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보다 많은 거기, 아이리시 펍
아일랜드에서 ‘펍’은 단순히 ‘술 파는 가게’가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소중한 가문의 전통으로 여겨진다. 또 편의 시설이 취약한 시골에서는 지역 커뮤니티의 중요한 만남과 소통의 장소가 된다.
글ㆍ사진 이현구
20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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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리 바

 


아일랜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커피보다 더 새까만 몸통 위에 카푸치노보다 더 촘촘한 크레마가 덮인 흑맥주, ‘기네스(Guinness)’가 아닐까 싶다.


아일랜드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을 한 번쯤 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이 나라에는 펍이 왜 이렇게 많아?” 맞다! 아일랜드는 어느 곳을 가든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이 펍이다. 밥집보다 많고 카페보다 많다. 거짓말 안 보태고 평균 두 블록에 하나는 있는 것 같다.


기네스를 비롯한 맥주, 위스키 등 주류 산업이 아일랜드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제적 이유를 차치하고라도 펍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하다. 아일랜드에서 ‘펍’은 단순히 ‘술 파는 가게’가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소중한 가문의 전통으로 여겨진다. 또 편의 시설이 취약한 시골에서는 지역 커뮤니티의 중요한 만남과 소통의 장소가 된다.


더블린은 국제도시답게 다국적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모임 장소는 전통 펍이다. 물론 친구 두서넛과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실 때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만나기도 하지만, 생일 파티나 요즘 대세인 밋(업meet up,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된 같은 취미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오프라인 모임) 같은 단체 모임이라면 단연 펍이 대세다. 하긴 비바람이 잦은 자연환경에서 사람들이 야외 활동을 즐기기보다 실내로 모여드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싶다. 특히 춥고, 비가 자주 내리고, 밤이 일찍 찾아오는 아일랜드의 길고 우울한 겨울을 펍에서 나누는 왁자지껄한 농담과 웃음 없이 나기란 상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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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 바

 

 

하지만 조용하고 편안한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펍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펍은 엄청나게 시끄럽다. 옆 사람과 말할 때도 거의 소리 지르듯 해야 할 때가 많다. 게다가 아일랜드 사람들은 펍 안에서든 밖에서든 잔을 들고 서서 마시는 데 익숙하다. 사람이 많을 때는 펍 앞의 인도까지 점령한다. 20분만 지나면 다리가 아프고 팔도 아프다. 한겨울에 민소매 드레스와 하이힐 차림으로, 무거운 파인트 잔을 한 손에 들고 밖에 서서 술을 마시는 아이리시 여자들을 보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아이리시들은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도 두루 말을 섞으며 가볍고 격식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솔직히 나처럼 낯가림이 있는 사람에게는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어쨌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피어나고 크고 작은 모의가 이루어진다. 예술가들은 예술을 논하고, 문학가들은 문학을, 사업가들은 사업을 논하는 곳. 한마디로 프랑스 파리에 카페가 있다면, 더블린에는 펍이 있다.


밴드 공연, 코미디 쇼,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일반적으로 어떤 콘셉트를 전달할 때 이야기 화법으로 풀어내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서는 ‘아일랜드의 전설과 민화를 청중 앞에서 연기하듯 들려주는 방식’의 뜻으로 쓰였다), 플리 마켓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장소, 그래서 관광객에게 가장 많은 볼거리를 선사하는 곳도 바로 펍이다. 특히 관광특구인 템플바(Temple Bar)와 그래프턴(Grafton) 거리 주변으로 유명한 펍들이 몰려 있다. 그리고 많은 펍이 매일 밤 아일랜드 전통 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밴드 공연을 쉬는 날 없이 선보인다. 게다가 대부분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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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너휴스

 

 

템플바 구역의 상징이자 더블린의 대표적 명소인 템플 바(The Temple Bar), 제임스 조이스가 즐겨 찾았다는 데이비 번스(Davy Byrnes)와 베일리 바(Bailey Bar), 더블린의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포터 하우스(The Porter House), 10평 남짓한 지하의 작은 펍 도슨 라운지(The Dawson Lounge), 아일랜드 국민밴드 더블리너스가 사랑한 오도너휴스(O’Donoghues),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펍으로 스토리텔링과 아이리시 전통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브레이즌 헤드(The Brazen Head) 등 사실 유명하다는 펍을 일일이 소개하자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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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스 바

 

 

물론 외국에 오래 살다보면 눈이 휘둥그레져서 열심히 셔터를 누르던 처음의 감동과 흥분은 서서히 퇴색한다. 그다음부터는 관광객이 몰리지 않는 장소, 로컬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는 곳,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냥 내 맘에 드는 곳을 찾아 나서는 거다. 그때부터 그 도시에 사는 진짜 재미가 시작된다.


한번은 존이 글래스네빈 세미터리(Glasnevin Cemetery) 옆에 있는 ‘그레이브 디거스(Grave Diggers, 무덤 파는 사람들)’라는 펍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공동묘지에서 땅을 파던 인부들이 중간에 쉴 때나 일 끝내고 기네스 한 잔씩 하러 가던 펍이래. 더블린에서 아주 오래된 펍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래서 원래 이름은 ‘존 캐버너프(John Kavanagh)’인데, ‘그레이브 디거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고 했다.


존이 일을 일찍 마친 하루, 우리는 더블린 북쪽에 있는 그레이브 디거스로 차를 몰았다. 한눈에도 오랜 단골로 보이는 사람들 몇몇이 바맨과 웃음 섞인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뿐, 평일 오후의 펍은 조용했다. 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는 약속이나 한 듯 잘 익은 기네스가 한 잔씩 놓여 있었다. 오래된 펍에서 풍기는 묵은 나무 냄새와 발효된 보리 냄새가 어우러져 묘하게 아늑했다. 우리도 기네스를 시켜 한 손에 잔을 들고 펍 밖으로 나오니 담장 너머로 바로 글래스네빈 세미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누군가의 땀과 수고로 세워졌을 수많은 묘들이 세월의 때를 입고 그곳에 있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직업이지만 모든 노동을 손으로 하던 시절, 공동묘지에서 무덤을 파는 ‘그레이브 디거스’는 하나의 특화된 직업이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은 아니었다. 한국의 농부들이 농사일을 하다가 잠시 쉴 때 막걸리로 목도 축이고 출출한 속도 달래는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기네스를 마셨다. 아일랜드의 궂은 날씨를 견디며 고단한 노동을 하던 이들에게 기네스 한 잔이 건네는 위로는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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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네빈 세미터리와 이웃하고 있는 ‘존 캐버너프’. ‘그레이브 디거스’로도 불린다.

 

 

기네스 회사가 새로운 맥주 양조장 ‘오픈 게이트 브루어리(Open Gate Brewery)’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때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고 있는 11월 중순이었다.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에 있는 기네스 스토어하우스에서 겨우 두 블록 떨어진 거리다. 거대한 전시관으로 꾸며놓은 기네스 스토어하우스와 달리 ‘오픈 게이트 브루어리’는 양조장 한편에 펍이 함께 있는 복합공간으로,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저녁에만 펍을 열고 양조장 내부를 공개하는 형태다. 입구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한 입장권을 보여주면 맥주병 뚜껑을 하나씩 주는데, 그 토큰으로 바에서 네 가지 맥주를 직접 골라 맛볼 수 있다. 그다음부터 마시는 맥주는 따로 돈을 내야 한다.


펍 내부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수많은 파이프로 복잡하게 연결된 커다란 맥주 탱크들이 푸른 형광 조명을 받고 있는 모습이 공상과학 영화처럼 그럴듯했다. 각각의 맥주 탱크에서 어떤 맛과 향의 맥주가 익어가고 있을지 궁금했다.


맞은편 바에서는 젊고 명랑한 바텐더들이 벽에 걸린 복잡한 메뉴판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손님들에게 각 맥주의 특징을 설명하느라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우리도 바로 가서 메뉴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메뉴판에 빼곡한 맥주의 이름이 기네스 빼고는 모두 낯설었다. 오픈 게이트 브루어리에서 생산하는 맥주는 요즘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크래프트 비어’, 일명 수제 맥주다. 전통의 맛을 일관되게 지키며 대량 생산하는 유명한 브랜드 맥주와는 달리 독특한 맛과 개성, 신선함을 생명으로 소량 생산하는 것이 특징이다. 아일랜드도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수제 맥주 시장이 서서히 성장하는 추세다. 아일랜드의 ‘전통’을 대표하는 기네스 회사가 적극적으로 수제 맥주 시장에 뛰어들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제 기네스뿐 아니라 에일, 라거, 휘트 등 다양한 종류, 다양한 이름을 가진 맥주들이 기네스의 상징인 하프 로고를 달고 로컬 펍으로 진출하고 있다.


우리는 라거, 에일, 스타우트(흑맥주), 벨기에 스타일 휘트 비어를 골고루 시켰다. 맥주마다 볼륨감과 목 넘김, 첫맛과 뒷맛, 향이 모두 다르니 재미있다. 맛에 예민한 내가 술을 잘 마셨다면 이런 맛보는 직업이 딱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떤 술이든 한 잔만 먹어도 얼굴이 군고구마가 되니 체면상 포기한 지 오래다. 이렇게 태생부터 술과는 친하지 않은 나지만, 누구에게든 아일랜드의 맛있는 맥주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아이리시 남편이 우리나라 맥주 ‘카스’를 최애한다는 것은 비밀로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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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 회사가 수제 맥주 시장에 야심차게 뛰어들며 문을 연 오픈 게이트 브루어리.

 

 

 


 

 

초록빛 힐링의 섬 아일랜드에서 멈추다이현구 저 | 모요사
우리가 모르는 아일랜드의 숨은 속살은 무엇일까? 요리하고 기타 치는 아일랜드 남자를 만나 아일랜드에 정착한 지 9년. 그녀가 들려주는 아일랜드 이야기는 흔한 가이드북에서는 만날 수 없는 속 깊은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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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구

아일랜드에 살면서 느끼고 경험한 일상과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마야 리Maya Lee’라는 필명으로 카카오 브런치를 통해 다른 이들과 나누고 있다. 극본 번역가로서 동시대 아일랜드 연극을 한국어로 번역해 무대에 소개하는 작업도 한다. 현재 기타 치고 요리하는 아이리시 남편과 함께 여행 같은 삶을 꿈꾸며, 더블린 근교의 바닷가 마을 브레이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