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의 아득함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맥스 퍼킨스의 말은 마치 내가 며칠 전 한 말 같다. “편집자는 익명으로 남아야 돼. 모든 독자는 책을 읽을 때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해야만 해. 편집자는 밤잠을 못 이뤄. 작가의 글을 좋게 바꾸고 있는 걸까, 그저 변형시키고 있는 것인가.” 후아, 정말 밤잠을 못 이룬다는 과장을 누그러뜨린다면 바로 내 말. 영화 <지니어스>는 실화다. 실제 작가와 실제 편집자의 이야기인 것.
1929년 뉴욕, 문학 출판의 황금기, 모든 출판사에서 퇴짜 맞은 천재 작가 토마스 울프의 원고를 읽고 편집자 퍼킨스는 단박에 그 문학성을 알아본다. 2017년 서울의 출판사 편집자 이야기로 바꾸면 디테일은 모두 달라져도 직업의식은 달라지지 않는다. 투고 원고를 매일같이 읽고, 그 중 매우 드문 사례로 출간할 뜻을 갖고 예비 저자와 만나 기획 논의를 하고, 저자와 교정 교열로 대립각을 세우기도 하며, 저자의 사생활은 자연스럽게 보호해야만 하고, 무엇보다 저자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직업의식.
작년 봄 상영했던 코언 형제 감독의 <헤일, 시저!>를 보면서 1950년대 할리우드 영화사 뒷이야기를 지금 서울의 영화사 일에 대입하면 어떤가, 영화 관계자들에게 물은 적 많았다. 다들 ‘쏘쏘, 뭐 그렇지, 영화 제작 뒷이야기가 사람 사는 이야기지’ 했었다. 이제 내가 질문을 받는다.
편집자의 일이 저 정도로 멋져요?(이 사람이 배우 콜린 퍼스의 말투와 스타일에 감정 이입된 것이지, 분명) 편집자가 고치라고 한다고 작가가 고쳐요?(삐딱한 이 사람은 뭔가 좀 아는 사람) 편집자가 출간 결정권이 있어요?(있을 수도 있지요, 발행인인 사장의 편집자 신뢰도가 우선이지만) 편집자의 집에 작가를 초대해요?(몹시 드문 일입니다만) 작가의 연인이 편집자에게 질투를 느끼기도 합니까?(글쎄올시다, 들어본 적이 없어서) 작가가 유명해지면 다른 출판사에서 선인세로 유혹하나 보죠?(완전 현실이죠. 이건 미국이나 한국이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늘 있는 일) 작가가 천재라는 건 알겠는데 천재 편집자는 뭐예요?(글 보는 안목이 뛰어나고 인내심, 인품이 훌륭하다는 의미겠지요, 천재는 무슨, 인내심의 천재겠지요.)
편집자 맥스 퍼킨스에게 붙은 수식어인 ‘스콧 피츠제럴드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동반자, 토마스 울프의 절대적 지지자’는 영화에서도 재연된다. 세 작가가 세기의 유명 작가가 되었기에 편집자가 영광을 얻는 것. 퍼킨스가 만든 책이 어찌 세 작가뿐일까 만은 역사의 기록은, 독자의 기억은 유명 작가를 기준으로 남는 것. 낚싯배에서 대형 참치를 걸어놓고 기념 촬영을 하는 작가 헤밍웨이와 편집자는 눈에 익숙한 그림이다. 이건 헤밍웨이의 대표적인 스웨터 입은 프로필만큼이나 흔한 바다낚시 풍경 아닌가.
몇 달 전 번역 출간된 『헤밍웨이의 말』에도 맥스 퍼킨스에 대한 예화가 실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편집자가 퍼킨스였다. “호텔 방에서 한 번도 나가지 않고 90시간 동안 그 책 교정쇄를 읽었죠. 다 보고 나자 글자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책을 안 살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눈이 빠질 것 같았어요. 원고를 몇 번이나 수정했지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죠. 맥스 퍼킨스에게 활자 문제를 이야기하자, 내가 정말로 너무 작다고 생각한다면 책을 다 새로 찍겠다고 하더군요. 그건 정말 돈이 많이 드는 일이잖아요. 좋은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맥스가 옳았어요. 활자는 괜찮았어요.” 오 마이 갓. 작가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옳았던’ 편집자라는 믿음을 주는 일은 지극히 진심 어린 성실함 뒤에 오는 최대 보상인 셈이다. 작가의 인품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괴팍하거나 정서 불안이 흔한 창작자의 고통과 고집을 잘 견디어낸, 선물 같은 찬사인 것.
나는 영화 <지니어스>를 두 번 보고도 자꾸 보고 싶다. 영화 완성도와는 하등 관계없는 호감이다. 색감은 말할 것도 없고 주드 로와 콜린 퍼스의 대사가 흥미롭고 작가의 연인으로 출연하는 니콜 키드먼의 강렬한 눈빛을 자꾸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 <디 아워스>에서 우울한 천재 작가 버지니아 울프를 연기했던 니콜 키드먼이 이번에는 천재 작가의 편집자에게 질투심을 폭발하는 연인 역을 맡았던 것. 이러나저러나 ‘작가 영화’에서 그녀는 ‘문학적 욕망’과 ‘사랑의 욕망’으로 뒤엉킨 뛰어난 내면 연기를 선보였다.
이 글을 읽을 독자 분께 남기고픈 말: 읽으시는 책이 원고 그대로 출간되는 거 아닌 거 잘 아시죠? 편집자가 날것 원고를 읽고 저자와 함께 교정하고 레이아웃한 것. ‘판면’이라고 부르죠. 판면의 여백과 느낌을 함께 읽으신 것입니다. 작가의 그림자처럼 붙어 있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 편집자라는 사람이 책을 만들어요. 원고는 작가가 쓰지만요.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YES24 채널예스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jijiopop
2017.05.02
mysoso
2017.04.24
woojukaki
2017.04.21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