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어린이날, 본가 근처의 대형 마트를 둘러보다가 충동적으로 장난감을 샀다. 품에 이미 자기 몸 만한 장난감을 안고서 한 개를 더 사달라고 바닥을 구르는 광기의 어린이들을 지나, 홀린 듯 손바닥만한 동물 친구 피규어를 집어드는데 오싹한 전율이 느껴졌다. 마치 운명 같았달까? 망토를 입은 펭귄 친구가 매끈한 플라스틱 눈으로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빨리 귀여운 우리를 데려가! 데려갈거지? 우리 귀엽지? 너무너무 귀엽지?
정말 부정할 수 없이 귀여웠다.
조카는 커녕 주변에 어린 애 하나 없는 나는 울부짖는 어린이들을 뚫고 마지막 남은 '펭귄 듀오 붕붕카 세트'를 손에 넣었다. 내가 구매한 건 그 유명한 '실바니안 패밀리'.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재산을 거덜내게 된다는 악마의 장난감. 매니아들의 수집욕을 자극하기로는 레고와 맞먹는다. 그날 구매한 건 고작 이만 오천원짜리 미니 세트였지만, 이후로 내 인터넷 쇼핑몰 위시 리스트에는 열 개가 넘는 추가 상품이 담겼다.(언젠가 위시 리스트를 한번에 결제할 수 있는 날을 꿈꾼다...) 원고 마감을 하다 힘에 부칠 때면 막 입양한 실바니안 친구의 맑은 눈을 바라본다. 지친 마음에 귀여움이 발산한 사랑의 에너지가 샘솟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스트레스를 사르르 녹게 하는 귀여움의 힘. 그렇다. 난 귀여운게 좋다!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는 귀여운게 좋다. 어렸을 때는 이 보편적인 취향을 쉽게 드러내지 못했다. 귀여운 걸 — 아기자기한 편지지나 코디 스티커, 인형, 비즈 팔찌 등 —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을 향해 어른들은 자주 '역시'가 들어간 말을 건넸는데, 그게 지독하게 듣기 싫었다.
여자 애들은 역시 이런걸 좋아하네.
여자 애들은 역시 아기자기한 거라면 사족을 못쓰지.
너도 분홍색 좋아하지? 레이스와 리본은 어때?
청개구리 심보의 나는 그들이 나눈 카테고리에 얌전히 소속되기 싫었다.
귀여움에도 디테일한 취향이 있다. 인형을 좋아하지만 레이스와 리본은 싫을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아는 척 이야기하는 태도가 신물이 났다. 그래서 일부러 앞에서는 별 관심 없는 척 했다. 뒤로는 열심히 용돈을 모아 보석반지와 비즈 팔찌를 뽑고, 문구점에서 산 스티커는 서랍 안에만 곱게 간직했다. 그렇게 소중하게 숨겨둔 취향은 학생이 되면서 잠시 잊혔지만, 경제력을 갖춘 성인이 되면서 다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오히려 오랜 멸시를 되갚아주겠다는 듯 더 열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작품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사방에 피가 튀고 세상에 종말이 다가온 비극적인 상황이라도 일말의 귀여움이 남은 작품에 심장이 뛴다. 귀여움은 미소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유머와 닮았고, 마음의 장벽을 낮춰 캐릭터에 몰입을 돕는다. 똑같이 누군가에게 버림받아 울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중년의 아저씨보다는 새끼 거북이가 더 안쓰럽기 마련. 갑자기 왠 거북이냐고?
한때 로커가 되기를 꿈꿨던 소심한 직장인 '스즈키 료이치'는 우연히 본 작은 거북이에 마음이 꽂혀 회사에서 동료들 몰래 거북이를 기른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동료들로부터 비웃음만 당하고, 결국 그는 눈물을 흘리며 거북이를 하수도로 흘려보낸다. 그 후, 거북이를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스즈키는 우연한 기회로 로커의 꿈에 한발 다가가게 되고, 지하 세계로 흘러들어 간 거북이는 엄청난 존재로 변신해 스즈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네이버 영화 소개 참고)
소노 시온 감독의 영화, <러브 앤 피스>의 줄거리다. 영화의 후반부, 도쿄의 하늘은 어둡게 가라앉는다. 거북이는 도쿄를 단숨에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지만 료이치를 향한 마음만은 그대로다. 파국이 드리워진 순간, 료이치는 괴수가 된 거북이를 통해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고 진실함을 되찾으며 이야기가 끝난다.
하나 재밌는 점은, 거대 거북이 '피카돈'의 모습이 실제 거북이를 재현한 CG가 아닌 누가 봐도 가짜인, 장난감 피규어에 가까운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캐릭터화 된 거북이는 실제 거북이보다 귀엽다. 동그랗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그가 아무리 움직임 한번으로 고층 건물을 부수는 존재가 되었다한들 관객들이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돕는다. 만약 피카돈이 에일리언과 유사한 괴수의 몰골로 나타났다면, 이 영화는 사랑의 메시지를 던지는 드라마가 아닌 막장 크리처물로만 남았을지 모른다. 너무 많이 변해버린 료이치가 마주한 피카돈은 이야기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우리에게 동심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귀여움이 선사하는 현실 감각의 오묘한 마취 상태가 좋다. 우리는 복잡하게 따지는 걸 뒤로하고 인물의 대화와 메시지에만 집중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올해 12월에는 꼭 <러브 앤 피스>와 함께하길 추천한다.
'피카돈'이 일부러 귀여움을 극대화해 빌런스러움을 최소화한 괴수라면, 2021년에 개봉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는 끔찍함에 귀여움을 딱 한 숟가락 더한 괴수가 등장한다. 일곱명의 안티히어로들이 대적하는 외계인은 정복자 '스타로'. 스펀지밥의 절친 뚱이를 연상시키는 별모양 외계인으로, 몸통 가운데에 거대한 눈알이 달려있다. 미니 스타로들을 쏟아내 인간의 몸을 숙주 삼아 조종하는 괴물인데, 묘하게 귀여워 계속 마음이 갔다. 이런 아기자기한 빌런 디자인에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스타로의 별모양 디자인에 미국과 거대 자본을 향한 비꼼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극의 후반부에, 스타로 나름대로의 안타까운 사연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참으며 외친다. "헐, 스타로 불쌍해!" 하지만 과연 스타로가 내가 싫어하는 지렁이나 개구리, 혹은 누구나 혐오감을 느낄만한 끔찍한 모습으로 디자인되었어도 이만큼의 몰입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불쌍해는 무슨, 어쩌라고? 싶지 않았을까?
여기까지 쓰니 영화 속 괴수에게 너무 외모 지상주의 적인 관점을 들이밀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앞선 칼럼에서 적었듯이, 나는 끔찍한 괴수도 좋아한다. 끔찍하면서도 귀여운 괴수는 많이 없고, 귀여움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본능이니 뭐 어쩌겠는가. 소설을 쓰면서도 늘 일말의 귀여움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다. 쓰는 소설이 오컬트여도, 스릴러여도, 미스터리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나는 무서운 것도 좋고 귀여운 것도 좋다. 좋아하는 걸 최대한 버무려 쓸때 즐거움이 샘솟는다. 내가 이야기와 귀여움으로부터 힘을 얻듯이,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들 역시 누군가에게 힘이 되길 바란다. 어린이날에 만난 붕붕카 펭귄 친구들처럼.
이번 주말에는 마블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인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마지막 시즌을 보기로 했다. 로켓이라는 이름의 너구리 외계인이 등장하는데, 예고편만 봤는데도 눈물이 날 것 같아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큰 반응이 없었다는 가오갤 시리즈이지만, 로켓과 그루트의 이름은 마블을 챙겨보지 않는 사람도 한 번씩 들어보았을 것이다. 가오갤 시즌1의 쿠키 영상에는 화분에서 춤추는 아기 '그루트'가 나온다. 마블에 관심없는 친구가 이 아기 그루트가 춤을 추는 영상은 종종 무한 재생 시켜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모두 귀여운 걸 좋아한다. 많은 이들이 일상을 견디게 하는 건 아주 사소한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예를들면, 매 시즌 출시되는 한정판 장난감을 기다리는 마음, 좋아하는 배우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마음, 주말에 잡은 약속, 자정마다 올라오는 웹툰처럼. 귀여움은 강하다. 뒤늦게 당당해진 내 취향을 좀 더 끈질기게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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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소설가)
소설가.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트로피컬 나이트』 등을 썼다. 스릴러, SF, 호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