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요청하는 장르에는 시대상이 있다. 문학동네의 ‘총총’ 시리즈는 바이러스가 이토록 오래 우리를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을 미처 예감하지 못할 때 기획됐다. “저는 선생님의 사랑편지가 느끼합니다!”(『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이하 『우사오』 17쪽)라면서도 “선생님이 살아 있는 게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우사오』 112쪽)라고 쓰는 이슬아와, 이 편지의 기꺼운 수신자로서 “우리가 먼 길을 걸어 무엇인가를 같이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 기쁩니다”(『우사오』 225쪽)라고 응답하는 남궁인과, “제가 만들었지만 노래 따위로 뭘 어쩌자는 건지 싶네요”(『괄호가 많은 편지』, 이하 『괄많편』 164쪽) 하고 주저 없이 무너져 내리는 이랑과, 그 마음을 “어떤 존재를 너무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제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감당하지 못할 일 같습니다”(『괄많편』 48쪽) 하며 안아주는 슬릭의 편지를 읽으면서 우리는 더 이상 속마음을 숨기기 싫고, 어서 빨리 답장을 쓰고 싶다.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전부터 좋아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못하고 살았잖아요. 만나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마음을 감춰야 하는 시대에 어떻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을까? 그 끝에 편지가 있는 것 같아요.”
‘총총’의 기획자 이연실은 문학동네에서 15년 동안 책을 만들어왔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걷는 사람, 하정우』, 『김이나의 작사법』,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 등을 기획하고 편집하면서 모든 사람이 언젠가 나의 책이 될 수 있다는 에세이의 진실을 배웠다. 스스로를 인정하게 한 책으로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꼽는다.
“이 책은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기 전에 출간됐어요. 그럼에도 내내 확신이 들었어요. 그런 책들은 결국 존재 가치를 증명해내더라고요. 이 책을 만들면서 스스로에게 ‘뭐든 해도 된다’고 허락하게 된 것 같아요.”
신예 이자영은 ‘총총’에서 젊은 심장을 담당했다. 특히 『괄많편』에서 이자영의 당사자성은 즉각적으로 발휘됐다.
“차별금지법 이슈를 주고받은 편지가 기억에 남아요. 갈등을 피하고 싶은 마음과 나는 피하지 않겠다는 선언, 양쪽을 모두 끌어안고 싶어졌죠. 그런 게, 편지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총총’ 시리즈가 책으로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연재 플랫폼이라는 무대 위에서 펼친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 이슬아×남궁인, 이랑×슬릭으로 묶인 두 2인 3각 조는 각각 2주에 한 통씩 편지를 보내고 받았다. 이슬아×남궁인 조가 무대에 올린 작품이 선택한 음향은 ‘챙챙’에 가깝다. 이슬아는 ‘남궁상’이라든가(남궁인이 아니라), ‘까르보나라적 문장’ 같은 말로 쉴 새 없이 수신자에게 강펀치를 날린다(이 펀치는 훗날 ‘까궁인’이라는 원초적 별명을 낳았다).
그럴 때마다 남궁인은 친절한 변호와 가만한 질문으로 맞선다. 아마도 가늘고 길 2개의 칼 끝은 서로 다른 강도로, 그러나 반드시 부딪힌다. 이랑×슬릭 조의 무대는 ‘괄호’를 닮았다. 마치 쓴 물까지 게운 후에 어두운 방안에 누워서 하는 토로처럼, 두 팔을 괄호 모양으로 뻗어 서로를 안아주는 뜨겁고 고요한 대화를 독자는 거의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이슬아가 남궁인의 지난 편지를 조목조목 해체한 후 그 증거로 통계를 들이민 마지막 편지와 남궁인의 마지막 응답에 달린 후기는 난타전에 가까웠다. 독자는 이슬아의 산뜻한 불호령을 좋아하는 쪽과 남궁인의 느끼한 친절을 좋아하는 쪽으로 갈렸다. 결국 가장 많은 후기는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였다.
두 권의 서간 에세이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15년 차 편집자 이연실의 오랜 원칙 하나가 깨졌다.
“공저 책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요조·임경선 작가의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를 만들면서 어렴풋이 느낀 두 사람이 함께 쓰는 글의 매력을 ‘총총’은 뜨겁게 알려줬어요. 서간 에세이는 ‘2인분의 글’이라고 생각해요. 이슬아 작가의 말대로 편지는 나를 떠나서 너한테 갔다가 나한테 다시 돌아오는 장르잖아요. 자신을 넘어 상대를 생각하면서 작가는 쓸 수 있는 영역을 자신도 모르게 넓혀나가요. 그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면이 나오고요. 『우사오』의 이슬아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거예요. 『괄많편』의 저자로 슬릭 작가님을 섭외할 때의 마음은 반반이었어요. 책을 내본 적 없는 사람이라 신선함이 기대됐고, 한편으로는 이 사람의 새로움이 이랑 작가의 새로움을 꺼내 무언가 멋진 일을 일으킬 것 같기도 했죠.”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게다가 몸 곳곳에 문신을 새긴 교차 페미니스트 국힙 원톱 래퍼는 편지를 쓸 때면 엄청나게 귀여워진다.
‘총총’ 시리즈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두 편집자는 두 사람의 문학을 최대한 오래 이어가려고 한다. 남궁인 작가가 쉰 살이 될 때, 이슬아×남궁인의 편지 대결을 다시 한번 벌이기로 구두 계약했으므로 적어도 11년 후까지는 이어질 것이다. 이제와 밝히는 ‘총총’ 시리즈의 시작은 『채링크로스 84번지』다. “저자 헬렌 한프는 평생 뉴욕에서 글을 썼지만 그리 많은 명성을 떨치지는 못했다”라고 시작되는 저자 소개의 주인공인 작가가 런던의 헌책방 관리인과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이 책은, 1970년 출간돼 그녀의 운명을 바꿨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의 편지는 우연히 발견돼 책이 되었다고 한다. 편지가 만든 우연은 자주 무엇이 된다. 이슬아는 지독하게 신랄했던 마지막 편지를 이렇게 맺는다.
“우리의 우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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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