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청춘 靑春’은 한창 젊고 건강한 10대 후반에서 20대에 걸치는 나잇대를 말한다. 또한,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서 만물이 푸르게 된 봄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청춘을 봄철에 비유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그런 푸르른 자연의 이미지에서 작은 숲을 떠올리며 청춘을 ‘리틀 포레스트’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 어떤 이의 원조 격은 일본의 인기 만화가 이가라시 다이스케다. 작가 자신이 도호쿠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급자족하며 생활했던 경험을 씨앗으로 삼아 만화 <리틀 포레스트>로 싹을 피웠다. 여기에 물을 주고 주변 잡초를 뽑아내며 작은 나무로 크게 한 것은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모리 준이치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 2부작이다. 1부 ‘여름과 가을’, 2부 ‘봄과 겨울’로 구성된 이 영화는 곧 국내에서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 의 제목으로 개봉 예정이다. 그리고 <리틀 포레스트> 홀씨 되어 한국으로 넘어와 임순례 감독의 손으로 뿌리를 내리면서 리메이크 영화가 되었다.
한국판의 주인공은 혜원(김태리)이다. 시골에서 살다가 대개의 젊은이가 그렇듯 대학 입시와 함께 서울로 상경, 학업과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에 결국 연료가 소진, 도피처럼 다시 고향을 찾는다. 추운 겨울 집으로 돌아와 혜원이 느끼는 감정은 낭패감이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엄마처럼 시골에 눌러 않지 않겠다며 빽 소리를 지르곤 도망치듯 떠나온 곳이었는데 돌아오게 되니 영 마음이 좋지 않다. 게다가 텅 비어있는 집. 사실 엄마는 혜원의 입시 전날 딸랑 편지 한 통만 남겨두고 집을 떠나 깜깜무소식인 상태다. 엄마는 그때 왜 나를 버린 걸까.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혜원의 귀향 소식을 듣고 친구 은숙(진기주)이 새끼강아지처럼 반갑게 찾아온다. 은숙은 혜원처럼 도시로 나가지는 않았지만, 읍내에서 은행원 생활을 하며 얻은 스트레스로 하루하루가 고달프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위안을 얻는 가운데 은숙이 마음에 두고 있는, 혜원과도 친하게 지냈던, 회사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영농에 적응 중인 재하(류준열)가 합류한다. 더운 여름에 그늘이 되어주고, 거친 비바람에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친구들에게서 자연을 감각한 혜원은 직접 키운 농작물로 음식을 해 먹고 시간에 쫓기지 않는 일상에서 여유를 느끼며 삶이란 무엇인가, 그건 나의 ‘선택’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공무원 시험 준비에 사활을 건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몰래 요리 학원에 다녔는지 엄청날 정도의 음식 솜씨(직접 막걸리를 빚고 이름부터 어려워 보이는 크렘 브륄레도 만든다!)에, 지금 당장 푸드 스타일리스트로 전향하면 충분히 성공할 것만 같은 ‘데코(레이션)’ 능력은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영화의 세계관에 비춰 과해 보이는 인상이다. 난 이게 이 영화의 성과를 깎아내리는 흠집이라고 보지 않는 쪽이다. 눈에 보기 좋은 것이 먹기에도 좋다, 는 개인적인 취향도 있고 무엇보다 영화 속 음식의 정체에 별다를 바가 있어서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살짝 두른 후 편을 썬 마늘을 함께 볶다가 면을 섞어 그 위에 식용 꽃을 고명으로 올린 파스타 하며, 깨끗이 씻은 콩을 갈아 만든 콩국에 면을 담고 그 위에 마당에서 따온 방울토마토를 반으로 잘라 찰싹 소리 나게 떨어뜨린 콩국수 등 ‘채식 菜食’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채식은 한국의 <리틀 포레스트>와 일본의 <리틀 포레스트>에서 크게 다른 설정 중 하나다. 일본의 혜원인 이치코(하시모토 아이)는 큼지막한 소고기 덩어리로 스테이크를 요리하기도 한다. 일본판의 육식과 채식의 혼합을 한국판에서 임순례 감독이 채식으로 단일화(?)한 건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와 직결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채식과 육식의 차이와 상관없이 한국에서 육식은 일방적인 강요고 그래서 채식을 선택하려는 이들은 종종 유별난 사람으로 몰리기도 한다. 한국에서 선택하는 삶이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에 가깝다. 고(故)신해철의 <도시인> 가사처럼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 집과 학교와 학원을 뫼비우스의 띠로 구간 반복하는 학생들의 어깨는 늘 처져있다. 그 고생을 해서 간신히 들어간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취업 일방향으로 몰아가 취업에 성공한 이와 실패한 이로 분류, 곧 사회로 진출해야 하는 이들의 구만리 같은 삶을 단순히 결정해 버린다.
사회가 구성원에게 제공하는 성장의 방식은 경제적인 효율성에 맞춰져 있어 다양성은 마치 채식주의자처럼 일종의 ‘버그’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 인간을 기계부품처럼 취급하는 도시에서 개인 간의 차이, 즉 개성은 효율성을 방해하는 침해 요소다. 웬만해서는 기회를 주지 않고 선택의 폭을 줄여 버그 없는 아스팔트 생태계를 구축한다. 이에서 도태되어 고향을, 시골을, 자연을 최후의 도피처로 삼는 청춘을 위로하기 위해 언론은, 기성세대는, 사회는 힐링과 같은 귀를 간지럽히는 단어를 동원하고는 한다.
당의정이 될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경쟁의 삶을 잠시 유예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까닭이다. 지금 청춘에게 필요한 건 경쟁 구도에 다시 뛰어들도록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알아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삶이다. 본디 인간은 땅 위에 발을 두고 살다가 땅속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일부다. 살인적인 경쟁에서 얻은 상처에 사람들이 자연을 찾는 건 인간이 자연에서 온 존재이기 때문일 테다. 도시는 그런 상처 따위 낙오로 낙인찍는 것과 다르게 자연은 그조차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봄처럼 파릇하고 여름처럼 청량하고 가을처럼 스산하고 겨울처럼 혹독한 삶은 다시 봄을 맞는다. 그의 순환에 맞춰 인간은 몸안의 시간과 분침을 작동한다.
자연에서는 벌레(Bug) 또한 박멸해야 하는 해충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다. 일용할 양식에 해를 입히는 해로운 존재이면서 힘들게 기른 농작물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이면서 그 자체로 아름다운 피조물이면서 도시의 경쟁하는 삶에서와 다르게 자연에서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다양성은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도시에서의 삶과 다른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선택지다. 그러니까, 시골에서 자급자족하며 여유를 느끼는 삶도 그저 힐링의 차원에서 떠밀리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인 셈이다. 그래서 재하는 영농의 삶을, 은숙은 일상의 힘겨움을 이겨내려고 잠시 일탈을, 혜원의 엄마는 삶의 해답을 찾아 엄마의 의무에서 벗어나 훌쩍 떠나는 삶을 선택한다.
추운 겨울에 돌아와 봄과 여름과 가을을 거쳐 또다시 겨울과 봄을 맞이하고 보니 혜원은 삶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동안 엄마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해 원망했던 혜원은 이제 엄마의 선택을 이해할 것 같고 서울에 적응하지 못했던 삶이 결코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 것 같다. 고향 집 퇴청 마루에 앉아 바라본 마당 너머 풍경은 단순히 위로를 넘어 또 다른 선택의 의미로 다가온다. 혜원만의 ‘리틀 포레스트’가 그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혜원은 서두름이 전혀 없는 발걸음으로 마당에 아무렇게나 세워둔 자전거에 올라타 천천히 패달을 돌려 길을 나선다. 길옆으로 쭉 늘어선 나무와 풀들이 바람에 흔들려 내는 소리가 꼭 박수를 보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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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