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품 경매회사의 신입으로 입사한 직후 컬렉팅을 시작했습니다. ‘컬렉터가 되어야지!’ 목적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작가와 작업이 내뿜는 에너지에 매료되어 나의 세계에 들이다 보니 어느새 작고 소중한 컬렉션이 만들어졌더군요. 이후 100% 재택근무를 하는 미국회사에 입사 이후 개인사업, 이직한 현 직장에서까지 집에서 근무하게 된 지 4년 차.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 일할 때도 밥 먹을 때도 나와 함께하는 이 작품들이 나의 단조로운 일상에 부어주는 이 상큼하고 따스한 에너지를 새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미술시장에 몸담고 있다 보니, 미술품을 시장 관점으로 바라보고 설명하고 구매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로 구매 후 가치가 올랐을 때 다시 재판매한 작품도 많고요. 그러나 한두 푼이 아니기에 투자를 생각하며 소장하게 된 작품이라도, 집에 걸어두게 된 작품들은 결국 제 일상에 스며들고 깊은 정이 들어버려 ‘내 새끼’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희로애락을 조용히 다 바라보고 있는, 작가의 숨결이 담겨있는 그 작품들과 매번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연재에서는, 나의 작고 소중한 컬렉션의 ‘내 새끼들’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제 ‘작소컬’의 시작과 현재를 사적이지만 누구나 쉽게 따라 해볼 수 있는 이야기들로 녹여 공유해보겠습니다.
겹겹의 색 (color)들이 들려주는 선율, 윤향숙의 아크릴 회화
JINSOON 맨해튼 트라이베카 살롱에서 처음 만난 윤향숙의 작품
태평양을 건너 멀고 먼 뉴욕의 맨해튼 한복판, 내게 윤향숙의 회화를 처음 소개해 준 사람은 전설적인 네일 아티스트 ‘진순’ 선생님이었다. 뉴욕 패션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세계적인 네일 아티스트의 살롱에는 어떤 작품이 걸려있을지 궁금했던 찰나 - 발을 디디자 마자 반겨준 장면은 위의 사진과 같은 색색의 ‘팝’한 작업 열두 점이 꽉 채운 출입구였다.
네일 매니큐어를 물감으로, 네일브러쉬를 붓으로 그녀만의 아트를 구현해 내는 진순의 아이덴티티를 정말 잘 구현한 작품이란 생각을 하며 작품을 가까이 들여다보자, 우와. 입체 3D 였네! 진순선생님께 “선생님, 이 작품 누구 작품이에요!?” 하자 그녀의 눈이 반짝. 윤향숙 작가와 작업에 대한 열정 가득한 설명이 시작되었고, 그 설명을 듣는 내내 작가에 대한 찐 사랑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작가와 주고받았다며 보여준 편지에 실린 아름다운 그림들과 글을 보면서는 더더욱 작가에 대해 궁금해졌다.
얼마 후 한국에 돌아왔고, 진순 선생님은 작품 앞에서 커졌던 나의 눈을 기억하시고선 윤향숙 작가님과 나를 연결해 주셨다. 작가가 원하는 색을 구현한 아크릴 박스에 구멍을 촘촘히 뚫고 그 박스 안에 구상 회화를 배치함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안과 밖 레이어의 색이 혼합된 오묘한 색감을 감상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기법을 실제로 꼭 보고 싶었다.
드디어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한 날. 경기도의 조용한 도시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은 가는 길부터 마음이 고요-해졌고, 도착한 작업실에는 작은 음악 소리와 함께 커피 내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너무 놀란 것은 - 깔끔 그 자체, 먼지 하나 없을 것같이 청소 되어있는 풍경! 작가의 정돈된 작업 스타일과 깔끔한 성향을 마음속으로 예측해 보며 자리에 앉아 인사를 나누고 나서는 작가의 삶과 작업에 대해 두세 시간 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 같다.
작가는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대 미대 동양화과를 졸업 했는데, ‘정통’ 미술의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바운더리를 확장하고 새로운 영역을 확장해 온 20여 년 간의 시간은 ‘컨템포러리’ 한 도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지난 20여 년간 투명한 아크릴을 갈고, 그 위에 색을 입힌 후 색점들을 찍어서 그 너머의 캔버스 작품이 살짝씩 비치게 하는 ‘듀얼’ 구조의 작업을 해왔다. 나는 처음 이 ‘듀얼’ 구조의 작업을 마주하자마자 작가가 아크릴이라는 재료에 대해 엄청나게 깊이 연구했겠구나, 수많은 실패와 실험 과정을 거쳤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실제로 대화할 때 느껴지는 작가의 조용하고 깊은 에너지는 나의 예상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작가는 자신만이 아는 “딱 그” 아크릴 면을 구현하기 위해 아크릴 공장을 수없이 다니고 연구하며 작업을 해 왔다.
성인으로 키워낸 두 청년의 엄마, 한 남편의 아내이자 재즈, 패션, 커피를 좋아하는 중년의 작가. 아직도 하루에 대부분을 작품과 작업 구상으로 보내고, 드로잉 북을 꺼내 보이며 마음 떨려 하는 순수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가의 모습에 나 스스로도 내가 사랑하는 일을 이렇게 오래 사랑할 수 있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나의 사랑하는 소장품, 윤향숙의 애플 연작을 집으로 데려와 소장했다.
우리 집 한켠을 상큼하게 만들어주는 윤향숙의 애플
그리고, 작업실에서의 만남 후 1년 반 정도가 흐른 지난 초가을의 어느 아름다운 날. 쳇 베이커의 <Autumn Leaves>를 들으며 윤향숙 작가의 개인전으로 향했다. 뉴욕 브루클린을 연상시키는 층고 높은 콘크리트 벽 갤러리에 들어서서 작가의 새로운 색면 회화 시리즈를 마주했을 때, 한 곡의 재즈 음악 속 자유로운 트럼펫 소리가 빠바밤. 하며 시작되었다. 각기 다른 아크릴 색판이 겹쳐 만들어진 새로운 아름다움. 그 절묘하게 연주된 자유로운 미감을 감상하면서, 이러한 곡이 탄생할 때까지 재질과 물성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시도했을 작가의 농축된 시간도 함께 느껴졌다.
윤향숙 개인전 전경
순수한 색, 겹친 면, 그리고 그 작업을 비추는 빛. 이렇게 세 가지 요소로만 단순히 구성된 작가의 추상 색면 작업은 (마치 재즈 연주가 그러하듯) 관객에게 도달하며 완성되는데, 관객에게 작가 관점에서의 해석을 유도하는 장치들 (작가가 붙인 제목, 붓터치의 흔적 등)을 철저히 배제한 해석의 자율성을 준다. 색과 빛이 합쳐진 작업의 해석은 온전히 그 시간, 그 공간에서 작업을 감상하는 관객 내면에서 나오는 감정들로 채워지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전시를 감상하는 30여 분 간의 시간 동안, 어린 시절 부모님이 깨워 억지로 새벽에 눈을 떠 일출을 보러 갔던 날- 어둠 속에서 새빨갛게 떠오르는 태양 아래 비친 새까만 바다의 차가움을 떠올리기도 했고, 연인과 함께 떠났던 여름날의 바다 여행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한 후 백사장에 누워 햇빛을 한껏 받으며 잠깐 잠에 들던 순간의 뜨거운 태양 빛을 느껴보기도 했다. 윤향숙의 색면 앞에 선 100명의 관객이 100개의 다른 생각에 잠기는 광경도 잠시 떠올려 보았다. 가장 앞서 이 색면을 마주한 작가 내면의 추억은 어떤 것이었을까? 상상해 보며.
윤향숙 개인전 전경
40여 점이 넘는 신작이 공개된 전시를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한지 알기에, 개인전에 도착해 작가를 만나자마자 “너무 고생 많으셨겠어요” 했더니 작가는 조용히 웃으며 “너무 즐거웠어요” 답한다. 빛, 색, 감정을 악기 삼아 쌓아낸 윤향숙의 선율이 이토록 매력적이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작가 노트 속 작가의 목소리 글을 마무리한다.
그동안 나의 작업은 물질과 빛, 안과 밖, 그리고 투명함과 밀도를 동시에 담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복잡한 층위를 잠시 내려놓고 싶어졌다.
형식보다 색 그 자체, 재료의 본질적인 힘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색 아크릴만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색이 겹치며 만들어내는 미묘한 변화와 투과된 빛의 흐름이 내 안의 감각을 다시 깨우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재료의 변환이 아니라 오랜 시간 쌓아온 나와의 대화를 새롭게 시작하는 과정이다.
-윤향숙 작가 노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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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 (널위한문화예술 시니어 아트 디렉터)
이화여대에서 사회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뒤 영국 런던대 SOAS에서 동양미술사학 석사과정을 마친 김예지 씨는 서울옥션 홍콩 경매팀과 글로벌 사업팀, 세계 최대 글로벌 온라인 미술작품 거래 플랫폼 ‘아트시(ARTSY)’의 아시아 비즈니스팀 서울 담당 디렉터로 재직하며 전시 기획, 국내외 갤러리, 기관, 작가들과 협업을 통해 글로벌 미술 시장에 대한 전문성을 쌓았다. 현재는 문화예술전문미디어 널위한문화예술에서 시니어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