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뉘연 시인의 책장
김뉘연 시인이 샹탈 아케르만의 문장을 읽고 찾아 듣게 된, 소리의 내부를 열어 내는 음반 『Giacinto Scelsi』.
글 : 김뉘연
2025.07.21
작게
크게


『향성』

나탈리 사로트 저 / 위효정 역 | 민음사


 “그들은 사방에서 솟아나는 듯했다,”라는 첫 문장의 부분에서 오래전 읽은 문장이 솟아났다.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14쪽) 시차를 두고 글을 배회하는 이들의 솟아나 있음에 이끌려, 문장을 읽어 가면서 잃어 간다. 글을 이루어 가고 있음에만 복무하는 듯한 『향성』의 문장은 문장을 이야기의 흐름에 종속시키기보다 어떠한 상태로 환기해 내곤 한다. 종이에 배어 나온 듯한 문장들이 각자 다른 호흡으로 어긋난 리듬을 남겨 가다 웅크리고, 풀리다 말아 버린다. 움직이며 머무르는 양방향의 이것을 ‘문장이라는 상태’라고 적어 둔다.

 


 

『Sol LeWitt: Folds & Rips 1966–1980』

Dieter Schwarz | Verlag der Buchhandlung Walther König 


접었다 펼치고, 찢어 붙이고, 오려 낸 솔 르윗의 ‘드로잉’ 모음. 특히 접힌 작품들에, 그것들이 접힌 다음 펼쳐진 상태임에 이끌린다. 접혔다 펼쳐진 사각형 종이의 표면에 ‘움직였음’이 선의 형태로 등장해 있다. 특정한 입체를 목표로 하지 않는 전개도이자 펼친그림은 이것이 어떠한 순서로 접히고 펼쳐졌을지 가늠해 보려는 시도를 평면이라는 상태로 외면한다. 간단한 생각으로 손쉽게 만든 것 같아 보이는 작품이 오랜 시간 반복되고 변주되고 확장되는 과정이자 결과인 목록은 항상 아름답다. 

 


 

『Mind Walks』

Karl Nawrot | Rollo Press

 

‘형상’이라는 단어 앞에서, 카를 나브로가 만들어 온 여러 형상을 떠올리게 되곤 한다. 직관과 감각과 논리를 오가는 그의 조형물은 단순하고 이상한 시 같아서 단번에 알 것 같지만 들여다볼수록 모르겠거나, 혹은 그 반대다. 형상을 만들기 위해 먼저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를 이용해 형상화한 심상이 이중의 형상으로서 입체성을 품은 평면이 되어 책이라는 사물을 장면으로 이루어 간다. 언제 보아도 항상 낯선 상태로 세워져 펼쳐진 건축적 장면을 따라 걸으며, 생겨나는 심상을 언어로 바꾸어 본다. 활자체와 연결되기도 하고 책의 표지 그림이 되기도 하는 이 형상들이 타이포그래피가 되는 순간 중 하나다. 타이포그래피로 글을 쓸 수 있다고 여긴다면.

 


 

<Giacinto Scelsi> | 음반

Giacinto Scelsi | Edition RZ


“음악 분야에서는 언제나 쿠르탁, 셸시, 몬테베르디고요.”(『브뤼셀의 한 가족』, 127쪽) 아케르만의 단언에 궁금해진 셸시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이면서 프랑스어로 초현실적인 시를 쓴 이의 이름이었다. 음을 조율하는 단계와 고의적으로 조성된 불협화음 사이 어딘가에서 좀처럼 자리 잡지 못하는 듯 들리는 셸시의 음악은 듣는 이를 계속해서 긴장 상태에 둔다. 단음을 대상으로 삼아 향해 가는 집요함과 음높이, 음색, 지속 시간, 강도, 리듬 등을 불규칙적으로 변용하는 자유로움이 무정형의 힘을 전한다. “소리는 구형이다”라는 그의 말을 증명해 보이듯, 소리의 내부를 열어 내는 음악. 

 

 


『연필로 쓴 작은 글씨』

로베르트 발저 저 / 안미현 역 | 문학동네

 

얻게 된 종이의 빈 곳에 작은 글씨로 써 내려간 발저의 작은 말은, 작아질 대로 작아진 단어와 단어가 얽혀 버려 다른 단어로 오독되기도 한다. 적힌 것이 쓰인 그대로 읽히지 않는다면, 다르게 읽히며 새 길을 내기도 하는 한편, 적힌 것은 글이 쓰인 자취로서 내용에 앞서 쓴다는 행위를 내보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글이 쓰여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스스로의 필경사가 되어 연필로 먼저 쓴 후 펜으로 검토하며 정서했던 발저는 “연필 영역”에서 가장 자유로웠다.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쓰이는 대로 뻗어 가며 종결을 벗어난다. 

  

* 김뉘연 시인 프로필 사진 ⓒ유희경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0의 댓글

향성

<나탈리 사로트> 저/<위효정> 역

출판사 | 민음사

Sol Lewitt: Folds and Rips: 1966-1980

Lewitt, Sol / Schwarz, Dieter

출판사 | Walther Konig Verlag

Ensemble 2e2m 지아킨토 셀시: 프라남 1번, 아나가민, 사중주 (Giacinto Scelsi: Pranam, Anagamin, Quattro Pezzi)

<Ein Ad Hoc Ensemble>,<Ensemble Oriol Berlin>,<Sebastian Gottschick>,<Vieri Tosatti>,<Luca Pfaff>,<Ensemble 2e2m>

출판사 | edRZ

연필로 쓴 작은 글씨

<로베르트 발저> 저/<안미현> 역

출판사 | 문학동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실비 제르맹> 저/<김화영> 역

출판사 | 문학동네

브뤼셀의 한 가족

<샹탈 아케르만> 저/<이혜인> 역

출판사 | workroom

Writer Avatar

김뉘연

시인, 편집자. 워크룸 프레스와 작업실유령에서 일한다. 시집 『모눈 지우개』 『문서 없는 제목』 『제3작품집』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소설 『부분』 등을 썼다.

Writer Avatar

나탈리 사로트

1900년 7월 18일 러시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했다. 옥스퍼드에서 역사를 공부한 뒤, 베를린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파리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 후 파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1932년 《트로피즘(Tropismes)》이라는 첫 소설을 쓰기 시작해 7년 뒤인 1939년에 출판했다. 1940년 반유대 법률로 인해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사로트는 문학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대표작 《황금 열매(Les Fruits d'or)》, 《저 소리 들리세요?(Vous les entendez?)》, 자전적 소설 《어린 시절(Enfance)》을 비롯해 많은 소설을 발표했다. 전통적인 소설 구조와 달리 내적인 생각과 감정, 그리고 그 미묘한 변화에 주목한 작품들이다. 누보로망(Nouveau Roman) 선구자 격으로서 추상적 문학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현대성과 혁신성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로트의 특징적인 글쓰기 방식은 극문학 작품에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침묵(Le Silence)〉, 〈거짓말(Le mensonge)〉, 〈아름다워라(C'est beau)〉, 〈이스마(Isma)〉, 〈그녀는 거기에 있다(Elle est la)〉,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불리는 것(Ce qui s'appelle rien)〉 등의 희곡을 발표하며 프랑스 현대 연극사에서 혁신적이며 탁월한 극작가로 자리 잡았다. 1999년 10월 19일 파리에서 99세로 세상을 떠났다.

Writer Avatar

로베르트 발저

1878년 스위스 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와 예비 김나지움을 다녔으나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 때문에 그 이상의 교육은 받지 못했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열네 살 때부터 베른 주립은행에서 견습생 생활을 했고, 이후 취리히, 베른, 베를린, 슈투트가르트, 뮌헨 등 스위스와 독일의 여러 도시들로 거처를 옮기며 엔지니어 조수, 은행원, 사서, 비서 등으로 일했다. 1898년 처음으로 지역 신문에 시를 발표했고, 그 후로도 여러 작품을 문학잡지에 발표했다. 1906년부터 『탄너 일가의 남매들』 『조수』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 등 대표작을 출간했는데, 그의 작품들은 프란츠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 헤르만 헤세, 발터 벤야민에게 찬사를 받았다. 1913년 모국 스위스로 돌아와 호텔 다락방에서 7년을 머물며 산문집 『작은 문학』 『물의 나라』, 장편소설 『토볼트』 『테오도르』 등 다수의 작품을 집필했고, 1925년 2월 마지막 책 『장미』를 출간했다. 고독과 불안, 망상으로 고통받던 그는 누나의 권유로 1929년 베른에 있는 발다우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입원 뒤에도 집필을 계속했으나 1933년 헤리자우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후에는 절필한 채 여생을 보내다 1956년 12월 25일 산책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생전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일생을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로베르트 발저는 1970년대 그의 난해한 작품들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이 새롭게 이루어지면서 스위스에서 국민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독일 문학사의 불가해한 신화로 재탄생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와 W.G. 제발트, 페터 한트케, 마르틴 발저 등은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작가로 로베르트 발저를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