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 칼과 권총을 들고 사람들을 해치는 젤리에 맞서는 여성 영웅의 이야기. 넷플릭스의 <보건교사 안은영>(2020)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드디어 공개되었을 때, 플레이 버튼을 클릭하자마자 큰 소리로 웃었다. 이경미 감독(이하 이경미)은 드라마 시작 2분 만에 주인공 안은영의 엄마를 말 그대로 녹여버렸다. 타협 없는 영화적 세계, 이경미 월드가 다시 시작됐다.
‘여자 - 사람’들의 세계
지난 20년간 한국상업영화에서 인간의 설정값은 대체로 남자였다. 서사의 주요 동기부여자로 시선의 힘을 쥐고 스크린을 장악했던 남자들. 이 사이를 비집고 나와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경미 월드의 특별한 점은 인간의 설정값이 여자라는 점이다. 그건 “여자가 주인공이다”라는 말과 다르다. 여자가 주인공이라도 여전히 낡고 타자화된 프레임 안에 갇혀 있는 경우는 많다. 이경미의 영화에서 여자는 개성을 가지고, 각종 스테레오 타입을 깨며, 욕망을 드러낸다. 유독 여자들의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자 캐릭터가 남자와의 관계 안에서 규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경미에게 ‘사람’이란 ‘여자’인 것 같다고, 종종 생각했다.
<잘돼가? 무엇이든>(2004)에서부터 장편 데뷔작 <미쓰 홍당무>(2008), <비밀은 없다>(2016), <아랫집>(2017), 그리고 <러브세트>(2018)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에는 온갖 이상한 여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아귀가 맞지 않는 행동을 이어간다. 그건 이경미가 보는 인간의 내면, 인간의 욕망이 매끈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쓰 홍당무>의 미숙(공효진 분)이 수학여행 사진에 찍히기 위해 최선을 다해 점프하는 순간처럼, 빛나기를 꿈꾸는 자가 한없이 초라한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면서 만들어내는 아이러니가 이경미식 골계미의 요체였다.
인간의 얼굴을 여자로 그리면서, 이경미는 여자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그의 영화 속에서는 늘 두 여자가 만나고 얽히고 꿈틀거린다. 남자들은 그런 관계의 장을 열어주고 사라진다. <잘돼가? 무엇이든>에서 두 여자 지영(최희진 분)과 희진(서영주 분)이 가까워지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사장은 이경미 월드가 선보이는 남자 캐릭터의 원형과도 같은 존재다. 두 ‘여직원’에게 탈세를 위한 서류 조작을 지시하는 이 남자는 얼굴 없는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그는 엿같은 세계를 결정짓는 노동의 조건일 뿐, 인격이 부여되지 않는 셈이다. 그런 사장에게 잘 보여야만 하는 말단 ‘여직원’인 두 사람은 갈등하고, 경쟁하고, 그러면서도 협업하는 끝에, 마침내 손을 잡는다.
이경미가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여자들은 서로를 구제한다. 구제(救濟). <보건교사 안은영>의 옴잡이 백혜민(송희준 분)의 위장에 새겨져 있던 말이다. 타인을 어려움에서 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단어는 <보건교사 안은영>을 관통하는 주제어이기도 하다. 은영(정유미 분)이 젤리를 제거하듯 혜민이는 옴을 먹는다. 사람을 돕고 구하는 사명을 가진 여자-사람인 은영과 혜민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다. <미쓰 홍당무>의 미숙과 종희, 그리고 <비밀은 없다>의 진이와 옥이가 그랬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본다.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지만, 타고난 소명을 회피하거나 돌아갈 수 없다.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은영은 혜민의 위 절제술을 돕고, 영원히 반복되는 굴레로부터 그를 구원한다.
중학교의 ‘왕따 교사’ 미숙의 영웅 버전이기도 한 안은영은 <비밀은 없다>의 연홍(손예진 분)이 하고자 했지만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낸다. 딸 민진(신지훈 분)을 땅에 묻어야 했던 연홍과 달리 은영은 목련고 학생들이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안전하게 구해낸다. 씨발씨발 욕을 입에 달고 있지만, 은영은 타인을 생각하고 선한 일을 하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어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영은 지금까지의 이경미의 여자들과도 또 조금 다르다.
사랑으로, 구제하다
이경미 영화는 남성을 중심에 놓는 사회에서는 은밀한 곳으로 숨어 잘 드러나지 않는 여성 간의 퀴어한 관계를 그린다. <잘돼가? 무엇이든>의 지영과 희진의 맞잡은 손과 <미쓰 홍당무>의 미숙과 종희의 맞댄 등은 ‘퀴어 커플 탄생 장면’으로 해석되었고, <비밀은 없다>와 <안은영>은 진이와 옥이, 혜민과 래디의 연애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잘돼가? 무엇이든>와 <미쓰 홍당무>의 경우 “이렇게 하면 퀴어로 보이겠다는 ‘작전’을 짜고 쓴 건” 아니었다.
“두 영화는 만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만나서 좋아지는 이야기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좋다. 그런데 또 ‘남자랑 여자가 만나서 안정감을 느낀다, 무언가가 완성된다’는 류의 이야기에 크게 설득된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쓰게 된 이야기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퀴어적으로 읽혔던 건, 그의 작품의 중심에 여자들 간의 친밀성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 친밀성의 밀도는 강렬하다.
논란이 되기도 했던 <러브세트>는 친밀성을 넘어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를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였다. 아이유(이지은 분)는 자신의 선생님이자 아빠의 애인인 두나(배두나 분)가 아빠와 결혼하는 것이 싫다. 어느 날 테니스 장에서 만난 두나와 아이유는 “아빠와의 결혼”을 건 한 판 승부를 시작한다. 결과는 두나의 완승. 하지만 두나는 아이유에게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격렬한 섹스와도 같았던 테니스 경기를 통해 자신을 향한 아이유의 마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영화의 끝, 스치는 두 사람의 손끝에서 우리는 아이유의 사랑이 아빠가 아닌 두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섹스!(FUCK!)”라고 외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육체적 생동감과 성적 에너지에 주목하게 된다. 대중문화에 재현된 카메라의 남성화된 시선과 여성 신체의 성적 대상화에 대한 논쟁이 한참 뜨거웠던 2018년, 영화는 스스로 이 논쟁을 껴안고 뒤틀었다. 남자들이 무기력한 구경꾼이 되어 버린 이 테니스 코트에서, 주인공은 여자들이었다. 과감한 시도였다. 테니스 스커트를 입은 아이유와 두나가 거친 숨을 내쉰다. 아이유의 입 주변으로 고이는 자두의 과즙과 깨진 무릎에서 흐르는 피는 그의 욕정과 첫 섹스를 은유한다. 영화는
“나에 대한 기대를 배반하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러브세트>에서 하고 싶은 것이 있었고, 피하고 싶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를 의식하면서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둘 수는 없었다.”
섹슈얼리티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여성 신체를 안전지대에 놓으려 하기 보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여성의 힘으로 전유하는 시도가 <러브세트>에서 펼쳐진다. 그렇게 등장하는 배두나의 신체는 압도적이고, 그가 틀어쥐고 있는 시선의 힘은 강인하다. 이지은의 얼굴에는 그가 배우로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은밀한 욕망이 떠오른다.
이경미는 덧붙였다. “그렇게 아름다운데, 왜 가려야 하죠?”
“부족한 남자”와의 새로운 파트너십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타협이 없더라”라고 말했을 때, 이경미는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늘 여자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어왔다. 이번에는 그런 파트너십이 또래의 남자로 바뀌었고, 그건 일종의 타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설득이 되지 않으면 쓸 수도, 찍을 수도 없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은영의 남성 파트너인 홍인표(남주혁 분)의 캐릭터에는 어떻게 설득되었을까.
“부족한 두 사람이 만난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관계가 이해되었다. 홍인표는 다리가 불편한 걸 숨기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이 포인트가 아니라, 그걸 숨기려 한다는 것이 포인트다. 은영이도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싶어한다. 두 사람이 만나서 굉장한 힘이 생긴다. 그것이야말로 판타지인데, 그 판타지에 설득이 됐다.”
이경미 월드에 등장하는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좋은 남자-사람’인 홍인표는, 이경미에겐 또 다른 도전이었을지도 모른다. 홍인표 이후의 이경미 월드. 궁금해진다.
인간 내면의 달고 짠 모습들을 두루 탐구하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람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해온 것 같다”고 이경미는 말했다. 문득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는 말이 떠올랐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소수자 인권이나 노동권 문제 등 사회적 이슈를 말할 때 편을 정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경미가 말하는 ‘사랑’이 말랑말랑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 사랑은 우리의 몸에 파고들어 형질 자체를 바꿔버리는, 하트 젤리와도 닮았다. 반짝반짝 예쁘지만, 기어코 치명적인.
* 지금까지 <손희정의 더 페이보릿>을 사랑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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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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