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의 우동이 나를 이태리 요리사로 만들었다 - 요리사 박찬일
야반도주하던 날 밤의 우동을 식구들은 여전히 기억해요. 괴로운 기억이니 굳이 떠올려서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맛은 지울 수 없이 또렷하게 남아 있지요. 시간의 공장에서 뽑혀 나온 길고 긴 국수 면발이 어머니의 국수를 감고 돌아 고택골 우동을 싸안고 저를 이끌어 이탈리아 요리사로 만든 게 아닌가 싶네요.
201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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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우려내 더 진해지는 우동 국물
영화 ‘시네마 천국’을 대학 다닐 때 봤어요. 친구가 “죽이는 영화 있다”고 하기에 따라갔죠. 눈은 호강하겠다 싶었거든요. 이탈리아 영화라고 하니 지중해 푸른 바다가 펼쳐지겠고, 잘 그을린 몸매에 비키니 입은 미녀가 나올 것 같고, 와인이며 요리도 잔뜩 나오겠다 싶었죠. 지금은 없어진 호암아트홀에서 조조로 봤는데, 영화관에 딱 우리 둘이 있는 거예요. 영화가 점점 펼쳐지는데 세상에 무슨 이런 별천지가 있나 했어요. 이런 게 이탈리아 정서구나,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마침 제 여동생이 이탈리아어과를 다녀서, 이탈리아 사람들 성정이 우리하고 비슷하다는 말도 들어서 그런지 정겨운 느낌도 들었어요. 그러다 서서히 이탈리아 짝사랑에 빠진 거죠.
이탈리아에 가겠다고 결심한 건 13년 전이었어요.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다시 시작한 거죠. 국내에 파스타가 슬슬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이탈리아 요리 몇 가지 배워서 조그맣게 식당이나 하자 싶었죠. 몇 달 배우고 오려고 했는데, 가보니까 어마어마한 거예요. 미트 소스하고 크림소스 파스타가 전부인 줄 알았던 신출내기 앞에 신세계가 펼쳐진 거죠.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멋진 요리사가 되고 말겠다’는 거창한 결심보다는 안 배우면 후회할 것 같아서 열심히 했어요.
이탈리아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파스타라는 ‘국수’가 저를 강하게 끌어당긴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마다 국수 공장이 있었어요. 공장이라고 하지만 요즘 볼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이 아니라, 기계를 들여놓은 가게 수준이었죠. 거기서 서리해 먹는 국수 맛이 끝내줬어요. 갓 뽑은 국수를 어린애 키보다 약간 높은 시렁에 걸어 놓고 말리는데요, 축 늘어져 있는 국수를 주인 몰래 잘라 먹는 거죠. 막 널어서 축축할 때 말고, 거의 말라서 짭짤하면서 꼬독할 때가 제일 맛있었죠.
서리 국수도 맛있지만 역시 저희 어머니 국수가 최고였죠. 살기 어려워서 자주 먹던 게 국수였어요. 미군 원조 물자로 나온 밀가루가 쌌으니까 그걸로 줄기차게 만들어 먹었던 거죠. 예전에 탤런트 최진실 씨가 수제비가 지긋지긋하다고 했던 것도 밀가루로 변주가 가능한 수제비를 질리도록 먹어본 기억 때문일 거예요. 전 밀가루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밀가루가 돈 없고 배고픈 사람들의 DNA를 구성해준 셈이니까요.
저를 요리로 끌어들인 게 국수였다면, 제 요리의 영혼을 주신 분은 어머니세요. 경상도 출신이신 어머니는 손맛이 남다르셨어요. 그 솜씨로 시장통에서 밥집 같은 걸 하셨어요. 화려한 음식은 못 해주셨지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셨죠. 재료가 너무나 척박한 상태에서, 재료 하나에 집중해서 그 맛을 최대한 살리는 묘미를 아셨던 거죠. 통째로 넣고 우린 멸치육수 하나만 가지고도 세상 어디에 없는 맛을 내셨어요. 잘사는 친구나 친척집에 가면 상다리가 부러지라 온갖 음식을 다 내놨죠. 그런데 먹어보면 맛은 별로죠. 재료는 좋은 데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넣어서 그래요. 이탈리아 요리가 저랑 잘 맞는 것도 하나에 집중하거든요. 주재료가 두세 가지를 넘지 않아요. 조리법도 단순해요. 재료의 본래 맛을 잘 보여주도록 구성돼 있어요. 복잡하고 화려하지 않아요. 그림 그려놓은 듯한 이탈리아 요리를 자주 보셨다고요? 그건 프랑스 요리를 모방한 거예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게 뭔가 있어 보이죠. 이탈리아 전통요리를 보면 깜짝 놀라요. 요리가 그릇에 턱하니 무뚝뚝하게 담겨 있어요. 모르는 사람은 보고 당황할 정도죠. 이탈리아 만두인 라비올리를 시키면, 소스는 하나도 없이 라비올리만 덜렁 올라와 있어요. 올리브 오일 조금 뿌려져 있고요. 맛을 내는 양념과 소스는 만두 안에 다 있다는 거죠.
손맛이라는 게 코와 혀로 유전되는 거잖아요. 어머니 음식을 먹어본 저는 그걸 흉내 내고 있는 거죠. 어머니가 성격이 급한 편이셔서, 요리를 빠른 속도로 해녀셨어요. 제가 이탈리아에서 요리 배우는 동안 칭찬받았던 게 빨리빨리 잘한다는 거였어요. 이탈리아 사람들 성격이 정말 급하거든요. 우리보다 더 급해요. 말하기 전에 벌써 얼굴부터 벌게지고 손이 먼저 나가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주방에서 어머니의 아들인 제 ‘빨리 빨리’가 딱 들어맞았던 거죠.
일상의 보배로운 양식이었던 국수였지만, 어느 여름밤 먹었던 ‘특별한’ 국수는 가슴 한구석에 칼날처럼 박혀 있어서, 그 기억 근처에만 가도 통증이 살아나는 것 같아요. 너무나 맛있었지만 먹지 않았으면 좋았을 우동의 기억이죠.
저희 집이 왕년에는 좀 살았대요. 그러다 몰락해서 고달픈 도시 빈민이 됐어요. 혹시 “이 새끼, 까불면 고택골로 간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고택골이 지금의 은평구 신사동이었는데 거기가 공동묘지였거든요. 고택골로 간다는 건 쉽게 말해 죽는다는 뜻이었죠. 이문구의 소설 《장한몽(長恨夢)》 무대가 고택골이에요. 60년대 서울이 급속하게 팽창하면서 인구가 늘다보니 갈수록 사람 살 곳이 부족해졌죠. 서울시에서 급기야 주거 역을 확보하려고 고택골에 있던 무연고자 묘지를 다 파냈어요. 그때 묘지 캐러 나선 하청업자 얘기가 《장한몽》 줄거리죠. 캐다 머리 나오면 잘라서 팔아먹고 금니도 챙기는 하류인생의 얘기예요. 그곳, 고택골이 제가 국민학교 때 살던 곳입니다. 애들하고 놀다 보면 땅바닥에서 뼈 한둘쯤 나오기가 예사였죠. 그걸 갖고 아무렇지 않게 자치기 하고 놀았어요.
국민학교 3학년 즈음이었어요. 밤 11시쯤 됐을까, 자고 있는데 어머니가 깨우는 거예요. 방 한구석에는 양동이 두 개와 나일론 보자기로 싼 짐이 몇 개 있어요. 살짝 보니 보자기 안에는 솥단지가 있고, 양동이에는 쌀이며 고추장 숟가락 등속이 들었더라고요. 여름이라 엄청나게 더웠어요. 부모님과 누나와 저, 온 식구가 그 시간에 집을 나섰어요. 짐을 다 들고요. 서로 아무 말은 안 했지만, 분위기가 굉장히 무거웠어요.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길 아래 포장마차가 있었어요. 부모님을 따라 들어갔는데 우동을 시켜주시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꿀맛인 거예요. 국수라면 질리도록 먹었는데, 그 맛은 또 차원이 달랐어요. 위에 깨소금이 뿌려져 있고 김 가루도 어설프게 묻어 있었죠. 흔하디흔한 멸치육수였는데,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엄청나게 맛있었어요. 그래서 한 그릇 더 시켜달라고 했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에, 그 어두운 분위기에서 저 혼자 정신없이 우동을 입에 집어넣고 있었던 거죠.
그게 고택골에서의 최후의 만찬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우리 가족이 야반도주를 한 거예요. 집세를 못 내서 몰래 도망친 거였죠. 살던 동네를 죄인처럼 떠나면서 먹었던 우동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우동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강력한 미원의 맛이기도 했겠지만, 어린 마음에도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서글프고 잔혹한 삶의 악력을 온몸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폭식한 게 아닌가 싶어요.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 음식이 전투적으로 먹히는 것도 있잖아요.
우동을 두 그릇이나 먹고 배가 빵빵해져서 어딘가로 갔어요. 도착한 곳이 지금의 상암동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이었어요. 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집단 거주지가 있었거든요. 도시 빈민 중 최악의 빈민이 살던 곳이죠. 아버지는 “며칠만 있는다”고 했지요. 결국 거기서 반년을 살았어요. 황석영의 소설 《낯익은 세상》에 나오는 무대가 거기예요. 그 소설처럼 쓰레기를 파내서 먹는 사람들, 저는 많이 봤어요. 쓰레기차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지나가고, 후각을 유린하는 악취가, 잔인한 악취가 천지간에 들어붙어 있었지요.
야반도주하던 날 밤의 우동을 식구들은 여전히 기억해요. 괴로운 기억이니 굳이 떠올려서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맛은 지울 수 없이 또렷하게 남아 있지요. 시간의 공장에서 뽑혀 나온 길고 긴 국수 면발이 어머니의 국수를 감고 돌아 고택골 우동을 싸안고 저를 이끌어 이탈리아 요리사로 만든 게 아닌가 싶네요.
영화 ‘시네마 천국’을 대학 다닐 때 봤어요. 친구가 “죽이는 영화 있다”고 하기에 따라갔죠. 눈은 호강하겠다 싶었거든요. 이탈리아 영화라고 하니 지중해 푸른 바다가 펼쳐지겠고, 잘 그을린 몸매에 비키니 입은 미녀가 나올 것 같고, 와인이며 요리도 잔뜩 나오겠다 싶었죠. 지금은 없어진 호암아트홀에서 조조로 봤는데, 영화관에 딱 우리 둘이 있는 거예요. 영화가 점점 펼쳐지는데 세상에 무슨 이런 별천지가 있나 했어요. 이런 게 이탈리아 정서구나,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마침 제 여동생이 이탈리아어과를 다녀서, 이탈리아 사람들 성정이 우리하고 비슷하다는 말도 들어서 그런지 정겨운 느낌도 들었어요. 그러다 서서히 이탈리아 짝사랑에 빠진 거죠.
이탈리아에 가겠다고 결심한 건 13년 전이었어요.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다가 다시 시작한 거죠. 국내에 파스타가 슬슬 들어오기 시작할 무렵이었어요. 이탈리아 요리 몇 가지 배워서 조그맣게 식당이나 하자 싶었죠. 몇 달 배우고 오려고 했는데, 가보니까 어마어마한 거예요. 미트 소스하고 크림소스 파스타가 전부인 줄 알았던 신출내기 앞에 신세계가 펼쳐진 거죠. 끝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멋진 요리사가 되고 말겠다’는 거창한 결심보다는 안 배우면 후회할 것 같아서 열심히 했어요.
이탈리아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파스타라는 ‘국수’가 저를 강하게 끌어당긴 것 같아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마다 국수 공장이 있었어요. 공장이라고 하지만 요즘 볼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이 아니라, 기계를 들여놓은 가게 수준이었죠. 거기서 서리해 먹는 국수 맛이 끝내줬어요. 갓 뽑은 국수를 어린애 키보다 약간 높은 시렁에 걸어 놓고 말리는데요, 축 늘어져 있는 국수를 주인 몰래 잘라 먹는 거죠. 막 널어서 축축할 때 말고, 거의 말라서 짭짤하면서 꼬독할 때가 제일 맛있었죠.
서리 국수도 맛있지만 역시 저희 어머니 국수가 최고였죠. 살기 어려워서 자주 먹던 게 국수였어요. 미군 원조 물자로 나온 밀가루가 쌌으니까 그걸로 줄기차게 만들어 먹었던 거죠. 예전에 탤런트 최진실 씨가 수제비가 지긋지긋하다고 했던 것도 밀가루로 변주가 가능한 수제비를 질리도록 먹어본 기억 때문일 거예요. 전 밀가루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생각해요. 밀가루가 돈 없고 배고픈 사람들의 DNA를 구성해준 셈이니까요.
저를 요리로 끌어들인 게 국수였다면, 제 요리의 영혼을 주신 분은 어머니세요. 경상도 출신이신 어머니는 손맛이 남다르셨어요. 그 솜씨로 시장통에서 밥집 같은 걸 하셨어요. 화려한 음식은 못 해주셨지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셨죠. 재료가 너무나 척박한 상태에서, 재료 하나에 집중해서 그 맛을 최대한 살리는 묘미를 아셨던 거죠. 통째로 넣고 우린 멸치육수 하나만 가지고도 세상 어디에 없는 맛을 내셨어요. 잘사는 친구나 친척집에 가면 상다리가 부러지라 온갖 음식을 다 내놨죠. 그런데 먹어보면 맛은 별로죠. 재료는 좋은 데 너무 많은 걸 한꺼번에 넣어서 그래요. 이탈리아 요리가 저랑 잘 맞는 것도 하나에 집중하거든요. 주재료가 두세 가지를 넘지 않아요. 조리법도 단순해요. 재료의 본래 맛을 잘 보여주도록 구성돼 있어요. 복잡하고 화려하지 않아요. 그림 그려놓은 듯한 이탈리아 요리를 자주 보셨다고요? 그건 프랑스 요리를 모방한 거예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게 뭔가 있어 보이죠. 이탈리아 전통요리를 보면 깜짝 놀라요. 요리가 그릇에 턱하니 무뚝뚝하게 담겨 있어요. 모르는 사람은 보고 당황할 정도죠. 이탈리아 만두인 라비올리를 시키면, 소스는 하나도 없이 라비올리만 덜렁 올라와 있어요. 올리브 오일 조금 뿌려져 있고요. 맛을 내는 양념과 소스는 만두 안에 다 있다는 거죠.
손맛이라는 게 코와 혀로 유전되는 거잖아요. 어머니 음식을 먹어본 저는 그걸 흉내 내고 있는 거죠. 어머니가 성격이 급한 편이셔서, 요리를 빠른 속도로 해녀셨어요. 제가 이탈리아에서 요리 배우는 동안 칭찬받았던 게 빨리빨리 잘한다는 거였어요. 이탈리아 사람들 성격이 정말 급하거든요. 우리보다 더 급해요. 말하기 전에 벌써 얼굴부터 벌게지고 손이 먼저 나가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주방에서 어머니의 아들인 제 ‘빨리 빨리’가 딱 들어맞았던 거죠.
일상의 보배로운 양식이었던 국수였지만, 어느 여름밤 먹었던 ‘특별한’ 국수는 가슴 한구석에 칼날처럼 박혀 있어서, 그 기억 근처에만 가도 통증이 살아나는 것 같아요. 너무나 맛있었지만 먹지 않았으면 좋았을 우동의 기억이죠.
저희 집이 왕년에는 좀 살았대요. 그러다 몰락해서 고달픈 도시 빈민이 됐어요. 혹시 “이 새끼, 까불면 고택골로 간다”는 말 들어보셨나요? 고택골이 지금의 은평구 신사동이었는데 거기가 공동묘지였거든요. 고택골로 간다는 건 쉽게 말해 죽는다는 뜻이었죠. 이문구의 소설 《장한몽(長恨夢)》 무대가 고택골이에요. 60년대 서울이 급속하게 팽창하면서 인구가 늘다보니 갈수록 사람 살 곳이 부족해졌죠. 서울시에서 급기야 주거 역을 확보하려고 고택골에 있던 무연고자 묘지를 다 파냈어요. 그때 묘지 캐러 나선 하청업자 얘기가 《장한몽》 줄거리죠. 캐다 머리 나오면 잘라서 팔아먹고 금니도 챙기는 하류인생의 얘기예요. 그곳, 고택골이 제가 국민학교 때 살던 곳입니다. 애들하고 놀다 보면 땅바닥에서 뼈 한둘쯤 나오기가 예사였죠. 그걸 갖고 아무렇지 않게 자치기 하고 놀았어요.
국민학교 3학년 즈음이었어요. 밤 11시쯤 됐을까, 자고 있는데 어머니가 깨우는 거예요. 방 한구석에는 양동이 두 개와 나일론 보자기로 싼 짐이 몇 개 있어요. 살짝 보니 보자기 안에는 솥단지가 있고, 양동이에는 쌀이며 고추장 숟가락 등속이 들었더라고요. 여름이라 엄청나게 더웠어요. 부모님과 누나와 저, 온 식구가 그 시간에 집을 나섰어요. 짐을 다 들고요. 서로 아무 말은 안 했지만, 분위기가 굉장히 무거웠어요.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길 아래 포장마차가 있었어요. 부모님을 따라 들어갔는데 우동을 시켜주시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꿀맛인 거예요. 국수라면 질리도록 먹었는데, 그 맛은 또 차원이 달랐어요. 위에 깨소금이 뿌려져 있고 김 가루도 어설프게 묻어 있었죠. 흔하디흔한 멸치육수였는데,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엄청나게 맛있었어요. 그래서 한 그릇 더 시켜달라고 했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에, 그 어두운 분위기에서 저 혼자 정신없이 우동을 입에 집어넣고 있었던 거죠.
그게 고택골에서의 최후의 만찬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우리 가족이 야반도주를 한 거예요. 집세를 못 내서 몰래 도망친 거였죠. 살던 동네를 죄인처럼 떠나면서 먹었던 우동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우동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강력한 미원의 맛이기도 했겠지만, 어린 마음에도 제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서글프고 잔혹한 삶의 악력을 온몸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폭식한 게 아닌가 싶어요.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 음식이 전투적으로 먹히는 것도 있잖아요.
우동을 두 그릇이나 먹고 배가 빵빵해져서 어딘가로 갔어요. 도착한 곳이 지금의 상암동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이었어요. 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살던 집단 거주지가 있었거든요. 도시 빈민 중 최악의 빈민이 살던 곳이죠. 아버지는 “며칠만 있는다”고 했지요. 결국 거기서 반년을 살았어요. 황석영의 소설 《낯익은 세상》에 나오는 무대가 거기예요. 그 소설처럼 쓰레기를 파내서 먹는 사람들, 저는 많이 봤어요. 쓰레기차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지나가고, 후각을 유린하는 악취가, 잔인한 악취가 천지간에 들어붙어 있었지요.
야반도주하던 날 밤의 우동을 식구들은 여전히 기억해요. 괴로운 기억이니 굳이 떠올려서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맛은 지울 수 없이 또렷하게 남아 있지요. 시간의 공장에서 뽑혀 나온 길고 긴 국수 면발이 어머니의 국수를 감고 돌아 고택골 우동을 싸안고 저를 이끌어 이탈리아 요리사로 만든 게 아닌가 싶네요.
- 맛있다, 내 인생 신정선 저 | 예담
맛은 추억이고, 위로이다. 맛있는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요즘에도 사람들은 어릴 적 먹던 거칠고 투박한 음식을 기어이 찾아다니며 먹는다. 추억을 음미하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이순재 신경숙 이승철 에드워드권 김대우 윤대녕 패티김 배병우 김수영 황주리 강수진 박찬일 이원복 하성란 이지나 배한성 서상호 이진우 진태옥 문훈숙 이왈종 장석주 조태권 이희 승효상 전무송 정끝별 안효주 김윤영 조은과 같은 이 시대 최고의 명사들과 함께 한 끼 식사를 나누며, 그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간절한 맛의 기억을 함께 음미할 수 있게 해준다…
5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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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신정선
1974년 3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다. 고려대 언어학과를 어렵게 입학해 간신히 졸업했다. 2001년 8월 수습 41기로 조선일보에 입사해 날마다 책상에 머리를 찧으며 기사를 쓴다. 2011년 12월 현재 문화부에서 공연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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