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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 나왔다. 처음 실물로 노란 책을 받아 든 날엔 손이 떨렸다. 대학 입학 이후 시를 쓴다고 모아온 것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으니까. 나의 독자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맞을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 쑥스럽기 그지 없는 작품들이지만 읽어줄 사람들이 실은 궁금했던 것이다. 반은 기대하고, 반은 떨리는 마음으로 세상에 내 놓은 내 글들이 몇 안 되는 독자라도 만나길 바랐다.
글이 모였으니 시집이 되는 것이지, 하는 덤덤한 마음으로 책을 만들 줄 알았다. 하지만 봐도 봐도 내 시는 성에 차지 않았고, 나는 자질이 없는 것인지를 퇴고 때마다 고민했다. 쓰는 사람이라는 자아는 왜인지 자꾸 허세 같았다. 서점에 늘어선 시집을 들여다 보면 늘 부끄러웠다. 문득 시도 어렵게 헤쳐 나가는 세상에서, 시조를 쓴다는 건 더 외로운 길임을 알고서도 걸어가는 내게는, 어쩌면 도취도 조금은 필요하겠다 싶었다. 그래, 기왕 쓸 책이라면 조금 더 나를 믿고 써 보자.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불안해 하기보다 읽히게 만들자는 마음으로.
시조 협회 회원들끼리는 책 발간 후 각 선생님들의 이름을 써 발송하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인데, 그렇다 보니 내게는 매주 2-3권의 시집이 집에 도착한다. 이 많은 시집들을 퇴근 후 읽어보기란 버거운 일이었다. 어느 때에는 뜯지도 못한 시집이 날로 쌓이기도 했다. 내 이름이 쓰인 시집들을 들고서도 감사하다는 연락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 이렇게 수신만 하는 입장일 때는 몰랐다. 독자가 되어달라는 부름에 기꺼이 응답하는 일만으로도 소중한 인연이 되는 일임을.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그 연락 한 번이 어떤 의미인지를. 누군가의 이름을 써서 봉투에 주소를 쓰고 포장하여 부치는 일은 생각보다 큰 노고인 것이다. 독자가 되어주시라는 바람이 담겨 내게 도착한 책에는 독자가 되어보는 것이 당연한 예의였음을. 매일 도착하는 선생님들의 문자와 메일에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예의를 지키지 못했던 나에게 표현해 주시는 독자로서의 마음들이 감사하고 꽤 많이 위로가 되어서 또 힘이 난다. 마지막 20대를 건너는 와중의 첫 시집은 이리도 내게 깨닫지 못한 것들을 깨우며 다가온다.
개별적 존재로서의 독자는 언제나 작품 다음에 태어난다. 작품이 곧바로 독자를 태어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를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작품이 있어야 한다. 독자가 되려면 읽어야 하고, 읽으려면 읽을 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이끌리고 무엇에 흥분하는지 말할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이승우, 『소설가의 귓속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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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용기 내어 연락처를 뒤져보고 있다. 오랫동안 닿지 못한 친구들에게 시집을 전한다는 핑계로 연락 해 보기로 하면서. 그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노라고 전하면서 당신의 안부를 물어보자고. 그들의 이름과 사인을 써서 포장한 뒤 주소를 적는 수고를 해 보자고. 생각나는 사람들은 예상보다 많았고, 그 중에는 왜인지 어색하게 멀어져 몇 년 간 연락을 하지 못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지나치기엔 아까운 관계들을 한 번 더 두들겨보기로 했다.
대부분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면서 간간이 SNS를 통해 나의 소식을 보면서 잘 살고 있구나 했었다고 반가이 맞아주었다. SNS로 연결 되어 있지 않았던 친구들에게서도 곧 만나자는 (어쩌면 기약 없을지라도) 약속으로 연락을 마쳤다. 그러나 지난 내 자존심 혹은 서로의 오해로 멀어진 친구로부터는 마음만 받고 언젠가 서점에서 찾아 읽어 보겠다는 느슨한 거절을 받기도 했다. 용기를 내는 덴 상처도 어느 쯤 뒤따라온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왜인지 섭섭해지는 씁쓸한 마음을 잡고 그 친구와의 시간들을 한 번씩은 돌아보았다. 그럴 수도 있지, 서로 모를 상처가 아직 남아 있다면.
우편을 발송하고 나면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아, 실은 보내는 데에서 나의 할 일은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주소를 물어 내 손으로 쓴 이름들에게서 받았노라는 연락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건 내겐 아직 어려운 일이다. 읽어 준다면 더 좋겠지만, 바람은 수신 확인까지만. 시집을 빌미 삼아 이어 붙인 인연이란 그렇게 한 번 더 연락이 닿으면 된 것이다.(고 생각하려 노력한다. 아직 내려놓기를 완연히 하진 못하는 사람이라.)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알려준 사람이 나이다. 나는 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 사람은 보통 떳떳하지 않은 어떤 일,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기의 속성을 다른 사람에게는 감춘다. 적어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피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그가 아는 것만큼 그를 알지 못하고, 그가 자기에게 그런 것만큼 믿을 수 없어 하지는 않는다.
-이승우, 『소설가의 귓속말』 중
어떤 친구는 보내기도 전에 사서 보고는 밑줄도 그어가며 읽었다며 내게 책을 보여주었다. 나의 ‘첫’을 또 열렬히 응원 해 주었다. 또 어떤 친구는 읽어보려 노력하고 있지만, 시를 가까이 하지 않던 자신에겐 어렵다고 솔직하게 얘기하기도 한다. 해설까지 다 읽고서는 정말로 이렇게 생각하고 썼던 게 맞는지 물어보는 친구들과는 ‘출간 비하인드 스토리’를 얘기하기도 한다.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건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담긴 행동이다. 그래서 특별하지도 않은 나에게, 독자가 되어 함께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에게는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가까이 지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더 응원을 받기도 한다. 멀리서 나를 지켜보던 사람들과도 그래서 연이 닿는다. 새로이 시작되는 이 관계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렇게 관계의 반경이 또 바뀌는 시기가 되었구나 싶기도 하다. 말하고 싶은 사람(작가)에게는 들어주는 이(독자)가 필요한 법이다. 친히 독자가 되어준 나의 사람들에게, 나도 기꺼이 그의 독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출간 이후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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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저 | 은행나무
스물 셋에 등단해 40여 년을 한 가지 일에 매달렸던, 즉 ‘쓰는 자’의 삶을 택했던 그가 그 오랜 시간 글을 쓰면서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그리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놓았다.
이나영(도서 PD)
가끔 쓰고 가끔 읽는 게으름을 꿈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