장 000-0000 전화번호로 전화를 주게”라고 메시지를 보내지만 ‘엘리자’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부사장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마침표를 찍는 일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엘리자’가 반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인간일 때에도, 포스트휴먼이 되었을 때에도, 컴퓨터에게도, 인간에게도, 마침표는 제대로 잘 찍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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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캐서린 헤일스 저/허진 역 | 열린책들
기술사와 문화사를 넘나들며 세 가지 주제, 즉 정보는 어떻게 신체를 잃었는가, 사이보그가 어떻게 문화적, 기술적으로 구성되었는가, 사이버네틱스 담론에서 자유주의적 휴머니즘 주체는 어떻게 해체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중혁(소설가)
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jijiopop
2016.06.27
susunhoy
2016.06.15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는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밝혀 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읽기 편하게 나눴습니다..
류근 시인님 죄송합니다_()_
사람들에게는 좋은 상담자보다
좋은 친구가 필요할 것이고
좋은 친구처럼 좋은 시도 필요하겠지요
언젠가 작은 위로 음악회에 갔었는데요
의자 하나하나 묶여진 리본의 세심함이
놀랍기도 하고 감동적이였습니다
작가님도 '엘리자'가 할 수 없는 '글'로 정진하세요
오렌지 주스나 바나나 우유 배달갑니다 하핫^^;
건필하세요 꾸벅*)=
susunhoy
2016.06.15
얼마 전 팟캐스트[빨간책방]에서
다루었던 책[로봇의 부상]과도 연결되는 칼럼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저는 웅얼거리는 답변이 2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ㅋ
그리고 덜 웅얼거리는 답변은 5번인 거 같았고요^^
상황만 준다면 사람이 감동받을 정도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건 '강한 인공지능'이지요
인공지능이 감동확률을 분석해서
창의력을 개발 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지만 걱정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중권 교수님이 언급하신
인공지능의 주체적 의사결정 불가능함..
알고리즘에 의해 철저하게
선택된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더 와 닿더군요
작가님의 칼럼 전체적인 내용도 그러하네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문학'의 비중에
더 무게를 실어주셔서 힘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