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난 지 12년, 여전히 참신하다
미국의 중국계 SF작가 테드 창의 유일무이한 작품집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2002)를 국내에 번역 소개한 지 어언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런 그가 독자들에게 여전히 ‘참신한’ 작가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1990년의 데뷔 이래 엽편을 포함해서 단 15편의 중단편만 발표했기 때문이다. 생존 경쟁이 치열한 영어권의 SF계에서 작품 활동과 생업을 병행하는 작가는 드물지 않지만, 브라운 대학 졸업 후 기술 매뉴얼을 쓰는 테크니컬 라이터 자격으로 시애틀의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 취직했던 테드 창의 경우는 정교한 사고실험에 천착하는 특유의 창작 기법 자체가 이런 극단적인 과작(寡作)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가 작품 하나를 발표하기까지 최소 1년, 최대 7년에 달하는 ‘숙성’ 기간을 둔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아연실색한 독자는 비단 필자만이 아니겠지만.
고대인의 우주관을 소재로 삼은「바빌론의 탑」과 초월적 지능을 획득한 주인공의 여정을 그린 「이해」 등의 단편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테드 창은 이공계 출신자와 학위 소지자가 널린 SF계에서도 보기 드물 만큼 이지적(cerebral)인 작풍의 작품을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인터뷰와 창작 노트 등을 통해 술회했듯이 추상적인 상황보다는 구체적인 인생사에서 창작의 실마리를 얻고, 논리적 정합성과 비유적 맥락 사이의 균형을 그 무엇보다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그의 창작 방식은 오히려 문학의 고전적인 방법론에 근접해 있다. 장르적인 맥락에서 볼 때 테드 창의 소설은 사고실험을 주축으로 한 아이디어 스토리로 간주되며, 어떤 과학적 가설 내지는 개념(idea)을 소설의 중심에 두고 그것이 주위 세계에 끼치는 영향을 집요할 정도로 다양한 각도에서 전개함으로써 독자의 인지적, 정서적인 참여를 극대화하는 경향을 가진다.
테드 창의 작품 활동은 적든 많든 그 뼈대를 이루는 매력적인 아이디어들을 스스로 ‘설명’하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해당 작품의 사고실험이 ‘사랑’ 같은 인간의 가장 민감하고 기본적인 정동(情動)과 맞물릴 경우, 감동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곤 한다. 1998년에 앤솔러지인 『스타라이트 2』에 처음 실렸던 네 번째 작품 「네 인생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외계인과의 퍼스트 컨택트를 배경으로 언어 상대성 이론과 인지적 결정론과 모성애를 다룬 이 중편은 출간 직후부터 수많은 독자와 평자들의 심금을 울리며 네뷸러상을 비롯한 여러 개의 관련상을 흽쓸었고, 최근 드뉘 뷜뇌브에 의해 <컨택트>(2016)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테드 창에 대한 평단의 높은 평가가 “SF계 최고의 현역 단편작가”라는 극찬으로까지 격상된 이면에는 중편 「네 인생의 이야기」의 비평적 성공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그가 SF 작가로서 부동의 명성을 획득한 것은 일곱 편의 기존 작품과 한 편의 신작을 묶은 제1작품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2002년경부터이다. 필자도 이듬해인 2003년부터 일찌감치 이 책의 번역 출간을 추진했다. 매년 국내에서 출간되는 ‘최신’ 해외 SF의 수가 열 손가락에도 미치지 못하는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신속하게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집의 가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SF 팬덤에 국한되었던 호평이 입소문을 타고 일반 독자층에게까지 확산되어 증쇄를 거듭한 것은 1990년대 초부터 그의 작품을 실시간으로 읽어 온 필자의 입장에서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번역 과정에서 작가와 이메일 등으로 긴밀하게 소통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서신을 통해 친교를 맺은 해외 작가는 그가 처음이 아니지만, 업무상의 연락이라기보다는 유의미하고 즐거운 잡담에 가까웠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아무래도 언어학과 SF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SF팬답게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SF 대회와 각종 문화 행사에 참석해서 해외 팬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는 테드 창이 2009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PiFan)의 게스트 작가로 특별 초빙된 것은 한국의 애독자들에게는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당시 이미 전설적인 작가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열흘 가까이 한국에 체류하면서 강연을 포함한 공식 일정뿐만 아니라 팬들과의 만남과 개인적 모임과 지방 관광까지 정력적으로 소화했고, 작품 못지않게 진지한 인품과 지적인 성실함으로 그를 만난 모든 독자를 매료했다. 기본적으로는 소수의 SF팬들과 애독자들을 염두에 둔 행보였지만, 매체 인터뷰와 워크숍 등을 통해 문화계와 출판계에서의 인지도가 크게 올라갔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그는 3년 뒤인 2012년에도 대전에서 열린 ICISTS-KAIST 컨퍼런스의 연사로 재차 방한해서 과학기술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강연했고, 그 뒤로도 개인적인 방한을 거듭하며 명실공히 미국 SF계 최고의 친한파 인사로 자리잡았다. (무더운 여름에만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다음 번에는 시베리아의 한풍이 불어오는 겨울을 경험하고 싶다고 한다.)
작가 개인에 대한 관심은 아직 소개되지 않은 후속작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한국 SF와 미스터리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월간 「판타스틱」지에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2007)과 「숨결」(2008) 등의 걸작을 잇달아 번역 게재하고, 단독 작품으로는 가장 긴 길이를 자랑하지만 여전히 200페이지 남짓에 불과한 장편(長篇)「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2010)의 한국어판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서평 등을 통해 꾸준히 호응해 준 독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술한 세 작품과 미발표 신작을 포함해서 최대 여덟 편의 작품이 실릴 테드 창의 제2작품집은 현재 미국에서 출간을 앞두고 있다. (한국어판은 내년 초에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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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저/김상훈 역 | 엘리
. 통찰력 있는 주제를 우아하고 적격한 문체로 풀어나가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SF 소재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의 서가에 반드시 꽂혀 있어야 하는 작품이다. 아이디어를 압축해 중?단편으로 내놓은 결과물은 그 밀도가 기가 막힐 지경이다. 기막힌 상상력을 품고 있으면서도 읽고 나면 엄청난 감동이 밀려오는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이 작품은 전 세계 15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김상훈(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