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바쁘게 사는 것 같은데 일상은 똑같다. 남들이 좋다는 곳도 가보고 재밌다는 걸 봐도 예전만큼 흥미가 생기질 않고 별 감흥이 없다. 여기에 더해 어느덧 30대 중반을 넘어서니 새로운 걸 경험할 기회마저 점점 줄어든다. 모아뒀던 영감은 통장 잔고처럼 바닥을 보이는데, 매달 들어오는 월급처럼 영감도 다달이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분들을 위해 국가대표 카피라이터 정철의 『영감달력』이 출간되었다. 재미도 새로움도 감각도 떨어져 가는 35세 이상의 독자들에게 36.5년 차 카피라이터이자 십수 년간 책을 써 온 저자가 '내가 봐도 잘 쓴 글' 365개를 뽑고, 그 글이 주는 인사이트를 놓치지 않도록 '새로 쓴 질문'365개까지 풍성하게 담아냈다.
『영감달력』이라는 제목이 독특하고 재미있습니다. 왜 35세 이상을 위한 책인지 그 이유도 궁금한데요, 짧고 굵게 책 소개 부탁합니다.
영감이라는 녀석은 형체가 없으니 알아보기 힘듭니다. 영감이 내 앞을 스쳐지나가도 녀석을 못 알아볼 때가 허다합니다. 아깝고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래서 영감에게 글이라는 옷을 입혀 만나게 해 드리자 생각했습니다. 글은 형체를 갖고 있으니까요. 매일 다른 옷을 입은 영감이 365개. 그래서 영감달력. 35세 이상을 위한 책이라 규정했는데, 그 나이를 넘어서면 영감이 빠르게 소진되고 관성에 몸을 맡기며 살기 쉽잖아요. 1년 내내 한 가지 옷만 입는다고 할까요. 재미없고 지루하지요. 그런 삶을 흔들어 뒤집는 책. 하루 한 번은 관성에 저항할 용기를 주는 책.
이번 책은 지금까지 쓰셨던 책과 달리 이미 쓰셨던 문장들을 다시 꺼내 고른 'Best 앨범' 같은 책이라 들었습니다. 이번 책을 기회로 쓰셨던 글을 다시 살펴보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글도 그렇고 책도 그렇고 나이를 먹으면 조금씩 뒤로 밀려납니다. 새로운 글이 매일 쏟아지니까요. 작가는 뒤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또 새로운 글, 더 새로운 글을 생산해 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내 글이 내 글을 덮어 버리는 상황이 반복됩니다. 지난 15년이 그런 시간의 연속이었지요. 문득 뒤돌아보면 저 멀리서, 나 아직 살아 있어요! 하며 손짓하는 글이 보입니다. 나도 그들에게 손짓하고 싶었습니다. 내 새끼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우려먹는 책이라 했고 용기가 필요했던 책이라 했습니다. 책이 출간된 지금은 용기 내기를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영감달력』에는 작가님의 베스트 카피와 글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말을 거는 새로운 질문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을 더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동안 짧은 글을 쓰려고 애썼습니다. 한두 문장으로 강한 울림을 주는 글을 쓰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글의 압축에 늘 신경을 썼고, 때론 그것이 아쉬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할 말을 다 못한 느낌이랄까요. 물론 그 말은 행간에 넣어 뒀지만 행간은 작가 의도랑 다르게 읽힐 수도 있으니까요. 이번 책에선 행간에 넣어 둔 이야기를 다 꺼냈습니다. 압축을 풀어 질문 형태로 만들어 글 아래에 달았습니다. 질문은 작가 생각이 아니라 독자 생각을 흔들어 깨우는 데 도움을 줍니다. 글이 주는 영감을 흘리지 않고 내 것으로 꽉 움켜쥐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질문 365개를 쓰는 것도 쉽지는 않더군요. 새 글 365개를 생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만큼.
연필 들고 영감 만드는 일을 오래하다 보니 흰 수염 영감이 되어 가고 있다고 자기소개를 해 주셨습니다. 무려 35년 이상 카피라이터로 작업해 올 수 있었던 작가님만의 습관이나 루틴이 있으신가요?
새벽에 눈 뜨면 눈곱만 떼고 바로 작업실로 향한다. 처박힌다. 커피 한 잔이 내 곁에 앉는다. 연필을 든다. 무엇을 쓰겠다는 생각이 없어도 연필을 든다. 쓴다. 쓸 것이 없어도 쓴다. 커피 한입 입에 물고 쓴다. 왜 썼는지 나도 모르는 단어 하나를 쓴다. 문장 한 줄을 쓴다. 쓰다 보면 쓸 것이 하나둘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내 책상 위를 뛰어다니며, 제발 나를 써 주세요, 애걸복걸한다. 됐다. 쓴다. 이것이 내 루틴입니다. 『영감달력』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장이 나를 다 설명합니다.
"영감은 떠오르는 게 아니라 쓸고 닦고 뒤집어엎으며 찾는 것입니다."
바쁜 일상에서 쉽게 영감을 채우는 방법이 있을까요? 작가님의 영감 충전 비법을 들려주세요.
쉽게 영감을 채우는 방법, 나는 모릅니다. 자,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 영감을 얻는 방법을 말씀드립니다. 관찰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사물이든 현상이든 그것에서 영감을 발견하려면 뚫어지게 관찰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뚫어질 때까지. 관찰하는 그것에 뻥 구멍이 뚫릴 때까지 관찰해야 합니다. 구멍 뚫리는 그 순간이 발견의 순간입니다. 발견의 순간은 희열이지만 관찰의 시간은 고통입니다. 피곤하고 지루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견디지 않으면 발견은 없습니다. 영감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뚫어지게 관찰하여 딱 한 번만 구멍을 뚫으십시오. 그 경험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때부터 자신감이 붙을 것입니다. 관찰이 슬슬 재미있어질지도 모릅니다. 눈에게 일을 시키십시오. 영감은 머리가 주는 게 아니라 눈이 주는 것입니다.
『영감달력』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은지, 독자들이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작가님 생각이 궁금합니다.
달력은 달력답게 써야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 아침, 크리스마스 달력을 펼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책엔 365개 글이 있습니다. 365개 질문이 있습니다. 365개 영감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이들을 놓치지 않고 다 만나려면 1년에 걸쳐 읽어 주십시오. 물론,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압니다. 책이 재미있어 책장 넘기는 손이 참지 못할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하나씩만 읽어 주십사 부탁하는 이유는, 한꺼번에 수십 개 영감이 밀고 들어오면 어느 하나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감과 영감이 싸우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루 하나가 정 어렵다면 둘이나 셋까지만. 그 이상은 욕심 내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작가님의 신작을 기대하고 기다려주신 독자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내게도 애독자라는 사람이 있다면 정철 지음이라고 적힌 책을 여러 권 갖고 계시겠지요. 신작 나오면 또 구입해야지, 기다렸던 분도 있겠지요. 그런데 신작이 신작이 아닙니다. 이미 책꽂이에 꽂힌 글을 또 만나라 합니다. 그런 분이 있다면 대화를 생각해 주십시오. 정철과 당신의 대화. 당신 책꽂이에 꽂힌 정철은 당신 귀에 대고 혼자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엔 새로운 질문이 365개. 정철이 묻고 당신이 대답하고. 대답하다 보면 당신이 당신 자신을 조금 더 알게 되고, 조금 더 이해하게 되고, 조금 더 사랑하게 되고. 이런 경험이 당신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영감으로 자리 잡고. 이런 바람을 담은 책입니다.
*정철 오전엔 카피라이터. 오후엔 선생. 저녁엔 작가. 연필 들고 영감 만드는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서서히 흰 수염 영감이 되어 간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지금은 정철카피 대표, 단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초빙 교수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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