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사람,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침없는 직언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아웃사이더로서의 날카로운 시각을 견지하는 영국 청년 다니엘 튜더의 대한민국 정치 비평 책이 나왔다.
다니엘 튜더는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을 찾았다가 사랑에 빠져, 2004년 다시 서울로 돌아온 ‘한국 마니아’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이코노미스트』 한국 특파원으로 일했다. 특파원으로 ‘한국 맥주 맛없다’는 기사가 크게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이 일이 계기가 돼 경리단길에 맥주집 ‘더부쓰(The Booth)’까지 차렸다. 그러나 사실 그는 외신기자로 일하던 시절, 그가 깊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맥주만이 아니었다. 특히 2012년 대통령 선거 과정을 지켜보며 그는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 책을 쓸 결심을 하게 됐다. 그 성찰을 담은 책이 바로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이다. 전작으로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가 있으며, 2015년 친구들과 독립 매체 바이라인(www.byline.com)을 공동 설립해 새로운 언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중이다.
책 부제가 ‘서양 좌파가 말하는 한국 정치’입니다. 책에서 한국에는 진정한 우파도, 좌파도 없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두 개 양당을 가짜 보수와 진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짜 보수, 가짜 진보에 관해서라면 한국의 대표 여당, 야당 얘기를 해야겠네요. 사실 두 당은 보수와 진보 프레임으로 볼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당은 아직도 개발주의에 사로잡혀 있고, 야당은 그런 여당이 하는 일을 오로지 반대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당인 것 같습니다. 진정한 진보라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책, 소득 불평등 같은 의제에 집중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진정한 보수라면 ‘자유시장을 옹호하는가?’ ‘전통문화와 사회질서를 지키는 데 가치를 두고 있는가?’ 같은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하는데 한국에선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진보는 네거티브 전략으로 일관할 게 아니라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이끌 수 있는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공격하는 게 항상 나쁜 건 아니죠. 하지만 공격만 해서는 안 되고 항상 긍정적인 메시지를 함께 전달해야만 합니다. 특히 좌파는 더 그래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사회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 돌을 던져서 사람들을 공격하는 건 쉽죠. 하지만 좋은 정치인이란 상황을 개선하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계획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게 건설적인 행동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언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후퇴한 한국사회, 어떻게 다시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정부, 몇몇 대기업에 의해 독과점식으로 운영되는 경제, 그리고 이들 대기업이 거대 광고주 노릇을 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언론의 자유를 지킨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엔 강력하고도 독립적인 인터넷이라는 무기가 있지 않나요?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방송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유념할 점은, 독립언론 또한 언론으로서의 책임감을 좀더 느꼈으면 한다는 겁니다. 일부 온라인 매체는 그 점을 가끔 잊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항언론역할을 하는 독립언론 중에서 지나치게 극단적인 매체도 가끔 있습니다.
저신뢰사회에서는 음모론이 더욱 활개를 친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음모론은 언론이 통제되고 사람들이 입 한번 잘못 놀렸다가 무시무시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사회에서 활개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지 한번 생각해봤어요. 만일에 제가 언론인인데 거대 광고주들이 무서워서 내가 생각하는 것도 자유롭게 못 쓰고, 명예훼손죄로 고소당하거나 감옥에 갈까봐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면 차라리 소문을 퍼뜨리는 방법을 선택하겠죠. 그리고 제가 아무런 힘이 없는 약자라면 그런 소문을 보고서는 과장해서 또 그 소문을 여기저기 다시 퍼뜨리겠죠. 그렇게라도 해야 약자의 슬픔을 덜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음모론은 약자가 마지막으로 찾는 심리적 피난처입니다.
새로운 풀뿌리 정당운동으로 이탈리아의 5성운동을 언급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성운동이 완벽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 상황에 비춰봤을 때 흥미로운 모델인 건 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이탈리아의 유명한 코미디언이 자기 팬들한테 이런 말을 했죠.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로 모여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논쟁을 시작해보자”라고 말이죠. 그러자 온라인에 있던 사람들이 정말로 오프라인에서 서로 모이고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엔 사안별로 투표를 하기 시작했고, 모두의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나중엔 이 모임이 전국적으로 조직됐죠. 마침내 이 모임은 4년 만에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정당을 만들기에 이릅니다. 토크 콘서트에 가는 사람들이 토크 콘서트에 가는 대신 다들 모여서 서로 논쟁하고 서로 의견을 모은다고 생각해보세요. 한국에서는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이 정말 많잖아요. 제가 말한 운동이 시작되면 사람들이 정말 신나서 참여할지도 몰라요. 이런 운동이 시작되면 기존 정당도 변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희망을 꿈꾸는 것이 힘들더라도 이제는 희망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한국 정치와 사회의 변화를 위해 프레임의 전환이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인가요?
제일 중요한 게 복지 문제입니다. 우파들은 복지가 단지 ‘공짜’라고 말할 거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처럼 게을러질 거라고 하겠죠. 근데 좌파조차도 복지를 보는 프레임이 잘못돼 있어요. 항상 ‘무상’ ‘반값’ 얘기뿐인데요. 복지가 무슨 시혜라도 되는 것처럼 제시하잖아요. 근데 그건 사실 반대편인 여당이 제시하기에나 알맞은 프레임이죠. 그보다, 복지는 사람에 대한 투자로 해석돼야 합니다. 제 경우를 말씀 드리자면, 저는 저에게 아무런 비용을 지불하게 하지 않고도 교육을 제공해주고, 건강보험을 제공해주고, 아버지가 실직했을 때 우리 가족을 돌봐준 복지제도 덕분에 지금의 저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민주화라는 것도 저는 프레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민주화가 아니고 경제정상화라고 불러야죠. 대기업 회장이 대통령 특별사면을 받고, 소액 주주들에게 돌아갈 몫까지 챙기고, 정치인에게 뇌물을 주고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건 정상이 아니잖아요. 한국 우파들이 그렇게들 좋아하는 미국에서도 그러지 않습니다. 하지만 ‘민주화’라는 단어를 붙이는 순간, 이 문제는 뭔가 정치적이고, 좌파의 이슈인 것 같은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일베에서 ‘민주화’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갈 겁니다. 일베에서 민주화라는 말은 거의 모욕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잖아요.
진보가 장악해야 할 이슈는 무엇일까요?
진보가 노인 문제를 좀더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인 빈곤층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걸 그대로 방치하는 건 문제입니다. 노년층에게 단순히 지원금을 주는 것보다, 그들이 쌓아온 경력을 활용해 돈을 벌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동물권리보호 이슈 같은 것도 진보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한국 주류 정당에서는 아직 아무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동물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이제 아주 많아요. 성소수자 인권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래에는 이게 중요한 이슈가 될 겁니다. 하지만 진보에게 역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젊은이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실 젊은이들은 사회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진보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소위 한국의 진보 정당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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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다니엘 튜더 저/송정화 역 | 문학동네
때로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사람,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침없는 직언을 할 수 있는 용기와 아웃사이더로서의 날카로운 시각을 견지하는 영국 청년 다니엘 튜더의 대한민국 정치 비평 책이 나왔다. 그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 정치는 조금 이상하다. 여기에는 좌파도 우파도 없다. 보수는 오로지 대기업 밀어주기와 ‘나 먼저’라는 생각을 외에는 아무런 철학이 없으며, 진보는 과거에 사로잡힌 채 프로페셔널리즘이 결여된 무능한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묻는다. “민주주의는 정말로 후퇴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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