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작업실
김나연 작가의 작업실 - 『가난의 명세서』
‘나 자신으로 살기’ ‘되고 싶은 나 되기’를 끊임없이 방해하는 가난이라는 경험.
글: 이참슬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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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를 통해 우울과 불안, 허무의 감정을 유쾌한 문체로 풀어내며 위로를 전했던 김나연 작가가, 이번에는 자신의 가난을 정면으로 마주한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무슨 돈을 그렇게 많이 써요?”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신작 『가난의 명세서』는 소비 내역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그 이면에 자리한 결핍과 생존의 감정을 솔직하게 파헤칩니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가난의 기억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작가는 이제 자신과 같은 회색지대에서 자라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허튼 데 쓰지 않아도 가난하고, 열심히 살아도 가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18쪽) 가난은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만드는지 질문하는 책 『가난의 명세서』의 작업 이야기를 전합니다.


 



『가난의 명세서』 작업을 마치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개운해요. 첫 책은 잠자리에 누워서도 이게 잘한 짓인가 불안해지는 밤들이 있었는데, 이번 책은 그런 불안보다 개운함이 커요. 처음에 구상했던 모양에 가까운 책이 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오랫동안 줄곧 가난을 거리두기 하며 살아왔다고 하셨습니다. 소비의 기록을 파헤치며 숨기고 외면하던 가난을 마주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정면으로 맞서야 했던 순간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소액신용대출을 받았던 순간이었어요. 대학원 마지막 학기였어요. 얼른 졸업을 해야 취업을 하고 돈을 벌 텐데, 정작 등하교할 차비도 없을 만큼 막다른 상황이었죠. 평생 가족끼리 돈거래로 언성 높이고 상스러운 말을 주고받고 할퀴고 찢어지는 걸 보고 자라서 ‘죽어도 빚은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자랐는데 결국 제가 그 자리에 서게 된 거예요. 너무 굴욕적이었죠.

 

그때 누군가가 “도대체 돈을 어디에 쓰기에 그렇게 없냐”고 묻더라고요. 어디다 돈을 그렇게 쓰기에 돈이 없느냐고. 타박하는 것 같았어요. 구구절절 이러쿵저러쿵 해명하고 있는데 그 꼬라지가 황당하고 화가 났어요. 내가 왜 이 사람한테 내 씀씀이에 대해 인정을 구하고 있지? 버는 돈이 적으니 남는 게 없는 거 아닌가? 그럼 나는 얼마를 써야 “맞는” 건데? 그래서 결심했죠.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자. 어디에 얼마를 쓰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글로 적다 보니 생각 없이 쓴 돈은 하나도 없었어요. 오히려 소비항목마다 너무 많은 이유와 감정이 어지럽게 엉겨 붙어있었죠. 그걸 하나하나 조심히 떼서 알아볼 수 있는 형태로 펴내는 과정이 심적으로 좀 힘들었어요.

 

“가난에 치른 대가를 기록으로 남긴다”는 문장으로 열리는 책은, ‘정신과 치료비 44,400원’ ‘향수 29,400원’ ‘전화 영어 17,600원’과 같은 구체적인 비용과 감정의 기록으로 전개됩니다. 숫자, 냄새, 촉감, 기억 등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감정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아쉬움이 가장 커요.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결코 최선의 결과로 이어질 수는 없는 상황이 많았어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실현시킬 힘도 있는 때였거든요. 더 빨리 학교에 갈 수 있었더라면, 그때 영어공부를 더 할 수 있었다면, 더 일찍 병원에 다녔더라면, 그런 것들이요. 후회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타입인데, 저 시절은 돌아볼 때마다 아쉬운 게 너무 많아요. 자기연민이 너무 심한 건가 싶지만 제가 아니면 누가 그렇게 애틋하게 저를 돌봐주겠어요.

 

“숨통을 조여와도 타격이 없는 척, 원래 좁고 초라한 자아를 타고난 척해야 하는 것”이 절망이었다는 고백이 책을 덮고도 오래 남았습니다. 말미에는 “나만큼이나 내 가난도 목소리를 필요로 했던 것 같다”고 쓰셨는데,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목소리로 들리기를 바라나요? 

이번 책은 사실 저를 위한 책이었어요. 성장과정에서 들었다면 좋았을 이야기였거든요. 나처럼 회색지대에서 자란 사람의 이야기. 그 흔적을 감추려고 기를 쓰는 사람의 이야기. 가난이란 게 “극복”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깨닫고 결국 그것과 한 몸에서 사는 사람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필요했던 순간들의 저를 돌아보며 썼습니다. 특히 에필로그에 쓴 강의실에서의 경험은 사실 원고 마무리 시점에 불현듯 떠오른 장면이었어요. 10년이 넘도록 잊고 지냈는데 떠오르자마자 다시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불쾌했던 경험이었거든요. 얼마나 싫었는지 그 수업은 한 학기 강의 내용을 통째로 기억에서 지웠더라고요. 그때부터 소리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당신은 가난이 도대체 무어라 생각하시느냐고. 

 

책에서는 가난이 단순한 경제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 욕망, 건강, 존엄, 자존감에도 영향을 미치는 전신에 스며드는 감각으로 그려집니다. ‘가난의 명세서’ 기록이 끝난 지금, 가난의 얼굴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저에게 가난의 모습은 그림자인 것 같아요. 어떤 날은 흐릿한 윤곽으로 발치에 어른거리고, 어떤 날은 등골 따라 흐른 식은땀이 땅까지 적신 듯 선명하게 제 존재의 크기를 그려내는 존재요. 작아지기도 커지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사라지지는 않는 제 존재의 일부이면서 제 존재의 증명이라고 느껴져요.

 

생애를 관통하는 가난의 기록을 토해낸 글쓰기는 무엇을 바꾸었나요?

이게 탈고의 개운함인지 “가난 기록하기”에서 멀어진 개운함인지 모르겠는데, 후련해졌어요. 임포스터 신드롬* 같은 것도 있었거든요. 성인이 된 후 만난 친구들은 제 가정사나 성장기 경험들을 잘 모르니까요. 티가 나면 어쩌나, 들키면 어쩌나. 늘 제 배경이 제일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거나 가정교육, 밥상머리 교육 같은 말이 들리면 표정이 금세 흔들렸고요. 지금도 아니라고는 못하겠어요. 원래도 토하고 나서 바로 컨디션이 회복되지는 않잖아요. 그래도 30년 묵은 체증이 조금은 해소된 느낌입니다. 

*임포스터 신드롬(Imposter syndrome) : 가면 증후군

 


작업공간을 소개해 주세요.

재택근무를 하는 탓에 작은 방을 서재 겸 사무실로 쓰고 있어요. 회사 업무도, 개인 용무도 이 방에서 봐요. 약 5년 간의 재택근무를 통해 저에게 딱 맞게 세팅해 둔 모니터암, 스탠딩 데스크, 사무용 메쉬 의자, 발 받침대가 저를 보조해 줍니다. 주말에 광화문이나 종로의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를 전전하며 원고를 쓰기도 했지만 ‘최종_진짜최종_파이널_1’ 처럼 한숨이 너무 많이 나오는 퇴고작업은 머리를 쥐어뜯어도 되고 욕을 해도 되고 중간에 바닥에 드러누워도 되는 이 방에서 마무리했어요. 책에도 썼지만 허리 걱정 하느라 한자리에 진득하게 앉아서 일을 잘 못해요. 중간에 일어나기도 해야 하고 스트레칭도 해야 하는데 카페에서는 민폐일 수 있잖아요. 엉덩이 노동자 여러분들은 꼭 스탠딩 데스크 구비하셨음 좋겠어요. 기왕이면 모니터암도, 메쉬 의자도…


 

작업을 하는 동안 가장 의지한 반려 [ ______ ]

저에게는 식탁과 식탁의자가 반려 가구 같아요. 여러 시행착오 끝에 멋진 홈오피스를 차려놨다고 했지만 사실 집에서는 식탁 의자에 가장 오래 앉아 있어요. 식탁에서 유튜브도 보고, 밥도 먹고, 원고 작업도 합니다. 그것도 의자 위로 다리를 올려 양 무릎을 가슴 가까이 끌어당긴 자세로요. 허리에 진짜 안 좋은 자세라는데, 좁은 식탁 의자에 몸을 한껏 구겨넣은 채로 골몰하는 게 오히려 집중도 잘 되고 몸에도 익어요. 바른 자세를 잡게 도와준다는 비싼 사무용 의자를 놔두고 왜 자꾸 이 모양으로 앉아 있는지…  


 

마감 후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가요? 

사람들 만나는 일이요. 북토크가 되어도 좋고, 번역 모임이 되어도 좋고, 활자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다음 책을 만들고 싶어요. 기왕이면 다시 독립출판물로요. 사진집도 만들고 싶고, 영어덜트 소설도 쓰고 싶고, 첫 책을 쓸 때 구상했던 몸에 관한 에세이도 시작하고 싶고요. 원래 열정맨은 아닌데 각 잡고 원고를 시작하면 바로 다른 글이 쓰고 싶어지거든요… 그걸 지금 한 6년째 미뤄서 더 그런가 봐요.  

 

할 일이 있을 땐 그것 빼고 모두 재밌게 느껴집니다. 책을 만드는 동안 특히 재밌게 본 남의 콘텐츠는 무엇인가요?

원고 처음 기획할 때에는 스테파니 랜드의 『Maid』를 감명 깊게 읽었어요. 아직 한국어 번역본이 나오기 전이었어서 직접 번역 기획서를 만들어 볼 생각까지 하고 있었거든요. 아니 에르노의 책도 글쓰기에 큰 지침서가 되었어요. 선천적 지위와 획득 지위, 계급, 계층에 대한 이야기를 개인의 서사로 풀어내는 글을 쓰고 싶었거든요.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어떻게 전달하고 싶은가, 고민이 될 때마다 두 작가의 책을 떠올렸어요. 김현경 작가님의 『사람, 장소, 환대』나 안온 작가님 『일인칭 가난』도 너무 좋았어요. 특히 『일인칭 가난』을 읽고 나서는 내가 책을 굳이 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제가 하고 싶었던 청년 빈곤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진솔하고 담백하게 기록한 책이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보탤 수 있나. 책을 읽는 동안 제 경험이 자주 겹쳐 보여서 많이 울었는데, 책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덜 외롭더라고요. 겸허해지고 감사해지는 책이었어요.

 


가난 속에 있는 한, 나는 비윤리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으며, 환경 파괴를 가속화하는 소비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나의 마음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여름 원피스 19,600원 할부 회차 3/5」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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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명세서

<김나연>

출판사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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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슬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