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 시간 이상 동일한 일에 종사하다 보면, 그로 인한 습벽 내지 후천적 성격 비슷한 것이 생긴다. ’직업병’은 직업이 한 사람에게 남기는 흔적을 일컫는 말이다. 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일이 직업은 아니지만, 사소한 감각부터 일과까지 다 자란 성인을 이보다 대폭 바꿔 놓는 경험도 드물다. 전에 없던 습관이 한꺼번에 몸에 붙어버려 예전의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경지에 이른다.
나의 첫 개 수지는 생후 40일쯤에 싸락눈이 날리던 겨울날 우리집에 왔다. 코트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호기심 가득한 꼬마는 아파트 구석구석을 분홍색 발바닥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공포는 잘 시간이 되어 온 집안 불이 꺼졌을 때 엄습했다. 어둠을 아랑곳하지 않는 수지의 타닥대는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고 나는 난생 처음으로 우리집에 얼마나 뾰족하고 날카로운 물건이 많은지, 삼키면 곤란한 이물질과 먼지가 얼마나 지천인지 깨닫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인간에 맞춰 지어진 세계에 던져졌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보호자’가 된 후 나의 왼쪽 눈은 부족하나마 강아지의 관점으로 세계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40센티미터쯤 되는 키의 개가 볼 때 위로부터 다가오는 사람의 손바닥은 돌풍에 추락하는 간판과 비슷하겠구나. 털이 긴 카펫의 촉감은 잔디밭의 그것과 닮아 오줌을 싸고 싶은 기분이 들 거야. 손님이 불쑥 집에 오는 것보다 밖에서 만나 한 바퀴 걷고 다 같이 들어오는 편이 안심이겠네.
나의 두 번째 개 타티는 좁고 깊은 관계를 선호하는 성격이어서 동네 몇 가게를 정해두고 산책길에 방문해 꽤 오래 머물며 조용히 애정을 피력했다. 좋아하는 동네 슈퍼 사장님이 계산대에 보이지 않으면 뒤쪽 창고까지 찾아갔고, 아파트 경비반장님을 편해해서 그분이 비번일 때는 휴게실 앞까지 나를 끌고가 CCTV로 타티를 발견한 반장님이 나와 인사하기까지 기다렸다. 반면 세번째 개 아로하는 정반대 성향이다. 환대의 장소를 다다익선 정신으로 수집하고 그중 일부가 문을 닫거나 지루해지면 세상 쿨하게 돌아선다. 새로운 공간을 방문하길 즐기는 개 아로하와 살다보니 낯선 장소에 들어섰을 때 부지불식중에 개의 처지에서 공간을 재빨리 스캔하는 나를 발견한다. 문턱, 음악의 볼륨, 시야가 막혀 불안을 유발하는 방향, 테이블이나 책상 밑처럼 아로하가 피신처로 삼을 장소를 점찍는다. 상상으로나마 후각도 예민해졌다. 개와 둘이 살기 전까지 향초를 좋아해 작은 사치로 삼았던 나는 초는 물론 디퓨저도 거의 사지 않게 되었다.
왼쪽은 타티, 오른쪽은 아로하와 함께
거꾸로 둔해진 감각도 있다. 수세식 변기의 소용돌이가 배설물을 휘감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는 인간의 배변 활동과 달리 개의 대소변은 반려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처리되지 않는다. 대소변은 즉시 치워야 할 오물이지만, 방금 나의 개가 싼 건강한 똥을 집을 때 느껴지는 따끈한 온기를 내심 좋아하는 반려인도 적지 않을 거라 믿는다. 산책길에 더러 보호자가 치우지 않아 방치된 개똥을 목격하면 일단 원망스럽다. 동물과 사는 사람들이 무책임하다는 인식을 강화시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히도 내 개가 장염이라도 앓고 있는데 눈앞의 똥이 건강한 특질을 띠고 있다면 “참으로 훌륭한 똥이군”이라는 부러움도 머릿속을 스쳐 간다. 책이나 표지판을 읽을 때 무관한 문구를 개와 연관된 내용으로 이해하는 착시현상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지난주 나는 구립 문화센터 주차장을 지나다 “꼬리 물기 금지” 경고판을 보고 십여 초간 “그럼 다른 데는 물어도 된단 말인가?”라고 고민했다. 1인 반려가구 경우 대화 상대라고는 개뿐인 날도 흔하다 보니 반려견에게 쓰는 말투가 입에 붙어버리기도 한다. 마흔 넘은 동생에게 식탁 건너편 식초를 건네달라고 부탁해 놓고 넘겨받으며 “옳지!”라는 칭찬 추임새가 새어 나와 버린다.
반려인만 앓는 공포증도 있다. 내 경우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닫을 때마다 문설주와 문 사이에 생기는 틈에 개의 꼬리가 끼는 참사를 쓸데없이 상상하며 소름 끼쳐 한다. 나는 운전면허증을 따고도 17년이나 지나 실제로 차를 몰기 시작했는데 그토록 지체한 이유 중 하나는 로드킬의 가해자가 될까 봐 겁이 나서였다. 초보 시기는 조심성이 최대치일 테니 오히려 사람을 다칠 확률은 낮을 것 같았지만, 운전석에서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길동물을 다칠 가능성은 높아 보였다. 결국은 개와 자유롭게 이동하기 위해 운전을 결심했으니 사필귀정이긴 하다. 지금도 나의 안전운전 주문은 “아주 작은 강아지, 아주 작은 고양이”라는 혼잣말이다.
사계절 뚜렷한 반도 반려인의 보편적인 증세로는 겨울 공포증이 있다. 특히 실외 배변만 가능한 개를 점지받은 반려인들에게 긴 겨울과 혹독한 추위는 난적이 아닐 수 없다.(추운 나라 출신 이중모 견종의 보호자들에겐 여름이 그럴 것이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 훨씬 전부터 우리 ‘산책 도우미’들은 신상 방한용품을 검색한다. 추위를 심하게 타고 궂은 날씨를 질색해서 걸핏하면 학교를 결석하는 문제적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현재의 나를 보면 기가 막혀 할 것이다. 김 서림을 방지하는 안경닦이, 도시형 아이젠, 방한 마스크와 귀마개, 해마다 두세 짝은 잃어버려 소모품이 된 장갑의 재고도 점검한다. 장갑을 반드시 짝을 맞춰 껴야 한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버린 건 재작년 겨울이다.
말할 필요도 없는 노릇이지만 국적불문 세계의 모든 반려인들은 ‘머글’ 시민들보다 동물 학대에 대한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 내 경우 동물이 폭력을 당하고 방치되는 광경에 대한 내성이 병적으로 약해 일부 영화를 보는 데에 크나큰 각오가 필요하다. 이제는 고백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독립 초기 내가 살던 재개발구역 원룸에서는 옆집 마당이 내려다보였는데 그 집은 짧은 쇠사슬에 개를 묶어두고 한여름에도 방치하기 일쑤였다. 어느 긴 연휴 개만 두고 며칠이나 인적이 끊긴 이웃집을 보다 못한 나는 무너진 담을 넘어 개에게 물과 밥을 주러 갔다. 허기와 더위에 극도로 시달린 개는 그릇과 내 팔까지 씹을 기세로 달려들었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나는 짧은 무단침입을 끝내고 도망쳤다. 이후 문제의 이웃은 개가 자라면 어디론가 보내고 어린 강아지를 데려와 방치 사육하길 반복했고 나는 다른 집을 구해 이사했다. 뒷날 나는 존경하는 한 감독님께 이 일화를 이야기했고 나의 경험은 당시 방영 중이던 시트콤의 한 회차에서 선의로 가득하지만 대책이 없는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각색되었다. 서글픈 기억이 뜻하지 않은 가문의 영광으로 귀결된 셈이다.
직업병이라는 제목을 붙이긴 했지만 반려인의 그것이 특별하진 않다.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의 눈으로 나를 포함한 세계를 응시하고 평가하기 마련이다. 사랑은 자아의 국경을 뛰어넘도록 부추겨 ‘나답지 않은’ 일을 저지르게 하고 우리의 나라를 확장한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김혜리
테리어 믹스 아로하 샨티 킴과 서울에서 살고 있다.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 <조용한 생활> 운영. 『묘사하는 마음』,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림과 그림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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