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런던,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첫눈에 서로가 ‘내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가능한 한 많은 상대방과 섹스하는 게 목표인 듯한 주변 사람들에게 휩쓸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주변에서 다소 놀리듯 별난 사람,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취급하는 것에도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운명적으로 마주친 두 사람은 곧장 결혼에 이르렀고, 아이를 여럿 키울 수 있는 거대한 교외의 저택을 구입했다. 두 사람만의 왕국에서 첫째 아이가 태어났고, 둘째 아이가 곧장 태중에 들어섰다. 피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젊은 부부에게 주변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참견하려는 기색을 비치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정상적인 행복을 방어했다.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따뜻한 사랑이 넘치는 대가족을 꾸리는 것이 자신들이 이 세상에 뿌리내린 근거라고 믿었다.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해리엇이 그전까지 얼마나 자신의 행복에 대해 자신만만했느냐면, 여동생 사라가 낳은 다운증후군 아이를 보면서 이 아이가 일종의 징벌이자 결과라고 남몰래 생각했었다. “[사라와 윌리엄의] 싸움이 아마도 몽고인 같은 애를 끌어낸 것이리라-그래, 그래, 물론 그런 사람을 몽고인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하지만 그 작은 여자애는 약간 칭기즈칸 같지, 안 그래? 납작한 작은 얼굴에 찢어진 눈을 가진 아기 칭기즈칸?” 그러나 그 직후, 정말 징벌처럼, 벤이 찾아왔다. 벤, 벤, 체인즐링의 결과물 같은 아이.
“이 애는 예쁜 아기가 아니었다. 전혀 아기같이 생기지도 않았다. (...) “이 아이는 도깨비나 요괴나 뭐 그런 것 같아요.””
“결코, 아니 한 번도 그 애는 사랑스러운 순간이 없었다. 그 애는 저항하고 버둥대고 싸웠다.”
“(두 부부는) 그 애가 태어나려는 의지를 가지고 그 애나 그 비슷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무 방어 능력이 없는 자신들의 평범함을 침범한 것이라고 느꼈다.”
태아였을 때부터 유별나게 엄마를 괴롭히던 벤은 세상 밖으로 나와서도 뭔가 달랐다. 그의 무감하고 냉혹한 눈동자는 가족들을 끊임없이 응시하며 불편하게 만들었고, 엄마의 젖가슴이 온통 멍투성이가 될 때까지 물어뜯어서 해리엇이 모유 수유를 단념할 지경으로 몰아갔으며,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처음에 조금 별난 아이, 남들보다 힘이 세고 고집스러운 아이 정도로 여기던 주변 사람들의 얼굴은 차츰 굳어졌고, 아이다움을 전혀 구현해내지 못하는 이 낯선 꼬마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한다.
벤은 아마도 틀림없이, 인간이 아니다. 지금의 인류 문명이 시작되기 전, 아득한 태고의 황야 어딘가를 지배하던 존재들의 유전자가 격세유전을 통해 불쑥 1970년대에 도착한 것이다.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이 모든 것은 원치 않게(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너무 빨리 임신한 다섯째 아이에 대한 해리엇의 분노가 빚어낸 과대망상이며 피해의식일까? 애당초 엄마라는 존재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미워한다는 게 가능한가? 대체 엄마라는 존재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아이를 낳았을까? 해리엇은 어떤 경우에든 자신이 ‘죄인’이 된다고 느끼며 분노한다. 사람들은 아이를 미워하면 안 된다는 대의명분을 중얼거리며 편리하게 그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혐오를 투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나마 비난하기 쉬운 대상을 찾아내고자 한다. 사람들은 대체 이 아이의 정체가 무엇일까 자문하는 해리엇에게 당신의 그 의심은 지나친 상상력이거나 양육에 지친 여성의 히스테리에 불과한 것이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설파한다.
부모 자식간의 관계란 뭘까, 정상적인 가족이란 무엇일까.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가능한 한 아이를 많이 낳아 그들 모두에게 완벽한 사랑과 안정을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아이들이 안심하고 뛰어놀 수 있는 거대한 주택을 구입했고, 당연히 젊은이 두 사람의 수입만으로는 불가능했으므로 데이비드의 부유한 아버지(그전까지 데이비드는 이혼한 부모에 대한 원망이 있었고 특히 아버지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시했지만)가 선뜻 제공하는 수표로 차액을 충당했다. 아버지를 거부하고 싶지만 아버지가 제공하는 돈과 안락함을 거부하지 못하는, 거기에 기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식 세대의 취약한 처지는, 데이비드와 해리엇이 기대하는 아름다운 가족의 허상을 짐작케 한다. 결국 부모가 자식을 통제하는 방식이 폭력이냐 돈이냐 사랑이냐의 문제이며, 거기에 자발적/비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순응하는 과정이 가족의 구성 방식인 것이다. “행복. 행복한 가정. 로바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는 기쁨에 찬 환상으로 시작하여, “우린 벌 받는 거야. 그뿐이야. (...) 우린 행복해지려고 했어! 행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아니, 나는 행복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결코 없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했지. 그래서 바로 번개가 떨어진 거야”라는 음울한 패배주의로 이끌리는 이야기.
도리스 레싱은 이 소설이 동시대(1980년대 대처 정권하의 영국)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으로 읽히는 것을 경계했지만, 『다섯째 아이』는 동시대의 변화에 무감한 작품이 아니다. 작가는 점점 더 폭력에 무감해지고 폭력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폭력을 휘두르고자 안달이 난 사람들을 지켜보며 인류의 종말이란 이런 형태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류의 악한 형태, 아주 나쁜 형태의 돌연변이라고 여겼던 존재들이 실은 인간들보다 더 오랫동안 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낯선 존재라면, 그리고 수천 년을 묵묵히 인류 문명을 지켜보던 그들이 다시금 이 땅의 소유권과 인간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고 나선다면 어떡할 텐가. 철없는 관용과 과격한 순진함으로 세상의 보수적인 질서를 뒤집어엎고자 했던 1960년대의 젊은이들이 보수반동의 1970년대에 어떻게 재빨리 순응했고, 좀 냉혹하게 말하자면 1960년대 이전으로 퇴보하는 듯한 향수(과거는 언제나 현재보다 더 좋았다)에 위로받다가, 냉전과 경제 양극화 등 무엇이든 그 근거가 될 수 있는 폭력의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결과들이 자신들의 죗값일 리 없다고 부정하게 되었는가.
이 모든 위험한 폭력들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의 실패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거나 폭이 좁은 해석일 것이다. 다만 20세기 중후반의 격렬한 시대의 주인공으로서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이들이 기실 너무 많은 것을 놓치거나 무시한 채 달려온 것은 아니었나, 라는 질문은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베이비부머 세대는 자신들 사이에 슬며시 섞여 있던 기이하고 이질적인 존재가 점점 더 커지면서 자신들을 능가하고 관용이 아닌 냉혹한 정복만을 주장하며 세상을 압도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최후의 관찰자일지도 모르겠다. 인류는 사랑과 이해를 통해 안정적으로 번영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는 게 아니라, 어떤 임계점에 다다라서는 더욱 급격하게 태고로 돌아가, 아예 야만과 폭력의 원점에서부터 새로 시작하려는 것일까. ‘정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은 세월에 따라 계속 바뀌어왔지만, 그때마다 서로가 생각하는 행복과 안전의 기준에 맞지 않는 존재들을 배제해왔던 이들이, 이제 그 모든 ‘비정상’들로부터 어마어마한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은 『다섯째 아이』의 결말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케빈에 대하여』이전에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가 존재했다. 먼 친척으로 『오멘』이나 『엑소시스트』 같은 호러 소설을 꼽을 수도 있다. 『다섯째 아이』는 호러 소설일 수도 있고, SF소설일 수도 있고, 그저 아주 오랜 시간 망상에 빠졌기 때문에 망상이 현실이 되어버린 여성의 섬뜩한 내면을 다룬 드라마일 수도 있다. 그 모든 장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떤 장르를 선택하든지 현실을 너무나도 섬뜩하게 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참으로 악몽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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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미스터리 전문지 『미스테리아』 편집장. 『범죄소설』, 『문학소녀』 등을 썼고, 『코난 도일을 읽는 밤』, 『죽이는 책』 등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