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용준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저는 지금 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벨트를 매고 좁고 작은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구름과 별을 봅니다. 엔진 소리에 둘러싸여 어둠을 통과하는 느낌은 참으로 기이하군요. 몸과 마음이 속절없이 어둠과 소리에 적셔집니다. 별생각이 다 들고 온갖 기억이 떠오르네요. 평소엔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이 다채롭게 느껴지는 걸 보니, 긴 밤을 나는 경험은 인간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키나 봅니다. 바닷속을 뚫고 나아가는 것. 차가운 우주를 하염없이 떠다니는 것. 어쩌면 거대한 동물의 위장 속에서 서서히 소화되는 것도 이런 느낌이 아닐지.
저는 지금까지 썼던 편지를 멈추고(그 작가에게는 언젠가 어떤 날 반드시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 다시 작가님께 편지를 씁니다. 몇 번이고 쓰려 했지만 포기했고 포기됐던 편지를요. 어째서인지 작가님은 편지를 원치 않는 것 같고, 어쩌면 이 편지는 닿을 주소가 없어 '수취인 불명' 붉은 도장이 찍힌 채 제게 돌아올 수도 있겠죠. 그러나 쓰려고 합니다. 많은 편지는 받는 이를 위한 것이 아닌 쓰는 이를 위한 것이니까. 수신자에게 닿지 못함에도.
두 번째 편지네요. 예전에 보냈던 편지 기억하시나요? 8년 전 작가님의 『개인적 기억』을 읽고 서평을 써야 했는데, 그 지면에 팬레터를 썼죠. 당시에 저는 작가님의 소설을 너무 좋아해서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특히, 문지문학상 수상작인 「루카」는 지금도 그 좋은 마음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어요. 저는 주인공 '루카'를 소설에서 만난 허구의 인물이 아닌 몸과 마음을 써서 직접 겪은 사람이라 믿고 있거든요.
"너는 루카다. 내가 딸기인 것처럼. 오직 하나뿐인 진짜 이름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작가가 소설에서 하는 일이라는 건 인물을 있는 모습 그대로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 아닐까. 모습에는 여러 면이 있고, 모습 안쪽에도 비밀과 세계가 있으며, 작가가 아무리 애쓰고 상상해도 결코 알 수 없는 내력도 있을 테니, 알게 된 것들은 성실히 쓰되 모르는 것은 '알 수 없다.'라고 쓰자.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은 어느 밤. 쓰고 싶어, 쓸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지만, 인물이 그저 하얗고 까맣게만 보일 때 종종 작가님 생각을 합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이해하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고 하셨죠. 건강하지 않은 것들을 보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도 하셨고요.
"전신 마비로 병실에 누워 있는 형국일 때 탈출할 방법은 언제나 엄지발가락(=첫 문장)부터 고통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뿐이며 다른 쉬운 지름길은 없다는 것."
영화 <킬 빌>을 보면서도 글쓰기와 연관 지어 생각하시는 것이 좋아서 저는 지금도 빈 문서 앞에 앉아 있을 땐 엄지발가락을 움직여봅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날들 가운데 '읽기'와 '쓰기'가 있는지도요.
도대체 쓰기가 무엇이길래 저는 작가님이 쓴 것을 이토록 읽고 싶은 걸까요. 쓴 것을 읽지 못하더라도 작가님이 여전히 쓰는 존재이길 바라는 것일까요. 만약 쓰기가 작가님의 삶을 괴롭히고 갉아먹는 것이라면, 제가 이런 마음을 갖고 편지까지 쓰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일지 죄송하고 염려되는 마음이지만...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독자이기에 작가가 쓴 것을 읽고 싶어요. 일기도 좋고 낙서라도 좋고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 저는 작가님의 글을 읽고 싶어요. 읽는 이는 쓰는 이의 마음을 알 수 없죠. 그의 사정을 모른 채 그저 그다음 책, 그다음 이야기, 그다음 문장을 기다릴 뿐입니다. 헤아림 없이, 그 어떤 배려도 없이 이렇게 일방적인 소원을 말하는 것을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러나 이 말도 해야겠습니다. 저는 작가님께서 더는 글을 쓰지 않기로 한 결심을 존중해요. 그 속을 다 알 수 없지만, 왜 그런 마음에 이르렀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마음의 일부는 제 마음에도 있는 것이기에 '왜?'라고 감히 묻지 못하겠습니다. 겪으신 일들. 싸우고 투쟁한 모든 과정 속에서 느끼신 것들. 저는 작가님께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작가님 덕분에 우리가 글 쓰는 세계가 더 나아졌다는 사실입니다. 바라기는 그 세계 속에 여전히 작가님과 작가님께서 쓰신 글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 기억』의 엔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전에 썼던 편지에서는 오브를 먹고 기억하는 능력을 없애버린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었죠. 그때 제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어쩌면 제가 쓰는 자이기에 기억하는 것을 글쓰기에 단순하게 대입했던 것 같아요. 작가는 힘들어도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써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떤 인물이 작가에게 찾아와 나를 써달라고 부탁했을 때 받아들이고 그에 관해 써주는 것이 작가의 소임이 아닐까 생각했던 그때의 저는 무모하고 대책 없이 뜨겁기만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인물의 삶은, 나아가 작가의 삶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존재해야 하는 것임을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제 삶을 돌이켜봐도 잊지 않은 것보다 잊어버린 것들이 훨씬 도움이 되었습니다. 기억력과 망각력이 있다면 저는 기꺼이 망각하는 버튼을 누를 텐데 소설 속 인물에게는 그 능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또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마음인지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알겠습니다.
얼마 전에 영화 <빅 피쉬>를 다시 봤어요. 봐야 할 영화와 드라마가 너무 많아 무엇을 봐야 할지 고민이 되어, 되레 무엇도 볼 수 없는 상황 가운데 그리운 제목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바로 작가님께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빅 피쉬>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무심결에 재생 버튼을 눌렀죠. 예전에 봤을 때는 팀 버튼 감독 특유의 환상적이고 능청스러운 연출이 눈에 보였다면, 이번엔 허구와 뻥이 사실과 진실을 얼마나 근사하게 만드는지가 보이더군요. 허구의 도움 없이는 사실 속에서 진실을 전하기가 어렵겠구나. 사랑하는 이에게 뻥을 치는 것은 어쩌면 가장 강력하고 진실된 사랑의 언어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새삼 이야기의 의미와 힘을 생각해 봤습니다. 이야기꾼들이 얼마나 사람과 사람들을 사랑하는지. 작가의 상상이 사람들의 미래를 얼마나 괜찮은 현실로 만들어내는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작가님. 이 편지가 작가님의 등을 떠미는 손이 아니길 바랍니다. 무대에 다시 서달라고 앙코르를 외치며 채근하는 함성 소리가 아니길 바랍니다. 새 글이 아니어도 그동안 작가님께서 쓰신 것들은 이미 제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기에 생각나고 그리우면 아무 책이나 펼쳐보면 되니까요. 편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봤습니다. 다시 글을 써달라는 건지. 글을 더는 쓰지 못하겠다는 작가님을 이해한다는 건지. 도통 맥락이 잡히지 않고 두서없는 내용으로 가득해서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 하려던 말. 썼다 지우기를 반복해서 만약 연필로 썼다면 지우개로 지운 흔적이 가득한 지저분한 편지가 됐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하면요. '신간을 기다립니다'라는 주제의 글을 쓸 때 작가님의 이름 외에는 누구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간신히 다른 작가님을 떠올렸고 실제로 편지를 조금 쓰기도 했지만 금방 손이 멈추고 말더군요.
윤이형 작가님. 새 책을 기다립니다. 그게 제 마음의 전부입니다.
작가님이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웃고 농담하는 날들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어두워지면 몸이 피곤해지고 밤이 깊어지면 편안하게 잠이 드는 그런 단순한 일상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문득 '어, 쓰고 싶네'라는 마음이 들거나 어떤 내용이든 상관없으니 인상적인 이야기나 문장이 떠오르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제 편지를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써주세요.
언젠가 어떤 날 다시 만나 뵙길, 그런 날이 꼭 오길, 바라며 살겠습니다.
정용준 드림.
얼마 전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학생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소설을 쓰려고 하세요?" 그는 이렇게 답하더군요. "윤이형 작가님의 『작은마음동호회』를 읽었는데요. 그 책을 읽고... '음, 소설이 이런 거구나. 이런 감정과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거구나. 나도 이런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 학생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작가님의 글을 사랑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동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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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소설가)
2009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가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선릉 산책』, 장편 소설 『바벨』, 『프롬토니오』,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썼다. 젊은작가상, 황순원문학상, 문지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소나기마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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