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두뇌 집단 위구르의 위엄
국가로서의 재산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축적된 지식ㆍ정보ㆍ경험ㆍ문화 정도는 대단한 것이었다. 왕족ㆍ귀족층은 유목 국가의 전통을 유지했지만 민중은 과거 국씨(麴氏) 고창국(高昌國)이 오아시스의 통상문화 국가의 꽃을 피운 토양 위에 서 있었다.
201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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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확대와 지배에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위구르족이다. 그들은 몽골 출현 당시 일반적으로는 ‘천산 위구르왕국’ 또는 ‘서위구르국’이라고 불리던 유목농경 복합형 통상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9세기 중반에 해체된 위구르 유목 국가의 계보를 계승했고 동부 천산의 남쪽 기슭의 투루판 분지와 북쪽 기슭의 베쉬 발릭(Beshbalik, 투르크어로 ‘다섯 개의 도시’라는 의미, 오늘날의 우루무치)의 두 지역에 걸친 작은 나라였다.
국가로서의 재산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축적된 지식ㆍ정보ㆍ경험ㆍ문화 정도는 대단한 것이었다. 왕족ㆍ귀족층은 유목 국가의 전통을 유지했지만 민중은 과거 국씨(麴氏) 고창국(高昌國)이 오아시스의 통상문화 국가의 꽃을 피운 토양 위에 서 있었다.
지배층은 투르크계였지만 영내에는 먼저 그곳에 살고 있던 인도 아리안계와 한족계, 그리고 아마도 소그드계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티베트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언어 또한 위구르어라는 이름의 투르크어 외에 한어, 소그드어, 티베트어, 페르시아어, 아라비아어, 그리고 산스크리트와 팔리어 등도 함께 사용되었다.
인종ㆍ언어ㆍ문화 등에서 혼합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게다가 각각의 요소가 병존하면서도 서로 무리 없이 섞였다. 사람들은 다문화, 다언어에 익숙했고 다인종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생업 또한 유목ㆍ목축ㆍ농경ㆍ상공업ㆍ국제통상 등 다양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요소가 이 작은 나라에 응축되어 존재했다. 또한 가깝고 먼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여러 나라의 정보도 집중되었을 것이다. 작은 나라였지만 무서운 정보 국가였던 것이다.
몽골 시대에 유라시아의 동서 지역에서 활약한 ‘위구르인’ 가운데 독특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띄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어로 당시 ‘위구리스탄위구르의 땅’이라고 불린 이 나라는 인재 공급의 보물창고였다.
이미 1209년 위구르의 왕 이디쿠트(Idiqut, 이디쿠트는 한자로 ‘亦都護’라고 적는다.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왕호. 그 의미는 투르크어로 ‘행복의 주인’ 또는 ‘신성한 영광’이라고 해석된다)의 바르축이 대신의 진언을 받아들여 막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대몽골국’과 인연을 맺었다. 금왕조 진격 작전이 있기 2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을 건 이 선택은 도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입도선매’는 멋지게 적중했다. 위구르 왕은 칭기즈 집안의 딸을 맞이해 ‘부마’(駙馬, 투르크어로 퀴레겐, 몽골어로는 구르겐)가 되었고 몽골 체제 아래에서 각별한 대접을 받으며 ‘준왕가’의 지위를 유지했다. 한편 ‘위구르인’의 이름 아래에서 총칭되는 신료ㆍ주민들은 각각 집안과 재능에 따라서 몽골제국의 각지에서 칭기즈 왕가의 사부(師傅), 가정교사에서 참모, 행정관, 재무관, 군인, 기업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했다.
위구르는 ‘몽골 통치의 교사’라고 불릴 정도로 몽골과 일체화되었다. 아니 오히려 위구르는 몽골을 유도해서 한편으로는 탈취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군사적인 색채가 농후했던 키타이족과 비교해 볼 때 활동의 다면성ㆍ광역성이라는 면에서 위구르 쪽이 한 수 위에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키타이는 몸으로 승부했고 위구르는 머리로 승부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유라시아 서방에 존재하는 방대한 투르크계 여러 부족의 복잡함 속에서 동일한 투르크계로 동일한 언어를 구사하는 위구르 쪽이 처음부터 키타이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위구르는 ‘준몽골’이라기보다 오히려 ‘위구르라는 이름의 몽골’이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현실과 가까울 것이다. 라시드 앗딘의 저서 《집사》 첫 머리에 있는 〈부족지(部族誌)〉에서 위구르를 몽골의 여러 부족과 나란히 설명한 것이 그 증거 중 하나다.
몽골 시대에 ‘위구르’라고 불린 사람들은 거의 불교도(또는 마니교의 요소를 많이 수용한 불교도)였다. 흔히 ‘위구르’에서 무슬림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것은 오해다.(물론 일부이기는 하지만 무슬림이 된 ‘위구르인’도 있었다.) 참고로 ‘위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몽골의 교사 역할을 했던 키타이족도 대부분 불교도였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몽골 시대를 중심으로 그 앞뒤 시기를 포함해 위구르문자, 위구르어로 기록된 출토 문헌들이 20세기 초반에 투루판과 돈황 등에서 발견되어 세계에 소개되었다.
국가로서의 재산은 대단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축적된 지식ㆍ정보ㆍ경험ㆍ문화 정도는 대단한 것이었다. 왕족ㆍ귀족층은 유목 국가의 전통을 유지했지만 민중은 과거 국씨(麴氏) 고창국(高昌國)이 오아시스의 통상문화 국가의 꽃을 피운 토양 위에 서 있었다.
지배층은 투르크계였지만 영내에는 먼저 그곳에 살고 있던 인도 아리안계와 한족계, 그리고 아마도 소그드계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티베트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언어 또한 위구르어라는 이름의 투르크어 외에 한어, 소그드어, 티베트어, 페르시아어, 아라비아어, 그리고 산스크리트와 팔리어 등도 함께 사용되었다.
인종ㆍ언어ㆍ문화 등에서 혼합적인 성격이 두드러졌다. 게다가 각각의 요소가 병존하면서도 서로 무리 없이 섞였다. 사람들은 다문화, 다언어에 익숙했고 다인종의 피가 몸속에 흐르고 있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생업 또한 유목ㆍ목축ㆍ농경ㆍ상공업ㆍ국제통상 등 다양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요소가 이 작은 나라에 응축되어 존재했다. 또한 가깝고 먼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여러 나라의 정보도 집중되었을 것이다. 작은 나라였지만 무서운 정보 국가였던 것이다.
몽골 시대에 유라시아의 동서 지역에서 활약한 ‘위구르인’ 가운데 독특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띄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어로 당시 ‘위구리스탄위구르의 땅’이라고 불린 이 나라는 인재 공급의 보물창고였다.
이미 1209년 위구르의 왕 이디쿠트(Idiqut, 이디쿠트는 한자로 ‘亦都護’라고 적는다.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왕호. 그 의미는 투르크어로 ‘행복의 주인’ 또는 ‘신성한 영광’이라고 해석된다)의 바르축이 대신의 진언을 받아들여 막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대몽골국’과 인연을 맺었다. 금왕조 진격 작전이 있기 2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을 건 이 선택은 도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입도선매’는 멋지게 적중했다. 위구르 왕은 칭기즈 집안의 딸을 맞이해 ‘부마’(駙馬, 투르크어로 퀴레겐, 몽골어로는 구르겐)가 되었고 몽골 체제 아래에서 각별한 대접을 받으며 ‘준왕가’의 지위를 유지했다. 한편 ‘위구르인’의 이름 아래에서 총칭되는 신료ㆍ주민들은 각각 집안과 재능에 따라서 몽골제국의 각지에서 칭기즈 왕가의 사부(師傅), 가정교사에서 참모, 행정관, 재무관, 군인, 기업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했다.
위구르는 ‘몽골 통치의 교사’라고 불릴 정도로 몽골과 일체화되었다. 아니 오히려 위구르는 몽골을 유도해서 한편으로는 탈취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점은 군사적인 색채가 농후했던 키타이족과 비교해 볼 때 활동의 다면성ㆍ광역성이라는 면에서 위구르 쪽이 한 수 위에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키타이는 몸으로 승부했고 위구르는 머리로 승부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물론 유라시아 서방에 존재하는 방대한 투르크계 여러 부족의 복잡함 속에서 동일한 투르크계로 동일한 언어를 구사하는 위구르 쪽이 처음부터 키타이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위구르는 ‘준몽골’이라기보다 오히려 ‘위구르라는 이름의 몽골’이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현실과 가까울 것이다. 라시드 앗딘의 저서 《집사》 첫 머리에 있는 〈부족지(部族誌)〉에서 위구르를 몽골의 여러 부족과 나란히 설명한 것이 그 증거 중 하나다.
몽골 시대에 ‘위구르’라고 불린 사람들은 거의 불교도(또는 마니교의 요소를 많이 수용한 불교도)였다. 흔히 ‘위구르’에서 무슬림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것은 오해다.(물론 일부이기는 하지만 무슬림이 된 ‘위구르인’도 있었다.) 참고로 ‘위구르’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몽골의 교사 역할을 했던 키타이족도 대부분 불교도였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몽골 시대를 중심으로 그 앞뒤 시기를 포함해 위구르문자, 위구르어로 기록된 출토 문헌들이 20세기 초반에 투루판과 돈황 등에서 발견되어 세계에 소개되었다.
-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스기야마 마사아키 저/이경덕 역 | 시루
이 책은 그동안 야만족, 미개인이라고 치부되었던 유목민들이 은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인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오아시스에 사는 정주민들의 고립을 막아주는 문화 교류자였으며, 그들이 사용한 아람어가 소그드문자를 비롯해 위구르문자와 만주문자, 한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등의 그동안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있어 신선한 충격을 준다.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그동안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왜곡, 축소되었던 유목민들의 역사를 하나하나 되짚음으로써 동과 서로 단절되었던 세계사를 연결시켜 비로소 역사의 실체를 마주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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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스기야마 마사아키
1952년 시즈오카에서 태어나 교토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교토여자대학 조교수를 거쳐 현재 교토대학 교수다. 주요 연구 주제는 몽골 시대사로 일본 내에서 몽골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1995년 《쿠빌라이의 도전》으로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했고, 2003년 시바료타로상, 2006년 《몽골제국과 대원 울루스》로 일본학사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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