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층,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자연광이 부드럽게 쏟아지는 높이 17미터의 압도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이곳은 미술관의 상징적 공간인 ‘서울 박스’. 관객들의 동선이 모이고 흩어지는 광장이자, 실험적인 대규모 설치 작품을 위한 특별한 장소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당시, 서도호 작가가 장소의 역사성을 반영하여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2013)을 선보인 이후, 이곳에서 열리는 전시는 항상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지금, 서도호 작가의 거대한 ‘집’이 있던 자리에, 손바닥에 올려다 놓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존재가 자리 잡았다. 맑고 뽀얀 형체에는 푸른 이끼가 돋아나 있고, 얼굴로 인식되는 부분에는 피어싱을 하고 있는 모습이 돋보인다. 이 신비로운 존재는 국립현대미술관과 LG전자가 협력한 ‘MMCA X LG OLED’의 첫 프로젝트인 대형 설치 전시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의 중심 작품 <아가몬 5>(2025)이다. MMCA X LG OLED는 매년 한 명의 미술가를 선정해 서울 박스에서 ‘예술X기술X공간’의 융합을 선보이는 중장기 프로젝트로, 이번 첫 프로젝트에 선택된 작가는 90년대생 한국 여성 작가, 추수(TZUSOO)다.
전시 전경
디지털 세대의 감수성과 젠더 담론을 독창적으로 시각화해온 추수는 “언제나 엄마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예술로 전이해왔다. 작가는 인간이 임신과 출산, 돌봄의 과정을 거쳐 성장하지만 이 과정이 대부분 비가시화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뭇가사리와 이끼로 구성된 살아 있는 조각 <아가몬>을 탄생시킴으로써 모성을 예술적으로 충족했다. 관람객은 전시 기간 내내 물, 습도, 조명을 조절하여 ‘인큐베이터’에서 보호받고 성장하는 <아가몬>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다.
<아가몬>과 <아가몬 인큐베이터>를 감싸고 있는 영상 설치 작품 <살의 여덟 정령-태>(2025)와 <살의 여덟 정령-간>(2025)은 각각 팔괘의 ‘태’와 ‘간’을 깨우는 포털 역할을 하며, LG OLED 스크린 88대로 구성되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덕선 학예연구사는 이러한 초대형 스크린이 국내에서 예술 작품을 구현하도록 활용된 첫 사례로, 기술 매체의 물성과 감각의 미세한 층위를 탐색하며 미래지향적 미술관의 경관을 제시한다고 언급했다. 작가는 이 작품을 “개인적인 성적 욕망과 페티시”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설명하며, 팔괘의 상징에서 영감을 받은 여덟 개의 정령이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관의 일부를 소개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동북쪽과 남쪽 포털에서 두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며, 성적 세계를 관장하는 여섯 개의 다른 섹슈얼리티 정령도 이후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전시 제목 ‘아가몬 대백과’에 ‘외부 유출본’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삶의 여덟 정령 - 태> 스틸 이미지
기자간담회에서 개인의 성적 판타지를 다룬 이유를 묻는 질문에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모든 생명의 탄생은 성적인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이 주제는 터부시되고 있죠. 저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에도 야하고 섹시한 요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또한, 남성중심적으로 다뤄지는 섹시함에 이 작품이 다양성의 한 부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MMCA X LG OLED 시리즈 2025-추수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
전시 기간 : 2025년 8월 1일 ~ 2026년 2월 1일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안동선 (미술 전문기자)
15년간 패션 매거진 <하퍼스 바자> 등에서 일했다. 현재는 미술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미술 에세이 『내 곁에 미술』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