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예스 100호를 맞이해, 커버를 장식했던 17인의 작가에게 상상의 우주를 열어준 책을 물었습니다. |
지금이야 SF가 대세로 여겨지고 있지만, 20년쯤 전, 그러니까 내가 10대였던 시절에 SF는 상당한 비주류 장르였다. 생각해 보면 당시 나의 독서 이력 가운데 SF의 향을 조금이나마 풍겼던 것은 다나카 요시키의 『은하영웅전설』 정도였고, 사실 이 작품도 본격 SF 소설이라기보다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삼국지에 가까운 내용이었으니, 우리가 오늘날 SF라고 부르는 것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었다.
당시 나에게 SF는 낯설고 어색한 세계였다. SF가 어려운 장르라서 그랬다는 것이 아니라, 애당초 SF소설 자체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도서관이든 서점에서든 SF소설은 가짓수가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조금 펼쳐서 훑어보면 어딘지 어렵게 느껴져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당시는 일본 현대문학 작품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고, 가볍게 술술 읽히던 그 소설들과 비교하면 SF는 무겁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느껴졌던 것 또한 사실이긴 했다.
그렇게 SF 문외한이던 내가 처음으로 구매한 SF소설은 어슐러 K. 르귄의 소설집 『바람의 열두 방향』이었다. 소설가가 되겠다며 열의를 불태우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일이다. 왜 이 책을 굳이 구매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 구판 표지에 그려져 있던 그리폰과 함께 있는 신경질적인 얼굴의 남자 그림이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우주와 우주선, 로봇이 나오는 것만이 SF가 아니라는 사실을 르귄의 소설을 읽으며 알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도 나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것이 바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이 소설은 르귄의 대표적인 단편 작품으로, 아마 르귄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이 소설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언덕 위에 위치한 도시 오멜라스는 그곳에 사는 이들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간다. 왕이 다스리는 것도 아니고, 노예제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며, 주식시장이나 광고, 비밀경찰이나 폭탄 같은 것도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목가적이고 소박한 삶을 살아간다는 뜻조차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지적이고 열정적이며 물질적 풍요가 삶의 풍요를 대체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오멜라스에서의 삶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그 모습과 일치한다고 봐야 하리라.
그러나 이런 오멜라스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다. 지하실에는 아무런 죄 없는 아이 하나가 갇혀 있으며, 그 아이는 그 지하실에서 고독과 비참함을 느끼며 그저 고통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오멜라스의 모든 사람들은 어른이 되기 전에 저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아이를 구해서는 안 된다. 그 아이에게 친절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도 안 된다. 그렇게 한다면 오멜라스가 누리는 그 모든 기적 같은 행복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작가가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미국에 대한 은유이지만, 미국에 한정된 이야기만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누리는 번영이란 결국 누군가의 희생으로, 강요된 착취로 인해 쌓아 올린 것이라는 그 사실을 충격적일 정도로 강렬한 은유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나 또한 크게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의 행복이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어린 시절 나의 세계에서는 악당의 것이었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타인을 음해하며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자로 그려지곤 하던 그 분명한 악당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악이었던 것이다. 열심히 살면 보답받으며, 착하게 살면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어린 시절 내가 믿는 세계의 모습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수험 공부라는 것도 그렇게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이 소설을 통해 상상한 적 없었고 상상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암묵적 공조로 가능해지는 악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상상이란 결국 타인의 일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상상이야말로 문학이 해야 하는 일임을 알게 된 것도, SF라는 장르 또한 다름 아닌 가정과 상상의 양식이라는 점을 처음 알게 해준 것도 르귄의 소설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르귄의 이 소설은 매우 각별하다. 문학이 상상력과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감하게 해주었으니까. 물론 그전에 읽었던 수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윤리의 문제를 다루며, 양심이란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게 해주는 책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책들 가운데 내 머리를 깨트린 것은 르귄의 이 강력한 우화였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 소설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한다. 이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가는 곳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 행복한 도시에 대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나는 그곳을 제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그런 곳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 이 소설을 다시 생각하며, 나는 오멜라스를 떠난 저 사람들이 어디에 도달했을지 오래도록 궁금해했다. 이야기의 구성을 생각한다면야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이 어디에 도달했을지 굳이 적을 필요는 없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이 가야 하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야만 할 것이다. 르귄의 소설은 세계가 팽창하던 70년대에 쓰인 것이었고, 그 팽창은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오멜라스를 떠나 도달해야만 하는 그 자리가 어디인지, 어쩌면 작가 자신조차 분명하게 예감하지는 못했으리라. 그러나 그 막을 도리 없던 그 시대는 결국 냉전 체제 종식과 더불어 역동적인 혼란을 거치며 기대 감소의 시대인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리고 삶의 조건이 달라진 지금이라면, 모두가 행복한 도시라는 환상이 깨져버린 지금이라면 우리가 가야만 할 곳을 조금은 더 선명하게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발표된 것이 1973년이었으니,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이 50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여 지금 여기에 도착했노라고 그렇게 상상할 수도 있겠지. 그 상상부터가 내가 문학을 통해 도달하고 싶은 영역이고, 우리가 함께 걸어가야 할 땅일 것이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기를, 그 상상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황인찬 시인. 시집으로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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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시인)
시인. 시집 『구관조 씻기기』, 『희지의 세계』, 『사랑을 위한 되풀이』와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등을 썼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