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피렌체 & 독일 뮌헨
『바깥은 여름』, 『안녕, 돌멩이야』
비행기를 놓쳤다. 3주간의 이탈리아 출장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귀국 편이었는데 앞선 비행기의 연착으로 경유지인 '독일 뮌헨'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환승 시간이 50분 남짓인 항공표를 끊을 때부터 이런 순간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행 커뮤니티에서만 보던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제야 여행이 제대로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사실 출장을 떠날 때는 일정과 동선, 그리고 혹시 모를 대안을 사전에 촘촘히 계획하므로 변수라고 부를 만한 일은 그다지 생기지 않는다. 오늘 오전에 예정했던 일정을 교통이나 기상 상황으로 내일 오후로 조정하는 정도랄까. 이번 출장은 이탈리아 남부 도시 '바리'에서 진행되는 전시의 기획을 회사에서 갑작스레 맡으며 순식간에 결정되었다. 이탈리아행 비행기를 타는 김에 『슈퍼마켓』 3호 취재도 강행하기로 했다. 『슈퍼마켓』은 시장을 매개로 도시의 문화를 읽는 여행 도서 시리즈인데 코로나19 때문에 잠정 중단되어 2020년 이후 신간을 내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3호 도시는 '피렌체'로 정했고 바리에서 1주일, 피렌체에서 2주일의 출장 일정을 소화했다. 독일 뮌헨에서 환승만 잘하면 집에 갈 수 있었는데 피렌체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늦게 뜨면서 뜀박질 한 번 못해보고 연결편을 놓친 것이다.
항공사에서 마련해준 호텔에 저녁쯤 도착해 그 다음 날 아침 다시 뮌헨 공항으로 돌아와야 했으니 반나절 정도밖에 여유가 없었지만, 호텔 근처 동네를 산책하며 이탈리아와는 확연히 다른 독일의 서늘한 날씨를 만끽했다. 독일 땅을 밟아본 게 처음이라 하룻밤이지만 낯선 도시의 풍경에 설레었다.
귀국이 유예되자 우습게도 하루를 공으로 벌은 듯한 기분에 출장 내내 들고 다니기만 했던 책도 잠깐 읽었다. 위탁 수하물로 부친 짐은 유럽 공항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었고, 휴대한 짐이 얼마 되지 않아 호텔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출장이나 여행 갈 때 보통 한두 권의 책을 챙겨 가는데 무선 제본에 구하기 쉬운 단편 소설집이나 에세이집 중에 고른다. 타지에서는 긴 시간 집중해서 독서할 환경을 찾기 어려워 짧은 단위로 끊어 읽을 수 있고 들고 다니기 가벼운 책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잃어버리거나 여행지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손쉽게 선물하더라도 한국에서 금세 또 살 수 있는 책이라면 더욱 부담 없고 좋다.
이번에는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을 챙겼는데 몇 해 동안 그대로 책장에 방치한 책이었다. 햇볕이 뜨거운 이탈리아에 잘 어울리는 제목처럼 보여서 출국 전날 즉흥적으로 골랐다. 책에는 각자의 사정으로 태국으로, 스코틀랜드로 떠나는 여러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집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날 떠나가고, 헤어지고, 서로 멀어지는 이야기를 읽자니 역설적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이 곱으로 드는 한편, 이번 출장의 인상적인 순간을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인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통역가가 출장 일정을 동행하다 보면 여기가 해외인지 한국의 소 도시쯤에 와 있는지 사실 실감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그러다가 비행기 연착처럼 예측하지 못했던 순간을 마주하면 비로소 현재의 시공간을 오롯이 느끼고 새로운 즐거움을 발견하는 듯하다. 피렌체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 '두오모'도 아니고, '우피치 미술관'도 아니고, 저녁 식사가 끝나 무수히 많은 잔과 접시가 널려 있던 테이블이다.
『슈퍼마켓』 인터뷰이 중 하나로 식당을 운영하는 분을 만나 저녁을 대접받았는데, 늦은 오후 그 식당을 들어설 때만 해도 그날의 식사 자리가 자정을 넘겨 끝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전채부터 디저트까지 5시간 가까이 식사가 이어졌고, 맛있는 와인을 실컷 마시며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역 음식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전채 메뉴 중 '크로스티니 토스카니(crostini toscani)'가 인상적이었다. 닭 간으로 만든 파테를 빵에 올려 먹는 음식인데, 담백하고 고소하며 감칠맛까지 있어서 전채만으로도 배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식당에서 틀어준 음악도 모두 좋아 따로 물어보고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하기도 했다. 눈과 입 그리고 귀까지 확실히 호강한 날이었다. 다음 날 일정이 걱정되어 무턱대고 식사 초대를 거절했다면 이렇게 행복한 저녁 시간은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바리' 일정 마지막 날에 잠깐 자유 시간이 생겨 서점에 들른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어떤 도시든 새로운 곳에 가면 동네 서점을 찾아보는데, 서점에 들르면 이곳에서는 어떤 장르가 인기인지 대번에 알 수 있고, 서점의 큐레이션 방식도 나라마다 달라서 비록 언어가 생경해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돌아보다 『Ciao Sasso』라는 동화책을 하나 샀다. 돌멩이와 아이의 대화를 담은 책으로 한국에 『안녕, 돌멩이야』로 번역, 출간되었다. 그림이 마음에 들었고 이탈리아 출신 작가의 저서라 더 좋았다. 해외에서 책을 고를 때는 되도록 원서를 사려고 한다. 그곳에 다녀왔음을 추억하는 일종의 기념품 역할도 기대해서 굳이 원서를 찾는 것 같다. 출장 중 저녁마다 이 책을 가끔 들춰보며 번역기 앱을 이용해 한 줄씩 읽었다.
27시간의 대기 끝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침내 인천행 비행기를 탔을 때, 코로나19로 잊고 지냈던 여행에 대한 감각이 그제야 돌아왔음을 느꼈다. 예측 불가능한 순간을 마주하지 못했다면, 그 순간을 그대로 즐기지 못했다면, 그때를 곱씹을 여유를 갖지 못했다면, 이 감각을 떠올리는 데 아마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일상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의 묘미임을 오랜만에 기억해 냈다. 다시, 여행 가고 싶다.
*장유진 『의자와 낙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을 편집했고 여행 도서 시리즈 『슈퍼마켓』을 다양한 사람과 함께 만든다. '전시공간 리플랫'의 큐레이터로도 일하며 주인공보다는 그 옆 사람을, 주요 사건보다는 그 뒷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좋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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