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평론가 미묘의 ‘언박싱 케이팝’ 칼럼이 격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최신 이슈부터 앨범 패키지에 담긴 이야기까지 지금 케이팝의 다채로움을 전합니다. |
어떤 이에게 에스파는 SM 엔터테인먼트의 "이번엔 진심이라고요"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데뷔하는 아이돌마다 맹렬하고 으리으리한 통칭 'SMP'를 (낯 간지러운) 통과 의례처럼 커리어 초반에 배치하고는 했으나, 에스파만은 SMP 외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두 번째 미니앨범
애시드하게 부글거리는 저역이 긴박감을 강조하고, 관악기 계열의 신스가 리드미컬하게 루프되면서 흡사 전장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절박한 멜로디의 솔로와 냉정한 모노톤의 코러스가 주고받으며 인물들을 두텁게 배치하고, 찍어 누르는 기타는 디지털 디스토션으로 더욱 살벌하게 일그러져 있다. 8마디 단위로 랩에서 멜로디로, 결의에서 간절함으로, 서로 다른 공간감으로 장면 전환도 확연하고 단단하다.
전작들이 가상과 실제를 오가는 복잡한 세계관을 설명하는 설정집 같았다면, 슬슬 액션을 기대할 때도 된 것이다. 공간을 찢을 듯 휘젓는 애시드 베이스의 브레이크는 '활극'을 위해 준비된 무대다. 디지팩 버전의 커버 아트도 아예 전투 장비 이미지로 꾸며졌다. 가사 또한 자신과 세계를 말하기보다 팀(또는 '파티')으로서의 전의나 결기 같은 것에 무게를 둔다.
사이버펑크적인 이미지를 활용하다 보니 패키지에는 묘한 기운이 감돈다. 게임 패키지 같다는 점이다. 'KWANGYA Ver.'과 '디지팩 버전'은 가사와 크레딧 페이지가 디지털 환경의 UI를 본따 디자인됐다. 3D 캐릭터를 처럼 수록된 멤버들의 전신 프로필이나 자주 반복되는 장비 이미지도 카탈로그나 설정 자료집 같은 느낌을 주어, "윈터랑 닝닝이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라는 소년들의 질문을 유도하기라도 하는 듯하다. 요소요소에 쓰인 8비트 폰트와 멤버들의 픽셀화된 모노톤 사진까지도, 과거의 게임 패키지 책자를 연상시킨다.
이 미니앨범의 패키지는 포토북 사양의 'KWANGYA Ver.', 'Real World Ver.', '5종의 멤버별 디지팩 버전'으로 나뉜다. 재미있는 건 가상 캐릭터 멤버인 'ae-에스파'는 'Real World Ver.'에만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패키지 속 에스파는 ('갸루'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화려한 차림으로 2000년대 게임 센터에서 네온 조명을 받거나 화상통화를 하거나 즐비한 디저트를 나눠 먹는다. 선공개곡 'Life’s Too Short' 뮤직비디오가 과장된 '뽀샤시'와 이모지, 메이크오버, 심지어 베개 싸움 같은 장치를 나열하며 과장된 '소녀성'을 보여준 것과 상통한다.
얼핏 '광야'와 '현실'을 대립시키는 것 같던 이 기획에서, '리얼월드'는 아이러니하게도 거의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뮤직비디오 속 의상이 등장하는 디지팩 버전의 에스파가 개중 가장 '현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스파는 지금 현실과 가상 사이에 위치해 양자를 오가지 않는다. 'Girls'의 이중성은 차라리, 두 가상 세계가 양극 너머까지 대치돼 있고, 디지팩 버전의 '현실 아이돌' 에스파가 중심에 있다고 할 만하다. 위협적으로 으르렁대는 첫 두 트랙 'Girls'와 '도깨비불 (Illusion)'이 '광야'에, 'Lingo'부터의 세 트랙이 '리얼월드'에 각기 대응한다.
그런데 패키지와 달리 음원은 두 세계 사이의 매끄러운 흐름을 추구한다. 탄력적인 어두움으로 추진력을 얻어내는 'Lingo'가 낙천을 도입하고서 낭만적으로 달콤쌉싸름한 'Life’s Too Short'로 이어짐으로써, 마지막의 달콤한 'ICU (쉬어가도 돼)'까지 매우 유려한 낙차를 그리는 것이다. 음원과 패키지라는 두 미디어에 각기 적합한 방식을 안배한 흔적으로 보인다. 앨범은 연달아 듣는 매체이기에 흐름이 중요하고, 패키지는 한 부 한 부가 별개의 유닛이라 비연속적이어도 된다는 것이다. 물론 트랙순보다 클릭이 중요한 스트리밍 시대고, 앨범 여러 부를 한 번에 사는 팬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양극을 넘는 양극의 세계는 흔하고도 오묘한 단어 'Girls'로 묶인다. 치열하게 격투하는 것도, 이를 통해 구현되는 파워풀한 인물상도, 자기들만의 은어로 조잘대는 것도, SM 걸그룹 클래식인 '어른들은 이해 못 하는 우리들'이란 클리셰도 모두 에스파가 말하는 '소녀들'이다. 그럴 때, 타자화의 함정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이 극단적 이중성에는 획기적인 데가 있다. 양자 사이의 어떤 것도 '소녀들'의 입체적 면모로 담아낼 수 있다면 말이다. 가상 캐릭터를 포함한 8인조 그룹을 천명한 마당에 뭔들 못하겠냐 싶을 수는 있지만, 그만큼의 '영토'를 'Girls'라 선언해두는 것은 분명 또 다른 이야기다.
다만, 선택된 레퍼런스가 과거의 게임센터, 8비트 사이버펑크, 전투 소녀, 갸루 등 구시대 오타쿠 컬처와 아른아른 겹쳐지는 대목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리얼월드'의 가상성이 (또한 'Dreams Come True'의 원곡 아티스트인) SM의 90년대 작품 S.E.S.의 세계에 가파르게 수렴하기도 한다. 그것이 (특히 아이돌 시스템 내에서) '소녀'와 갖는 권력관계는 아무래도 뒷맛 상쾌하지만은 않다. 카리스마 있는 퍼포먼스에는 부정할 구석이 없으나, 압도적 기획의 아이돌이다 보니 말이다. 아니, 노래마다 수시로 나이비스(naevis)에게 은혜 갚는 까치처럼 압도적 감사를 표하다 보니 나이비스 <미녀 삼총사>로서의 에스파 같은 묘한 기분도 들어버리지 않는가.
그럼에도 'Life’s Too Short'와 'Lingo'는 "누가 뭐래도 조금 유치하게만 보여도", "내 방식대로" 가겠다고 하는 '소녀'다. 앞선 의문들은 다음 앨범, 또 다음 앨범에서 답을 듣게 되리라 기대하며 담아두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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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