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성』
나탈리 사로트 저 / 위효정 역 | 민음사
“그들은 사방에서 솟아나는 듯했다,”라는 첫 문장의 부분에서 오래전 읽은 문장이 솟아났다.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14쪽) 시차를 두고 글을 배회하는 이들의 솟아나 있음에 이끌려, 문장을 읽어 가면서 잃어 간다. 글을 이루어 가고 있음에만 복무하는 듯한 『향성』의 문장은 문장을 이야기의 흐름에 종속시키기보다 어떠한 상태로 환기해 내곤 한다. 종이에 배어 나온 듯한 문장들이 각자 다른 호흡으로 어긋난 리듬을 남겨 가다 웅크리고, 풀리다 말아 버린다. 움직이며 머무르는 양방향의 이것을 ‘문장이라는 상태’라고 적어 둔다.
『Sol LeWitt: Folds & Rips 1966–1980』
Dieter Schwarz | Verlag der Buchhandlung Walther König
접었다 펼치고, 찢어 붙이고, 오려 낸 솔 르윗의 ‘드로잉’ 모음. 특히 접힌 작품들에, 그것들이 접힌 다음 펼쳐진 상태임에 이끌린다. 접혔다 펼쳐진 사각형 종이의 표면에 ‘움직였음’이 선의 형태로 등장해 있다. 특정한 입체를 목표로 하지 않는 전개도이자 펼친그림은 이것이 어떠한 순서로 접히고 펼쳐졌을지 가늠해 보려는 시도를 평면이라는 상태로 외면한다. 간단한 생각으로 손쉽게 만든 것 같아 보이는 작품이 오랜 시간 반복되고 변주되고 확장되는 과정이자 결과인 목록은 항상 아름답다.
『Mind Walks』
Karl Nawrot | Rollo Press
‘형상’이라는 단어 앞에서, 카를 나브로가 만들어 온 여러 형상을 떠올리게 되곤 한다. 직관과 감각과 논리를 오가는 그의 조형물은 단순하고 이상한 시 같아서 단번에 알 것 같지만 들여다볼수록 모르겠거나, 혹은 그 반대다. 형상을 만들기 위해 먼저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를 이용해 형상화한 심상이 이중의 형상으로서 입체성을 품은 평면이 되어 책이라는 사물을 장면으로 이루어 간다. 언제 보아도 항상 낯선 상태로 세워져 펼쳐진 건축적 장면을 따라 걸으며, 생겨나는 심상을 언어로 바꾸어 본다. 활자체와 연결되기도 하고 책의 표지 그림이 되기도 하는 이 형상들이 타이포그래피가 되는 순간 중 하나다. 타이포그래피로 글을 쓸 수 있다고 여긴다면.
<Giacinto Scelsi> | 음반
Giacinto Scelsi | Edition RZ
“음악 분야에서는 언제나 쿠르탁, 셸시, 몬테베르디고요.”(『브뤼셀의 한 가족』, 127쪽) 아케르만의 단언에 궁금해진 셸시는 이탈리아의 작곡가이면서 프랑스어로 초현실적인 시를 쓴 이의 이름이었다. 음을 조율하는 단계와 고의적으로 조성된 불협화음 사이 어딘가에서 좀처럼 자리 잡지 못하는 듯 들리는 셸시의 음악은 듣는 이를 계속해서 긴장 상태에 둔다. 단음을 대상으로 삼아 향해 가는 집요함과 음높이, 음색, 지속 시간, 강도, 리듬 등을 불규칙적으로 변용하는 자유로움이 무정형의 힘을 전한다. “소리는 구형이다”라는 그의 말을 증명해 보이듯, 소리의 내부를 열어 내는 음악.
로베르트 발저 저 / 안미현 역 | 문학동네
얻게 된 종이의 빈 곳에 작은 글씨로 써 내려간 발저의 작은 말은, 작아질 대로 작아진 단어와 단어가 얽혀 버려 다른 단어로 오독되기도 한다. 적힌 것이 쓰인 그대로 읽히지 않는다면, 다르게 읽히며 새 길을 내기도 하는 한편, 적힌 것은 글이 쓰인 자취로서 내용에 앞서 쓴다는 행위를 내보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글이 쓰여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진다. 스스로의 필경사가 되어 연필로 먼저 쓴 후 펜으로 검토하며 정서했던 발저는 “연필 영역”에서 가장 자유로웠다. 문장이 다음 문장으로, 쓰이는 대로 뻗어 가며 종결을 벗어난다.
* 김뉘연 시인 프로필 사진 ⓒ유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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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성
출판사 | 민음사
Sol Lewitt: Folds and Rips: 1966-1980
출판사 | Walther Konig Verlag
연필로 쓴 작은 글씨
출판사 | 문학동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출판사 | 문학동네
브뤼셀의 한 가족
출판사 | workroom

김뉘연
시인, 편집자. 워크룸 프레스와 작업실유령에서 일한다. 시집 『모눈 지우개』 『문서 없는 제목』 『제3작품집』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소설 『부분』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