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시대의 현상학
오늘날 상품의 거래는 이미 가상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머지않아 이 가상의 거래가 실물의 거래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가상을 불신한다. 왜 그럴까?
글ㆍ사진 진중권
201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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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을 구현하는 게임 ‘세컨드 라이프’의 한 장면

“왜 우리는 ‘가상’을 불신하는가?”

 『피상성 예찬』에서 빌렘 플루서(Vilem Flusser)는 이렇게 묻는다. 이 물음에는 물론 배경이 있다. 현대인은 게임의 아이템을 사고 사이버 공간에서 아바타를 꾸미고 ‘세컨드 라이프’ 속의 토지를 매입하는 데에 현실의 돈을 지급한다. 이뿐인가? 우리는 오래전부터 사이버 경제에 대해 얘기해 왔다. 오늘날 상품의 거래는 이미 가상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머지않아 이 가상의 거래가 실물의 거래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가상을 불신한다. 왜 그럴까?

현실의 가상성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고전적 답변을 알고 있다. 즉 가상은 존재론적으로 열등(짝퉁)하며, 인식론적으로 기만(거짓)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 상투적 답변을 소개한 후 플루서는 곧바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가상이 기만을 한다면, 이 세상에 기만하지 않는 것도 있단 말인가?”

우리는 현실과 가상의 대립을 절대화하나, 실은 그 둘의 경계가 그렇게 분명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그것을, 정작 플라톤 자신은 가상이라 불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플라톤에게 진정한 실체는 오직 하늘에 있는 이데아 세계뿐이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이 그에게는 3D 아이맥스 영화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가령 그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생각해 보라. 거기서 현실은 오늘날 우리의 영화관 체험과 비슷한 것으로 설명되지 않던가.

‘플라톤은 관념론자라서 그런다’고 반론을 펼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유물론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흥미롭게도 고대의 대표적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 역시ㅡ하지만 플라톤과는 물론 다른 이유에서ㅡ현실은 가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상, 그 위의 노트북, 그것의 자판을 두드리는 나의 손. 이 모두가 그저 허깨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가상 너머에 존재하는 진정한 실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자’다. 세계란 원자의 배열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일으키는 가상의 향연에 불과하다.

가상의 현실성

이렇게 현실이 가지는 가상적 성격을 폭로한 후, 플루서는 이어서 가상의 현실성을 강조한다. 컴퓨터 모니터 위의 영상들은 점멸하는 픽셀(pixel, 화소)이 만들어 낸 가상이다. 그럼 모니터 밖의 사물들은 어떤가? 데모크리토스의 정신을 계승한 현대 과학은 세계의 모든 것이 실은 미립자의 배열이라고 가르친다. 세계란 대상들의 총체가 아니라 입자들의 확률적 분포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입자들의 밀도가 높은 것을 ‘현실’이라 부르고, 밀도가 낮은 것을 ‘가상’이라 부르는 경향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로써 플루서가 가상과 현실의 존재론적 차이를 상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가상과 현실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둘 사이에는 양적 차이, 즉 밀도의 차이 혹은 해상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다른 한편,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가상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던 밀도의 차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언젠가 가상과 현실을 구별하기 힘든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때 “가상은 현실만큼 실재적이고, 현실은 가상만큼 유령 같아질 것이다.”

이 당혹스러운 주장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는 ‘약한 해석’과 ‘강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전자는 이 주장을 그저 ‘언젠가 육안으로는 현실과 전혀 구별할 수 없는 가상이 등장할 것’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고, 후자는 이 주장을 ‘언젠가 인간이 만든 가상이 글자 그대로 실물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다. (가령 고해상의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진 개와, 복제이지만 동시에 실물인 스너피의 차이를 생각해 보라.) 플루서는 이 중에서 후자, 즉 강한 해석을 염두에 둔 듯하다.

탈역사적 마법의 시대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풍만한 여인상을 조각하고, 동굴의 벽에 동물 그림을 그렸다. 이는 물론 주술, 즉 가상을 통해 현실의 바람을 이루려는 행위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주술이 실제로는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인간들은 이제 세계를 그림으로 그리는 대신에 세계를 문자로 기술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이른바 ‘역사’라는 것이 시작된다.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문자와 함께 인간은 주술적 상상력을 버리고 철학이나 과학의 추론적 사유를 발전시키게 된다.

하지만 인류는 어느새 ‘구텐베르크 은하’의 끝에 도달했다. 영상이 커뮤니케이션의 주요한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문자 문화를 규정하던 역사주의 의식도 후퇴하게 되었다. (주체의 죽음, 역사의 종언, 정치의 사멸 등 1980년대 이후를 풍미했던 포스트 담론은 아마도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영상은 물론 문자 문화 이전의 영상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선사 시대의 주술적 영상과 달리 디지털 영상은 테크놀로지로 만든 ‘기술적 영상’(Techno-bild)이기 때문이다.

플루서에 따르면,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점점 더 추상적으로 변화해 왔다. 가령 구석기인들은 동굴의 벽에 조각(3차원)과 벽화(2차원)를 남겼다. 문자 문화의 인간들은 선사 시대의 인간들이 그림으로 표현하던 것을 텍스트의 행(1차원)으로 풀어냈다. 디지털 시대에 인간들은 픽셀(0차원)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흔히 이미지가 텍스트보다 더 구체적이라 생각하는데, 실은 디지털 영상은 텍스트보다 더 추상적이다. 바탕에 텍스트(프로그램)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원시인들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이렇게 가상과 현실을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능력을 ‘상상력’이라 부른다. 다시 찾아온 이미지의 시대도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 역시 마법의 시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문자 이전으로 퇴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원시인들의 것이 ‘주술적 상상력’이라면, 현대인의 것은 ‘기술적 상상력’이다. 원시인들이 그저 꿈이 현실이 되기를 바랐다면, 현대인은 기술에 힘입어 그 꿈을 정말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다.

분석과 종합

이 모든 것은 물론 컴퓨터라 부르는 도구 덕분이다. 컴퓨터는 이중의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세계를 0과 1의 픽셀이라는 미립자로 분석(analysieren)할 뿐 아니라, 그렇게 분석된 입자들을 합성(synthetisieren)할 수 있다. 오늘날 컴퓨터가 가진 이 잠재력을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컴퓨터 그래픽의 영역에서일 것이다. CG는 상상의 사진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다.

플루서가 말하는 ‘점’ 혹은 ‘입자’가 단지 픽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개별 과학들이 그동안 어떤 발전을 거쳐 왔는지 상세하게 논한다. 생물학은 오늘날 분자생물학의 수준에서 유전자를 분석하고 있다. 물리학은 이미 원자의 내부로 들어가 미립자의 수준에 도달했다. 신경생리학은 뇌를 해부하는 수준을 넘어 뉴런을 연구하고 있다. 로이 애스콧(Roy Ascott)이 즐겨 ‘BANG’이라는 약자로 표기하는 B(it), A(tom), N(euron), G(ene)은 오늘날 과학적 분석의 단위를 말해 준다.

오늘날 과학적 분석은 마침내 ‘입자’의 수준에, 말하자면 존재의 생성 단위에 도달했다. 컴퓨터라는 기계가 분석만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합성을 하듯이, 오늘날 과학도 분석만 하는 게 아니다. 과학은 동시에 분석된 입자들을 새로 합성하는 기술적 조작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픽셀을 조작하여 사진과 똑같은 허구를 만들어 내고, 원자를 쪼개 에너지를 생산하고, 나노 크기의 입자를 합성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고, 유전자를 조작하여 동식물을 디자인하고 있다.

과학의 분석 단위와 기술의 합성 단위가 일치할 때, 혹은 존재의 생성 단위와 기술의 조작 단위가 일치할 때, 사실상 인간은 창조주가 되고, 가상은 곧 현실이 된다. 예를 들어 스너피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것을 ‘복제’라 부르나, 그것은 개의 그림도 아니고, 개의 사진도 아니다. 스너피는 짖고, 먹고, 생식을 하는, 다른 개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 또 한 마리의 ‘개’다. 과학과 기술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으나, 오늘날 우리가 가진 과학과 기술은 과거의 것과는 애초에 차원이 다른 것이다.

주체에서 기획으로

이 새로운 상황은 당연히 세계와 인간에 대한 관념 자체를 바꿔 놓을 수밖에 없다. 과거에 세계는 인간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것’(datum)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factum)으로 변해 가고 있다. 자기 바깥의 모든 것을 주어진 것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바꾸어 놓은 후, 인간은 자기 자신, 자신의 신체마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으로 바꾸어 놓으려 한다. 신체의 사이보그화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심지어 유전자 조작으로 인류의 종적 개량을 시사하는 철학자도 있다.

스텔락, <제 3의 손>, 도안과 퍼포먼스, 1992

세계는 더 이상 ‘객체’, 즉 인간이 개입하기 이전에 미리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세계가 객체가 아니라면, 인간 역시 더 이상 ‘주체’일 수가 없다. 위가 없으면 아래도 없듯이, 주체는 객체의 상관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플루서에 따르면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인간은 이미 있는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subject)가 아니라, 아직 없는 세계를 창조하는 ‘기획’(project)이다. 기획으로서 인간은 꿈을 현실로 만드는 존재, 즉 자신의 상상을 앞으로(pro) 던져(ject) 실현시키는 존재다.

미디어는 인간과 세계를 매개한다. 미디어의 변화는 또한 그것이 매개하는 세계와 인간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오늘날 세계는 주어진 것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그 상관자인 인간은 주체에서 기획이 되었다. 플루서의 『피상성 예찬』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일으킨 이 변화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 할 수 있다. 가상의 창조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플루서의 철학은 디지털 버전의 니체주의라 할 수 있다. 세계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윤리적인 것에서 미학적인 것으로 변해 가고 있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다른 에세이에서 플루서는 이렇게 말한다.

왜 개는 아직 붉은 점에 푸른 털을 갖고 있지 않으며, 왜 말은 아직도 저녁 초원 위로 형광 색채를 발산하지 않을까? 왜 동물의 사육은 여전히 주로 경제적 관심사일 뿐, 미학의 영역으로 옮겨오지 않았을까? (…) 우리는 이제 인공적인 생명, 살아있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가 선택만 한다면, 이러한 발전들이 합쳐져 농경은 거의 사멸한 계급인 농민들로부터 토끼처럼 번식하며 먹성이 좋은 예술가들의 손으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술적 버전의 니체주의는 우리에게 당혹감을 안겨 준다. 유전자 조작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의 색깔을 변화시키는 것을 그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 새로운 시대의 농경으로 이해한다. 우리의 반발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그는 예상되는 비판을 이렇게 반박한다.

자신들을 고집스럽게 ‘그린’이라 부르는 오늘날의 환경주의자와 생태주의자들은 디즈니랜드, 예술작품으로 바뀐 풍경은 더 이상 “자연적”이지 못하다고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초기의 인간들이 숲속에 경작지를 열었을 때, 그들은 이미 풍경을 “인공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이 들판에 식물을 심었을 때, 그들은 인공성을 가속화했던 것이다. 미래의 디즈니랜드는 그저 이를 계속하는 것에 불과하다.

과거의 예술가들이 팔레트 위에 물감을 올려놓고 캔버스에 색의 향연을 펼쳤다면, 미래의 예술가는 팔레트 위에 유전자를 올려놓고 생물의 신체에 색의 향연을 펼쳐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급진적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왜 그래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우리가 왜 개가 붉은 점에 파란색이면 안 되냐고 물을 때, 우리는 실은 가까운 미래에 예술의 역할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그 미래는 핵과 인구의 폭발만이 아니라, 그와 동일한 정도로 지루함의 폭발로도 위협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지루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과격한 주장을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플루서를 가장 철없는 부류의 기술 낙관론자로 치부하여 배격할 필요는 없다. 아마도 그의 철학을 기술적(descriptive) 부분과 규범적(normative)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규범적 측면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한 그의 기술만큼은 어렵지 않게 보편적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피상성 예찬 #빌렘 플루서
1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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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6.24

가상거래와 실제 거래에서 왜 우리는 가상 거래를 불신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그야 실제로 보는 것과 가상으로 보는 건 다르니까라고 밖에 대답못 한 저는 생각이 많이 짧은 거겠죠... 한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힘든 글인 거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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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1.10

현상과 가상,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 못하는 세상이죠. 넷상에서 주고받던 말들이 머리속에서 이미지로 계속 떠다니죠. 진실을 볼수 있는 능력이 점점 퇴색되는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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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y1987

2010.04.19

나카자와 신이치의 [신화, 최고의 철학]을 보면 인류가 농경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겪었던 주술적 동화(同化)능력의 상실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동물과 인간이 물리적으로는 다르지만 정신적으로는 함께였던 시절에 관한 것이죠. 만약 이 글에서 말하듯이 이른바 디지털 농경시대가 열린다면, 아마 우리는 신체와 자아가 하나였던 시절이 끝나가는 것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말그대로 기술적(혹은 물리적) 동화능력의 상실. 그럼 그 자아의 도덕이란 신체에 대한 혐오 혹은 타자화로 넘어가게 될까요? 자신의 신체가 타자화되는 순간 자아의 신성화와 신체에 대한 폭력이 동시에 일어나는, 그러니까 자아가 신체에 가하는 신성한 폭력의 발발. 얼마전에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읽었는데, 제가 그 책을 잘 이해했다면, 결국 신체는 신성한 동시에 살해가능하고, 배제된 동시에 포함된, 무차별 폭력에 노출된 대상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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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 국내에 있을 때에는 진보적 문화운동 단체였던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 간부로 활동했다.

1998년 4월부터 『인물과 사상』 시리즈에 '극우 멘탈리티 연구'를 연재했다. 귀국한 뒤 그는 지식인의 세계에서나마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과 논쟁의 문화가 싹트기를 기대하며, 그에 대한 비판작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변화된 상황 속에서 좌파의 새로운 실천적 지향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9년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겸직 교수로 재직 하였다.

그를 대중적 논객으로 만든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박정희를 미화한 책을 패러디한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은 ‘박정희 숭배’를 열성적으로 유포하고 있는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과 작가 이인화씨, 근거 없는 ‘주사파’ 발언으로 숱한 송사와 말썽을 빚어온 박홍 전 서강대 총장,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옹호한 작품 〈선택〉으로 논란을 낳은 작가 이문열씨 등에 대한 직격탄이다. 탄탄한 논리, 정확한 근거, 조롱과 비아냥, 풍자를 뒤섞은 경쾌하면서도 신랄한 그의 문장은 '진중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