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중학 생활을 마치는 기념으로 친구들 넷이서 졸업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딸아이가 말했다. 1박 2일은 아니지? 맞단다. 자고 온단다. 목적지는 묻지도 않고 나는 어른 없이 너희끼리 가는 건 위험하므로 하루 일정으로 다녀오라고 일축했다. 딸아이가 입을 쑥 내밀더니 한마디 던진다. “엄마는 왜 이렇게 보수적이야?”
살다살다 청학동 훈장 취급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허락하는 부모가 있는지, 중학생의 외박 여행이 문화적 계보가 있는 행위인지 궁금했다. 내 경험과 상식을 초과하는 상황에선 간접 경험을 참조하는데, 영화나 소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국 작가 리베카 솔닛이 열일곱 살에 미국에서 프랑스로 혼자 여행을 갔었다는 얘기가 언뜻 스쳤다. 20대 친구들 만나면 물어보리라 생각하며 판단을 유보했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려고 용쓰기보다 묵언수행하는 엄마로 살고자 했다. 말의 최소화 전략. 아이가 수학 학원만 가겠다길래 카드를 줬다. 성적표를 봐도 안 본 사람처럼 행동했다. 아이돌 공연을 보고 싶다기에 표를 끊어주었다. 보통 체구인데도 롱패딩을 극구 L사이즈로 사서는 침낭처럼 뒤집어쓰고 다니는 걸 보자면 잔소리가 목 끝에서 들끓지만 고개 돌렸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기본 임무에 충실하기. 개별성 존중, 자율성 보장, 규제하지 않기. 그러니까 육아 원칙이 아닌 관계 원칙을 아이에게도 적용했다. 그런데 가끔 말의 봉인이 풀려버리고 나의 지배와 통제 욕망이 어설프게 드러난다.
내가 낳은 타자, 딸아이를 생각하며 집어든 책이다. 『딸에 대하여』는 동성 연인을 둔 딸아이와 엄마에 관한 이야기다. 화자인 엄마는 레즈비언 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독자인 나는 저 엄마와는 다르다고 자신하며 책을 폈다. 그런데 200쪽 넘는 이야기를 통과하고 나니 장담하지 못하겠다. 타인의 (성)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자기 존재의 재건에 가까운 생의 과업이라는 것. 간단할 수 없었다. 나는 소설 속 딸과 동성 연인의 상식적인 의견보다 엄마의 우격다짐에 가까운 호소와 독백에 자연스레 감정이입 하고 있었다. 특히 이런 대사.
“나한테도 권리가 있다. 힘들게 키운 자식이 평범하고 수수하게 사는 모습을 볼 권리가 있단 말이다.”(67쪽)
가을부터 딸아이가 특성화고등학교 얘길 꺼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니까 미술시간도 없고 중요 과목 비중이 늘었단다. 그 지루하고 재미없는 학과목이 고등학교에서도 심화 반복될 테니, 자신은 디자인고등학교에 가서 색다른 활동을 하겠다는 거다. 느닷없었다. 아이는 그림 그리는 것보단 피아노 치는 걸 즐겼다. 나는 인문계고가 싫어서 특성화고를 가는 건 도피성 선택이고 순간의 안락일 뿐 거기에서도 또 다른 장벽과 근심이 자랄 것이라고, 그냥 집 가까운 학교에 가라고 말했더니 딸아이가 반박했다.
“엄마가 우려하는 대로 될지 안 될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일단 내가 하고 싶은 건 해봐야 후회가 없지. 안 그래?” 아무렴, 늘 내가 하던 얘기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생은 앎을 구축하는 과정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딸의 주체적인 삶을 지지한다. 그러나 “딸애의 삶을 내 삶으로부터 멀리 던져버리고”서야 나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지지와 격려, 응원 같은 좋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106쪽)
나는 1989년에 여상을 졸업했다. 자부도 원한도 없지만 학벌중심주의 사회의 일원으로서 고졸 신분으로 불편을 겪은 건 사실이다. 대학 나와 봤자 써먹지도 못하고 소용없다는 말은 대졸자들의 말이다. 학번과 전공 없는 삶은 걸음걸음 돌부리 치워가며 걷는 일처럼 여간 성가시다. 그렇다고 자식에게 ‘대학 가라’ ‘공부해라’ 당부하진 않았다. 크기와 종류가 다를 뿐 돌부리 없는 삶은 없으니까.
큰아이가 방목 육아 속에서도 알아서 상급학교에 진학했듯이, 대안학교라는 대안을 알려줘도 거부했던 딸아이도 다수의 궤도를 군말 없이 따르겠거니 했다. 애초부터 제도교육에 기대가 없고 그저 급식 배불리 먹고 친구들과 의좋게 지내는 순조로운 학교생활을 기대한 나는 딸아이 말대로 ‘보수적인’ 사람인가.
특성화고 아이들의 수난, 열악한 노동조건이 최근에야 뉴스를 장식하지만 난 르포 작업을 위해 오래 관심을 두었다. 직접 경험과 간접 자료와 통계를 근거로 딸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여상을 다녔던 때와 지금은 현실이 달라. 너 특성화고 나와서 취직하면 여자고 고졸이고 약자 중에 약자야. 조직에서 어떤 대접받는 줄 알아? 네 꿈과 재능을 펼칠 수 있을 거 같아? 이게 얼마나 무책임하고 부끄러운 발언인지는, 소설 속 모녀의 대화 장면을 보고 깨달았다.
“너희가 가족이 될 수 있어? 어떻게 될 수 있어? 너희가 혼인 신고를 할 수 있어? 자식을 낳을 수 있어?”
“엄마 같은 사람들이 못 하게 막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107쪽)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나도 안 했다. 내 자식만 감싸고돌면서 ‘지금 세상이 어떤 줄 아느냐’고 겁주면서 그 세상을 고착시켰다. 일찍 돈을 벌어야 해서든, 빨리 기술을 배워 사회에 진출하고 싶어서든, 누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아이들이 안전과 존엄을 보장받는 사회를 만드는 게 어른이자 부모의 도리인데, 얌체같이 내 아이만 무사하길 바랐다. 피할 곳 없는 벌판에서 몸을 숨기다 들킨 기분이었다.
결국 딸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고등학교에 지원했고 합격했다. 네 상식과 내 상식의 다름, 경험의 격차, 자기 불안의 겨룸, 상호 애환에 대한 무지, 욕망의 투사, 필요의 거래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 엄마와 딸. 그러나 패자가 정해진 싸움이다. “부모가 원하는 자리로 되돌아오”는 자식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이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 애의 부모이고, 그 사실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196쪽)
‘작은 인간’의 태를 벗고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딸아이에 비추어 ‘왜소해진 나’를 본다. 더는 작지 않은 아이가 더는 쪼그라들고 싶지 않은 엄마를 흔들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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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김혜진 저 | 민음사
우리 사회 약한 고리를 타깃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날선 언어와 긴장감 넘치는 장면으로 구현하며 우리 내면의 이중 잣대를 적나라하게 해부한다는 점에서 색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은유(작가)
글 쓰는 사람.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쓰기의 말들』, 『글쓰기의 최전선』, 『폭력과 존엄 사이』 등의 책을 썼다.
키치
2017.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