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 좋고, 입담 좋은 어머니가 이야기를 한다. 딸은 그 이야기를 그리고, 다시 질문한다. 대학원 졸업 후, 어머니를 담은 영상 작업을 하던 김은성 작가는 어머니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삶, 그 중에서도 엄마의 삶을” 그리겠다고 다짐한 후 2006년부터 시작된 작업은 2014년 『내 어머니 이야기』 4권을 완간하며 마침표를 찍는다. 어머니가 살아온 88년의 이야기를 8년 동안 그린 셈. 아쉽게도 이 놀라운 이야기는 잠시 잊혔다. 책이 절판된 것이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책”이라는 말로 강력추천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방송이 나가자 재출간 요구가 쏟아졌고, 드디어 2019년 1월 『내 어머니 이야기』 (전4권)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개정판 소식에 어머니는 “춤이라도 추고 싶다”면서 좋아했다. 교정 작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변소문’이라고 했던 ‘쩡문’을 ‘사립문’으로 교정하게 된 것도 어머니 덕이었다.
『내 어머니 이야기』의 개정판 출간으로 독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는 김은성 작가. SNS와 커뮤니티,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많은 독자 후기를 휴대전화에 저장해두고 그는 이제 다음 이야기로 나아간다. 어머니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 이야기’보다 자신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작가의 말에 어쩐지 오래 머물게 됐다.
방송 보고 저도 책을 다시 찾아봤어요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나도 독자가 되어 책을 읽는 느낌이다”라고 쓰셨어요. 절판과 재출간 사이의 시간이 어땠을지 짐작하게 하는 말이기도 했어요.
2015년부터 책이 안 나왔어요. 약 3년 정도 책을 못 봤던 거죠. 그 사이 블로그에 독자 분들께서 책을 보고 싶다는 의견을 간간이 올려주시기도 했는데요. 이번에 방송 나오고 생각보다 빠르게, 급하게(웃음) 복간이 되었죠. 한동안 못 보다가 책을 보니까 제가 그린 내용인데도 새로웠어요. 만화 분량도 많잖아요. 저도 쭉 본 것이 아니고, 엄마한테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했던 거거든요. 게다가 제 이야기라면 정확히 기억이 날 텐데 엄마 이야기를 듣고 그린 거라 다시 보니까 저도 막 재미있어요.(웃음) 그래서 독자가 된 기분이라고 쓴 거였죠.
특별히 ‘내가 이런 걸 그렸단 말이야?’라고 생각하셨던 부분이 뭐였는지 궁금한데요.
4권에는 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요.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그렸나(웃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무슨 ‘필’을 받았나 봐요. 되게 세게 그렸다, 다 그렸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고요. 또 오랜만에 보니까 책이 객관적으로 보인다고 할까, 그런 게 있었어요. 엄마가 워낙 얘기를 재미있게 해주시는 편이고, 저도 나름대로 만화로 옮기는 걸 재미있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긴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까 슬픔이나 재미가 많이 느껴져서 굉장히 새로웠어요. 독자 같은 심정으로 봤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에요.
절판된 기간 동안에는 아쉬움도 있으셨을 것 같거든요.
일단 책을 독자들이 만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내 어머니 이야기』 만 계속 생각하고 있진 않았어요. 2014년에 책이 나온 후에 바로 다른 작업에 들어가서요. 계속 작업을 하고 있었거든요.
<알쓸신잡> 방송 전에 김영하 작가님에게 먼저 연락이 왔었다고 들었어요. 연락 받으셨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김영하 작가님이 출판사에 전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출판사가 연락이 안 되니까 저한테 문자를 남기셨더라고요. 아마 제 번호를 찾아서 연락을 주셨던 것 같아요. 일단 김영하 작가님 전화를 받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죠. 방송에 소개를 하고 싶다고, 절판된 것 같은데 책 상황이 어떤지, 이런 저런 말씀을 하셨고요. 정말 감사했어요. 그 전에도 작가님이 재미있는 책이라고 몇 줄 소개한 것을 본 적은 있거든요. 그렇지만 연락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저도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요. 방송을 너무 감동적으로 하셔서 저도 막 책을 보고 싶어졌어요.(웃음) 진짜 방송을 보고 저도 책을 다시 찾아봤어요. 너무 안 보면 안 될 것처럼 말씀을 하셨잖아요. 너무 감사해서 방송 나간 후에 연락을 드렸는데요. 계속 “아닙니다, 아닙니다.”하셨어요. 그렇게 두 번의 통화가 있었죠.
책으로 연결되는 인연 같은 것이 참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그런 것 같아요. 김영하 작가님이 어떤 지점에 울컥하셨는지도 궁금하고요.(웃음) 소개해주신 덕분에 많은 독자 분들이 보셨잖아요. 평도 많이 올려주시고요. 그러고 나서 엄마한테 독자 평을 읽어드렸더니 엄마는 “만화보다 평이 더 좋다”고 하시면서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떤 평을 읽어주셨어요? 기억나는 것 몇 가지만 들려주세요.
출판사 카페에 올라온 평이 있는데요. 작업에 대한 저의 생각과 딱 맞는 말을 남겨주셨어요.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도, 기쁘고 행복한 이야기도 너무 힘주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소홀하지도 않게 다룬 점’이 재미있다고 하셨는데요. 저도 그 생각을 하면서 그렸거든요. 어떤 극적인 장면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도 않는 편이기도 하고요. 엄청나게 극적인 장면이 평범한 사람의 삶에 그리 많진 않잖아요. 다만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그들이 산 역사 자체가 극적이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특별히 극적으로 만드는 데에 별 재미를 못 느낀다고 할까요. 저는 그런 편인데 그걸 딱 읽어주신 거죠. 내 마음을 너무 잘 알고 쓴 글이다, 생각했어요. 또 인터넷 서점에 ‘나의 치졸함을 반성한다’(웃음)는 내용도 있었는데요. 특히 ‘내 이전 세대를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북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왜 추천 도서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부분이 있는데요. 정말 진솔해서 좋았어요.
엄마를 엄청 많이 이해하게 됐죠
어머니께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실 것 같아요.
엄마가 쇠약해지시고, 한동안은 그러셨어요. 그러다 책이 나오고 되게 기운이 나셨어요.(웃음) 춤이라도 추고 싶다고 하시고, 좋아하셨거든요. 교정 볼 때도 사투리 같은 것 물어보면 좋아하시고요. 계속 자는 거 깨워서라도 물어보라 하시면서 적극적으로 얘기해주셨어요. 그렇게 해서 엄마가 교정 본 부분도 있었어요. ‘쩡문’을 ‘변소문’이라고 했었는데 이번에 개정판 작업을 하면서 고쳤죠. 먼저 출판사에서 사립문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작은 나무로 만든 문을 ‘쩡문’이라고 한다고 알려주셨어요. 그래서 ‘사립문’으로 교정을 봤죠. 단어에 대한 정확성은 굉장하세요.
만화 작업을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도 기승전결이 확실하셨다면서요. 타고난 스토리텔러시네요.
친척들이 모이면 엄마가 가운데 앉아 얘기를 하고요. 나머지 친척들은 엄마 곁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듣는 형국이에요.(웃음) 얘기를 재미있게 하시니까요. 기억력도 좋으신 편이고요. 일단은 관찰력이 엄청 좋으세요. 저는 관찰력 제로거든요. 전 상상력이 좋은 편인데 그러니까 엄마랑 궁합이 잘 맞죠. 그렇다고 엄마 이야기가 100% 맞는 건 사실 아닐 거예요. 조금씩 과장되거나 틀린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는데요.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완전히 거짓말을 하시는 게 아니니까요. 엄마가 자꾸 그 얘기를 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다, 생각했죠.
지금 말씀 무척 흥미로운데요. 처음에 어머니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겠다고 생각하셨을 때도 역사적인 사실, 진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네, 팩트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역사적 사실을 알려고 하긴 했죠. 사실을 알아야 엄마한테 질문을 할 수도 있고요. 저는 사실을 아는 게 맞는데요. 엄마가 얘기하는 건 그냥 다 들었어요. 엄청나게 틀린 경우도 별로 없었고, 조금 틀리다고 해도 문제는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엄마가 그걸 얘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엄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렸어요.
그 가운데 어머니가 답하기 싫어하는 질문은 며칠 동안 기다려야 하기도 했잖아요. 또 기다리면 며칠 후에 알아서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했다고요.
슬픈 이야기를 묻거나 하면 그랬는데요. 너무 죄송했어요. 다시 회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잖아요. 그럼에도 만화에 조금 들어갔으면 하는 게 저의 욕심이었죠. “그런 얘기를 왜 물어보냐”고 하시면 더 물어보진 않았고요. 가만히 있었어요. 하지만 “얘기하지 마, 됐어”라고 하고 넘어간 것도 사실은 아니죠. 그러면 며칠 지나면 얘기를 해주셨어요. 딱 결심을 하신 것 같더라고요. 저한테 협조를 해주시려고 했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듣게 된 얘기도 더러는 있었어요.
구체적인 작업 진행 과정이 듣고 싶어요.
엄마 구술을 녹음하고, 메모하면서 진행했는데요. 1-2권 때는 녹음하고요. 3-4권은 못했어요. 너무 힘들어요. 녹취 푸는 게 너무 고된 작업이어서 4권까지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녹음을 40-50개는 했을까요? 우선 사투리를 적어야 했거든요. 제가 ‘스피킹’은 안 되니까 단어가 적절하게 나오지 않아서 연구에 필요했어요. 처음에는 사투리 단어 사전을 만들어서 쓰고 그랬어요. 무엇보다 “~함”, “~했음메”처럼 사투리를 살리는 걸 위주로 했죠.
사투리를 쓰지 않으면 느낌이 나지 않아서 쓸 수밖에 없었어요. 그분들의 정서를 사투리로 안 쓰면 묻어나질 않고요. 일단 저도 재미가 없어서 자연스럽게 사투리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만화를 시작했어요. 고민도 하지 않았어요. 무조건 사투리를 잘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내 어머니 이야기』 작업을 하시면서 어머니와의 관계도 많이 달라졌겠어요.
엄청 좋아졌어요. 제가 엄마를 엄청 많이 이해하게 됐죠. 보통은 엄마랑 같이 살아도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다 안 채로 살진 않잖아요. 그냥 짧은 대화 정도로만 돈 얘기만 하는 엄마 같기도 하고, 결혼만 강요하는 엄마 같기도 하고 그런데요. 엄마가 산 세월을 쭉 들으니까 이해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졌어요. 또 사이가 안 좋으면 작업을 지속할 수가 없어요.(웃음) 사이가 나쁜 상태를 한 시간 이상 지속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요. 어차피 함께 지내는데 엄마랑 사이 나빠서 뭐하겠어요. 그러니까 제가 일부러라도 맞췄죠. 재미있는 게 엄마도 말을 걸면 반드시 풀어졌어요.(웃음) 그렇게 엄마에 대해 많이 알게 되니까 대화가 정말 풍성해지더라고요. 1권 그릴 때는 얘깃거리를 찾아내야 했는데 3권으로 갈 때는 이야기가 넘쳐 나서 쳐내는 게 일이었어요. 그렇게 점점 이야기가 커졌어요. 이제는 제가 엄마 이야기를 알려드려야 할 입장이에요.(웃음)
그래서 처음 계획보다 만화를 더 그리게 되신 거군요? 원래는 전쟁에서 이야기를 끝내려고 했는데 어머니의 현재까지 그리게 됐다고 하셨잖아요.
처음엔 그냥 엄마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시작을 했고, 1-2권정도 생각했어요. 현재 이야기가 나오면 껄끄러운 게 많잖아요. 가족들이나 제 얘기도 나올 테고요. 그런 게 두려웠던 거죠. 피란 정도까지만 그리면 예전에 엄마가 어떻게 살았는지 정리되겠구나,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리다보니까 우선 얘기가 재미있고요. 제가 느끼는 바가 컸어요. 살면서 땅에 다리를 굳건히 두고 사는 느낌 별로 없었는데 얘기를 듣고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 삶이 있구나’를 느끼면서 저도 이상하게 이 땅 위에서 굳건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뿌리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요. 그렇다면 조금 껄끄럽더라도 현재까지 다 그려내는 게 맞겠다, 생각하고 4권까지 그린 거죠. 1권 마치면서 그 생각을 했어요.
여자들의 삶이 도대체 왜 그런 건지
왜 ‘어머니’였어야 했는지 궁금해요. 그 시절을 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아주 자세히 기록했다는 점도 이 작품의 큰 의미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여성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았죠. 엄마가 너무 힘들게 사시는 것도 봐왔고요. 아버지 때문에 너무 힘드셨고, 자식도 많은데 다 건사하며 사는 걸 칭찬받는 게 아니라 시달림을 받으니까요. 너무 억울하게 산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강하게 있었기 때문에 엄마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제 이야기를 하기에는 첫 작업이기도 하고 여러 부담이 있어서요. 무엇을 그릴까 생각했을 때 저절로 엄마 이야기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성의 삶, 그 중에서도 엄마의 삶을 듣는다면 아주 가깝고 정확하게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엄마라고 생각했고요. 여자들의 삶이 도대체 왜 그런 건지, 그려보고 싶었어요.
어머니 이야기가 원래 영상 작업으로 시작되었잖아요. 그러다가 만화로 그리게 된 계기는 뭔가요?
영화를 하려고 했는데 영화는 제작비도 많이 들고 그렇잖아요. 그러다가 만화 관련 회사에 들어갔고요. 그때 만화를 많이 봤어요. 여성주의 만화, ‘데비 드렉슬러’ 같은 작가도 봤고 다른 만화도 많이 보고 그랬는데요. 보니까 만화가 너무 좋더라고요. 만약 엄마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하면 제작비는 물론이고 여러 사람과 협업을 해야 하는데 만화는 내 마음대로 지웠다 그렸다 한다면 훨씬 쉬울 것 같은 거예요. 또 금세 결과물이 나오고요. ‘이런 세계가 있었단 말이야? 그럼 만화로 그려야겠다’ 생각을 하게 됐죠. 그림을 배우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배포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웃음)
『내 어머니 이야기』 에서 작가님께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뭔가요?
오이 냉국인데요. 삼씨를 갈아 넣어서 만드는 거예요. 삼씨가 대마거든요. 그때는 그런 개념이 없으니까요. 삼씨 넣은 오이 냉국을 한 사발씩 먹으면 그 여름 노동에 지친 몸에 막 기운이 나고 마음도 편안해졌다는 거예요. 그걸 먹고 기분 좋아하는 장면인데요. 힘들게 생활하시다가 이렇게 작은 걸로 기뻐하고, 편안해진 장면이 좋아요. 다 그렇잖아요. 엄청난 행운이 굴러들어온 적도 없고요. 크게 기쁜 일이 있었던 적은 없는데요. 생활하시다가 자그마한 것으로 기뻤던 날들이 있죠. 저는 그런 장면이 좋은 것 같아요.
이런 소소한 장면을 그릴 때 작업하는 입장에서도 마음이 좋아졌겠어요.
훨씬 좋죠. 그래서 이제는 어둡고, 힘든 작업을 조금 피하게 돼요.(웃음) 작업을 하는 사람도 좋은 장면을 그리면 너무 힘이 나거든요. 이 책에는 그렇게 기분 안 좋은 장면은 많지 않은데요. 기분 안 좋은 장면은 그릴 때도 기분이 안 좋아서요. 이제 그런 장면은 잘 안 그리려고 생각해요. 대신 꼭 필요하다면 그리되 기분 좋지 않은 장면도 예쁘게 그려야 할 것 같아요. 사실은 그래서 4권에 수정하고 싶은 장면이 있어요. 안 좋지만 꼭 와야 하는 장면이라 해도 그림을 나쁘게 그리는 건 별로예요. 그렇다고 해서 얘기를 못하는 건 아니거든요. 할 얘기는 하되 그림은 상큼하게(웃음) 그려야 할 것 같아요. 4권에 그런 장면이 있어서 좀 덜 바빠지면 빨리 다시 그릴 예정이에요.
4권 맨 마지막 장면, 어머니의 한풀이 같은 장면이 좋았거든요. 혹시 그 장면을 좋아하는 장면으로 꼽지 않으실까 생각했었어요.
<고래가 그랬어> 연재할 때 편집자 분이 그 장면을 꼽은 적이 있어요. 저도 그 장면이 속이 시원하고 좋아요. 그 장면 그릴 때 ‘피나 바우쉬’라는 분의 춤을 봤어요. 되게 원초적이고 속 시원하게 감정을 풀어내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 춤이 많아서 거기서 영감을 조금 받았어요. 그런데 그리다보니까 페이지 배분이 잘못 돼서 조금 더 그려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그래서 짧게 됐어요. 거기서 더 풀어냈다면 속이 시원했을 것 같아요.
작가님은 만화를 늦게 시작하신 편이라서 그 점도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만화의 매력은 뭔가요?
그림은 굉장히 직관적이잖아요. 글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면이 더 많고요. 직관적인 것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도 매력이 있고요. 만화는 그 두 가지를 다 섞을 수 있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제 그림은 아주 단순한 편인데요. 제게는 단순성이 필요했어요. 글도 보고 그림도 보려면 만화가 흑백이어야 했고요. 만화에 너무 많은 요소가 들어가는 건 글에 약간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글과 그림의 조화를 생각하면서 그리고요. 그림은 가급적 복잡하지 않게 그리려고 해요. 그래도 뜻은 다 전달되니까요.
작가님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큼이나 독자가 해석해내는 상상력 부분도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네, 저도 책을 볼 때 그런 여지가 없으면 재미가 없거든요.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저도 그릴 때 글도 많이, 그림도 많이 들어가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아요. 『내 어머니 이야기』 도 글이 많다고 하는 분들이 있지만 이야기의 양에 비해서는 썩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기회가 되길
가족 분들도 이 작품을 다 읽으셨어요?
원래 처음 책이 나왔을 때는 안 읽었고요. 개정판이 나와도 안 읽다가 슬금슬금 가져가서 최근에는 가족들이 다 읽었어요. 오빠는 처음에 “김영하 작가님이 나랑 생각이 좀 다르신 것 같아”(웃음)라고, 재미없다는 말을 하더니 지금은 느끼는 게 되게 많은 것 같더라고요. 사실 언니가 읽을 때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좀 안 좋은 모습인데 내가 만화를 그린다는 이유로 그걸 그려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언니도 읽고는 “그리다 보면 이 얘기, 저 얘기 다 들어가는 거지”하는 거예요. 지금은 관계가 조금 좋아지는 느낌이에요. 가족과도 소통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 답답함 때문에 4권에는 가족 이야기를 좀 그리게 됐는데요. 한편으로는 우리 집안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꼭 개인적인 이야기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어쨌든 만화가 소통의 단초가 된 것 같아요.
개인의 이야기가 결코 개인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실명으로 작업하다보니 신경 쓰일 때가 있긴 있는데요. 피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해요. 앞으로도 실제 일만을 그릴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만약 그린다고 하면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죠. 이런 생각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과거만 그린다면 그것이 의미 있는 만화일까, 하고요. 과거는 아련하고 그립고, 그걸 그려놓으면 아름다운 이야기는 될 수 있죠. 하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와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다만 현실을 사는 사람을 그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여러 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하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작가님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로도 들려요. “그린다고 하면 피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그려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런 것 같아요. 안 쓸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리지 않으면 몰라도(웃음) 어떤 부분을 쓰기 시작하면 피할 수 없는 지점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걸 그리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리든지 아니면 아예 그 얘기를 꺼내지 말든지 해야 할 것 같아요. 타협하거나 물러서려면 안 그리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사실 저는 엄청 재미있어 하면서 작업하는 편이거든요. 물론 엄청 힘들고 진이 빠지는 일이에요. 작업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겨울에도 등 뒤에 선풍기를 틀어놓아야 해요. 굉장히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데요.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해야지, 그냥 형식적으로 그려내는 일을 하려고 그렇게 힘이 들게 하고 싶진 않거든요. 힘이 들면서도 재미있는 일을 하려면 꼭 해야만 하는 걸 하고 싶은 거죠. 그러면 당연히 타협할 수가 없게 되고요.
“언젠가 독자들이 다시 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다는 인터뷰를 봤어요. 이 작품에 대한 확신이기도 할 텐데요.
어느 정도는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엄마가 기억이 좋으실 때 이 작업을 마무리해두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일단 마무리는 해놨던 거고요. 절판이 되었지만 그동안에도 독자 분들의 재출간 요구도 있었고, 다른 출판사에서도 이 책에 대해 좋게 이야기해준 적이 여러 번 있어서 언젠가 힘을 써보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4권에 이 만화를 그리면서 “뭔가 정리가 된 느낌이 든다. 안개가 많이 걷힌 느낌이다. 정리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나 할까.”라고 한 부분이 있어요.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부분이에요.
4권에 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요. 어떤 단초만 보여준 것이고요. 제 이야기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4권 그리면서 하게 됐어요. 마음이 정리가 되더라고요. 사실 그림을 그린 건 엄마가 아니고 저잖아요. 개인이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려면 자기가 그리는 게 사실은 맞아요. 만약 엄마가 자신을 그렸다면 엄마 인생에 대해서도 더 아시고, 더 만족하시게 되셨을 것도 같은데요. 제가 오히려 엄마 이야기와 함께 제 이야기를 조금씩 그리면서 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내야겠다는, 다음 책에 대한 생각이 나오게 됐고요. 그런 의미에서 정리가 됐다고 생각을 했어요.
작가님은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으세요?
엄청 아름다운 작업을 하고 싶어요.(웃음) 재미있고, 담백하고, 색다르고, 황홀하고, 책꽂이에 꽂아만 놓아도 기분 좋아지는 책 있잖아요. 그런 만화 작업을 하고 싶어요.
다시 독자와 만날 기회를 얻으셨는데요. 독자에게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일단 독자 분들의 생각을 알게 되어서 저는 너무 반갑고, 기뻐요. 무엇보다 ‘내 어머니 이야기’보다 자신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 이야기가 정리 돼야 어머니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게 되는 거죠. 자신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는 기회가 되시면 좋겠어요. 저는 좀 늦게 귀 기울인 것 같거든요. 젊었을 때부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굳이 어머니 이야기에 귀 기울이시려거든 한 가지 기술이 꼭 필요해요.(웃음) 취재를 하셔야 해요. 그 취재량이 많아져서 질 높은 질문을 하게 되면 진짜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고요. 그때 달라지는 거지 그냥 평소에 듣듯 들으면 소용이 없어요.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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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김은성 글그림 | 애니북스
개인의 삶은 거대한 역사 앞에서 가볍게 치부되기 일쑤지만 그 개개인의 삶이 모여서 역사가 된다. 그리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와 삶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이 만화는 보여준다.
신연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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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