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모이지 않는다고 하자 가계부를 쓰라고 권유 받았다.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가계부 앱을 열었다. 어느 항목에 체크하지? 식비? 생필품? 문화생활? 건강? 품목은 커피지만 어떤 항목에도 적용 가능하고 심지어 지금은 글쓰기에 필요해서 주문한 거니까 문구로 볼 수도 있지 않나? 사소한 일로 허를 찔리자 커피가 평소보다 더 당겼다. 두 잔을 마시도록 끙끙 앓다 아무 데도 체크하지 못하고, 글도 못 써 심란해진 채 카페를 나와 술을 마시러 갔다.
안녕하세요. <오은의 옹기종기> 오은입니다. 그래픽 디자이너 이기준 작가님의 에세이 『단골이라 미안합니다』에서 한 부분을 읽어드렸습니다. 이기준 작가님은 카페를 거실처럼 활용하는 ‘카페 생활자’이기도 한데요. 그렇다면 작업을 하기 위해 찾아간 카페에서의 지출을 가계부 어느 항목에 넣어야 할까요? 카페가 단순히 커피를 마시기 위한 곳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죠. 그렇게, 고민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웃음) 오늘 <책읽아웃 - 오은의 옹기종기>에서 이기준 작가님과 함께 나에게 딱 맞는 카페를 찾는 어려움과 세세한 아름다움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인터뷰 – 이기준 편>
오은: 작가님 원래 작업실을 갖고 계셨잖아요. 그러다 카페에서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기준: 사실 작업실이 있을 때도 늘 그곳에서만 작업을 하진 않았고, 때때로 카페로 나가곤 했는데요. 저는 공간에 익숙해지면 너무 편안해지는 나머지 집중을 잘 안 하게 되어서요. 짧은 시간 안에 집중을 해야 할 때는 장소를 바꿔주는 방법을 많이 써왔고요. 그럴 때 주로 가는 곳이 카페였어요.
오은: 작가님은 카페를 고르는 기준이 엄청 깐깐하시더라고요.(웃음) 커피 맛도 좋아야 하고, 음악 취향도 맞아야 하던데요. 내게 딱 맞는 카페가 하루에 발견되진 않잖아요. 그럼에도 이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는 뭔가요?
이기준: 감각이 생겨요. 이 공간이 괜찮을 것 같다, 여기는 아니다, 하는 게 멀리서도 어느 정도 보이더라고요. 카페 앞을 스쳐 지나가면서 안을 힐끗 본다거나 간판이 어떻게 생겼는지, 마감재를 무엇을 썼는지, 카페 이름이 뭔지를 보기도 하는데요. 이런 요소에도 다 주인장의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정보가 다 있거든요. 물론 틀릴 때도 있지만 어느 정도는 겉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맞아 떨어지더라고요. 학습이 되는 거죠. 여행 다닐 때도 실패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찾잖아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방향이 잡히는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주로 다니는 몇 군데는 몇 년에 걸쳐서 찾은 곳들이에요.
오은: 그동안은 디자이너로서 책에 참여해왔는데요. 어느덧 두 번째 책이 나왔어요. 이제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졌나요?
이기준: 전부터 강했죠.(웃음) 농담이고요. 제가 20대 때 재미있게 읽은 책 중 『댄스 댄스 댄스』라고 있어요. 줄거리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요. 그때 제가 취했던 메시지는 완벽하게 익혀서 무엇을 하려고 하면 안 돼, 늦어, 그런 순간은 오지 않아, 지금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못해, 이런 거였어요. 마찬가지로 아직 부족하니까 책을 낼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한 권도 못 낼 것 같고요. 부족하지만 이렇게 책을 꾸준히 내야 더 나아질 테니까요. 그런 생각으로 계속 쓰려고 하고 있어요.
오은: 이제 이기준 작가님 소개를 해드릴게요. “그래픽 디자이너, 작가, 고양이 ‘연희’와 ‘연남’이의 집사.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면서 노는 걸 좋아했다. 숙제를 다 하고 나면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10대 시절, 헤비메탈을 처음 들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함께 듣던 친구들은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기준은 화려한 음반 표지에 흥분했고 가상의 밴드를 만들어 밴드의 로고와 앨범 디자인을 하며, 그러니까 역시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음반 표지를 구경하면서 그래픽 디자인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교 3년은 오직 학교 공부에만 전념했다. 입시가 너무 싫어서, 무조건 기간 안에 끝내겠다는 마음이었다.
적성 검사 결과는 늘 ‘예술가’였다. 대학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은 두 달 만에 그만 두었고,
이후 디자인 전문 회사, 출판사 등에서 일을 했지만 가장 오래 다닌 게 2년일 정도로 기질적으로 조직을 싫어한다. 그리고 2006년, 자신이 사장이자 직원인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되었다. 유유 출판사의 거의 모든 책과 민음사의 쏜살문고, 난다의 읽어본다 시리즈를 디자인했고, 2019년에는 올해의 출판인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당시 이기준의 수상 소감은 “이제야 주시다니!” 였다.
이른 시간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침형 인간. 작업이 막히면, 덮어두고 당분간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쓴다. 영감 삼아 즐겨 구경하는 물건은 손목시계인데 정밀하게 제작된 물건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물건은 안경이고, 인류가 고안한 최고의 발명품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시답잖은 일에 막대한 에너지를 기꺼이 쏟는 사람 이기준. 복사용지는 흔히 사용하는 A4용지가 아니라 종이가게에서 모조지 80g을 주문해서 사용한다. 버클 핀을 구멍에 꽂는 허리띠는 사용하지 않는다. 머그잔을 싫어하고, 무거운 책을 싫어한다.
머피의 법칙이 어김없이 적용되는 사람으로, 이기준이 좋아하는 것은 다 없어지곤 한다. 저녁밥을 먹은 이후에는 일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대신 ‘이러면 어때?’, ‘저러면 어때?’ 해본다. 그러면 선택지가 훨씬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입니다. ‘쏜살문고’ 같은 시리즈 디자인 작업도 하셨잖아요. 이런 작업이 더 힘들 것 같은데 어떠세요?
이기준: 과거에는 시리즈라고 하면 동일한 양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요즘은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는 경우도 많거든요. ‘쏜살문고’를 하면서 배운 것도 그거예요. 큰 틀은 민음사 미술부에서 잡았는데요. 앞표지 디자인은 심볼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제약을 두지 않았던 거죠. 시리즈인데도 앞표지는 책 내용에 따라 자유롭게 가고, 책날개, 뒷표지 등만 디자인을 통일했어요. 그렇게 작업을 하니까 시리즈를 작업하면서도 한 권 한 권을 아주 재미있게 할 수 있었어요. 보통 책 디자인을 할 때는 앞표지부터 책 등, 뒷표지, 책날개로 흐르는 영역을 다 생각하는데 앞표지만 생각하면 된다고 하니까 한결 부담이 덜하고, 작업하기가 아주 좋더라고요. 그러면서 시리즈를 이렇게 풀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오은: 첫 책에는 ‘죄송’이, 두 번째 책에는 ‘미안’이 들어가요. 그런데 청취자 분들도 느끼셨겠지만 작가님은 그런 말을 평소에 거의 안 쓰실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웃음)
이기준: 참 고약한 상황이에요.(웃음) 『단골이라 미안합니다』라는 제목을 출판사에서 뽑아주셨는데요. 이 자체는 마음에 들었는데 하필 앞서 낸 책이 『저, 죄송한데요』여서 좀 걸렸어요. 내가 그렇게 죄송해하고, 미안해하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망설였지만 제목이 좋아서 쓰게 됐고요. 사실 『저, 죄송한데요』의 ‘죄송’은 미안해하는 의미는 아니에요. 아주 소심한 캐릭터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말문을 트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지은 제목이라 『단골이라 미안합니다』의 ‘미안’과 같은 의미는 아닌 거죠.
오은: 그럼 이번에는 『단골이라 미안합니다』를 작가님이 직접 소개해주세요.
이기준: 제 생각에 이 책은 정말로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듯 읽을 수 있는 책 같아요.독자 분들도 읽으시다 보면 제가 맞은 편에 앉아서 같이 대화하는 기분이 들 것 같고요. 요즘처럼 소소한 즐거움이 간절했던 적이 없는데요. 그렇다 해도 그 모든 즐거움을 다 삭제하기는 아쉽잖아요. 그럴 때 이 책이 조금은 유쾌하게 만들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은: 『저, 죄송한데요』는 작가님이 직접 디자인도 하셨잖아요. 이번 책은 디자인을 다른 분이 하셨어요. 저자이긴 하지만 디자인 면에서 했던 요구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이기준: 처음부터 저는 제 의지를 확실히 밝혔어요.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요. 출판사에서는 그래도 디자인에 의견을 주면 좋겠다고 하셔서 물어보시면 제 의견을 말씀드리기는 했는데요. 늘 제가 남의 책을 디자인 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이 작업할 때는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작업을 하게 두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물론 관여하지 않겠다고 해도 제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죠. 그런데 이번 책은 디자이너 분과 편집자 분이 워낙 방향을 잘 잡아주셨어요.
오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처럼 카페와 커피,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글을 쓴 챕터가 있어요. ‘공간의 경계’라는 글에서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커피가 아니라 카페가 더 중요한 거죠?” 또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나눌 수 없는 일은 나누지 맙시다.””(91쪽) 보니까 커피만 맛있어도 안 되고 카페 분위기도 좋아야 하는데 카페가 좋아도 커피가 맛있으면 또 안 되는 거예요. 제 경우에는 확률적으로 인테리어나 음악이 좋았던 곳에서의 커피가 맛있더라고요. 동의하세요?
이기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자주 다니는 카페들이 저마다 달라요. 분위기도, 맛도, 위치도 제각각이거든요. 그럼에도 저마다 괜찮은 이유가 있는 거죠. 굳이 그걸 나눠서 분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이 카페는 커피 맛 별 다섯 개, 이 카페는 네 개, 하는 식으로.(웃음) 사실 저는 아주 허술하고, 까다롭게 구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오은: 우동집 에피소드가 기억 나요. 홀에는 나오지 않고, 주방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엿듣는 데 그게 기분이 좋았다 하셨던 에피소드죠.
이기준: 음악이 계속 좋더라고요. 아는 음악도, 모르는 음악도 나오는데 보니까 손님들 들으라고 틀어놓은 음악이 아니고요. 카세트 테이프를 꽂는 낡은 라디오가 주방에 있는데 거기서 주인장이 우동을 만들면서 들으려고 틀어놓은 거더라고요. 이 사람이 정말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듣는구나, 생각이 들었고요. 이 가게를 손님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공간으로 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그게 손님한테도 좋은 거죠. 그게 아주 기분이 좋았어요.
오은: 최근 디자인의 흐름이랄까, 관심 가는 디자인이 있나요?
이기준: 지금 활동하는 젊은 디자이너 분들 중에 잘하고 있는 분들이 많아서 놀랄 때가 많아요. 그런데 저와 너무 밀접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 작업은 잘 안 보게 돼요. 당연히 찾아서 보는 경우는 거의 없고요. 우연히 보게 되면 보는 건데요. 고집이 센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영향을 잘 받기도 해서요.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제 일과 상관 없는 데에 시간을 쓰는 편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동시대 디자인이나 디자이너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어요. 그렇지만 가끔 서점에 가서 보면 민음사 미술부가 디자인을 잘하는 것 같더라고요. 봄날의책 출판사에서 나오는 시인선 디자인도 좋아해요.
오은: <오은의 옹기종기> 공식 질문을 드릴게요. 먼저 <책읽아웃> 청취자에게 영업하고 싶은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기준: 『더 이상 아이를 먹을 수는 없어!』입니다. 그림책이고요. 옛날, 어느 곳에 아이를 주식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설정이에요. 이게 섬뜩하고 괴기스러운데요. 책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그림도 정말 예뻐요. 제가 여기서 더 말하면 책 보는 재미를 해칠 것이므로 더 이상 얘기할 수는 없는데요. 근 몇 년 제가 본 그림책 중에 최고였어요.
오은: 두 번째 질문, 『단골이라 미안합니다』가 한 권 있다면 누구에게 선물하고 싶으세요?
이기준: 카페를 차리고 싶은데 어떻게 꾸려갈지 알쏭달쏭한 분께 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이 말이 책 내용을 참고해서 이렇게 만들어달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제가 좋다고 말한 것들이 그 분에게는 전부 싫은 것들일 수 있잖아요. 또 제가 싫다고 한 것이 그 분에게는 아주 좋은 것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싫어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나, 싫어하지만 하나,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할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면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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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선
읽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