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 시대, 도시의 이동을 탐구하는 교통, 철학 연구자 전현우와 도시인의 이동성 문제에 관심이 많은 노년내과 의사 정희원의 크로스 에세이.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
30km/h를 이해하는 방법
출근하면서 '거대도시에서 이동하기' 2화를 읽는다. 풍납동 병원에서 충북 청주 남이분기점 인근까지 평균 속도가 30km/h 선이었다는 보고를 본다. 30km/h. 이 값은 오늘의 교통에서는 아주 느린 속도로 취급된다. 돈만 내면 1000km/h로 날아갈 수 있는 시절 아니던가? 100m를 12초에 주파하면 달성할 수 있는 속도라면, 사실 인체도 낼 수 있는 값이다. 아주 날쌔다면.(우사인 볼트의 기록은 37.6km/h로 달려 나온 것이다) 우리의 중부고속도로는 제한 최고 속도가 110km/h이니, 제한 속도의 1/3로 달려온 아주 느린 길을 우리는 2화에서 본 셈이다.
하지만 이 속도는 배경이 조금 바뀌면 엄청난 속도가 된다. 30km/h는 도시 철도, 속칭 '지하철'의 평균 속도이다. 도시고속도로가 갖춰지지 않은 축에서는 택시를 타도 지하철을 따라잡기 힘들다. 실제로 2021년 서울 시내 도로의 평균 주행속도는 23km/h였다. 이마저도 매년 조금씩 느려지는 추세다. 서울 시내버스는 더욱 느려서 18km/h 수준이다.1)
물론, 지하철이 빠르다고 느껴지는 범위는 제한적이다. 서울의 반지름은 14km. 지하철이 이 거리를 가는 데 30~40분이 걸린다. 하지만 인천이나 수원처럼 40km 떨어진 지점까지 가려면 이 시간은 1시간이 넘어간다. 얼마 전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들의 잡담이 귀에 들려왔던 것이 떠올랐다. 이들은 1호선으로 수원에서 서울 동대문까지 1시간 20분이 걸렸다며, 1시간이 넘으면 너무 느려서 좀 아니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같은 1호선 열차 안이니 만큼, 10여 년 전 천안까지 전철이 개통하자, 그걸 누가 타냐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느릿느릿한 완행열차라는 이미지가 1호선 안에 떠다니는 듯했다.
시내에서는 빠르다고 평가받던 30km/h의 속도가, 시계를 벗어나면 좀 아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느려진다. 물리적 속도는 똑같더라도 그렇다. 차이는 극복해야 할 공간의 규모이다. 내가 역까지 버스를 타고 움직였던 거리(이동거리 1~5km),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서울 시내(5~20km), 1화의 출근길이었던 인천~서울(30~40km), 2화의 한 배경이었던 대전~서울(150km), 그리고 2화의 퇴근길이었던 서울~광주(300km), 모두 그 규모가 지수적으로 다르다. 빠르다는 평가, 느리다는 평가 모두는 이 공간을 배경으로 이뤄진다. 이 공간을 얼마만큼의 시간 내에 돌파해 내는지에 따라 평가는 갈린다. '하루'라는 제한된 시간을 살아가는 이상, 사람들은 제한된 시간 내에 이동을 마쳐야 한다. 한 시간 넘으면 힘들다는 평가는 바로 이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감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더 긴 시간을 들여 이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 시간 동안, 그것도 막히는 차 내에 갇혀 있다면 진이 빠진다. 2화의 주인공은 아마도 한밤중이 되어서야 광주의 숙소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느리다'와 '빠르다'가 모두 평가라고? 명확한 사실을 단순히 보고하는 술어처럼 생겼지만, 실상은 분명 그렇다. 제한된 시간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이동 방법인지, 그것을 우리는 늘상 평가한다. 효과적이라는 평가를 압축한 말이 빠르다, 그렇지 못하다는 평가를 압축한 말이 '느리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최고 속도'라는 물신
나는 이 평가 체계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서술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첫 책 『거대도시 서울 철도』의 시작 부분이 바로 이 문제를 논의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관심을 적용하다 보면, 늘 나를 화나게 하는 사실이 떠오른다. 바로 최고 속도가 이 평가를 왜곡하는 물신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2023년, 평범한 사람들이 시장에서 이용할 수 있는 최고 속도는 대략 1000km/h이다. 제트 비행기의 항속 속도.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거리는 대략 450km이니, 사실 한국은 30분 생활권으로 묶여야 하는 권역처럼 보인다. 교통 기술의 미래로 간혹 제시되는 하이퍼루프도 떠오른다. 1000km/h로 달려 서울과 부산을 20분 내로 묶어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의 주인공. 이들보다 느린 속도의 수단들도 한때는 '속도 혁명'이라는 실은 민망한 수사의 주인공이었다. KTX는 300km/h, 그리고 경부 고속 도로는 100km/h를 수사의 핵심으로 활용했다. 이들을 활용해 가속화된 삶이 무엇인지를 양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이 숫자들은 우리가 언제 너무 느리다고 말하는지, 그리고 빠르다고 말하는지 그 조건을 성찰하는 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숫자만 이야기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평균 속도로 이동한다. 최고 속도는 이 평균 속도를 결정하는 수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최고 속도로 달리는 차량은 길을 비롯한 수많은 사물의 지지 위에서 그 속도를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물의 저항과 마찰 덕에, 평균 속도는 최고 속도보다 항상 느리다. 최고 속도는 이 저항과 마찰이 최소화된 극단의 조건에서나, 달리는 시간의 일부 동안에만 구현된다.
나는 왜 이런 물신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화가 나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는 '빠르다', '느리다'라는 말이 일상에서 쓰일 때 고려되는 많은 변수들을 반영하기에 너무 빈약한 틀이기 때문이다. 길 주변의 도시와 사람, 그리고 비인간 생태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길에서 일어나는 일만 놓고 봐도 그렇다. 모든 차량은 운행 과정에서 정차할 수밖에 없지 않던가? 그러나 최고 속도와 평균 속도가 동일하려면 중간 정차가 없어야 하고, 출발과 도착 시점의 가속도는 무한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최고 속도는 일종의 수학적 극한값일 뿐이지 이동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
안전속도 5030 제도에 대한 일부 운전자들의 반발이 떠오른다. 앞서 말했듯 서울 시내 도로의 평균속도는 23km/h이다. 사실 올림픽 대로도 50km/h 수준이다. 극한에 불과한 최고 속도를 조금 낮춘다고 평균 속도에 큰 영향이 있을 리 없다. 경찰도 확인한 사항인데, 최고 속도의 물신은 50km/h, 30km/h를 단순히 느리다고 평가하도록 운전자들의 관점을 왜곡해 버린다.
미래 기술 개발이나 교통 투자에서 수사로 계속 이 물신이 쓰인다면 문제는 더 커진다. 가령 최근 여러 해 동안 수도권을 들썩거리게 만드는 GTX는 180km/h라는 최고 속도를 수사의 핵으로 삼았다. 고속 도로의 두 배 가까운 속도이니, '속도 혁명'이라는 말도 빈말이 아닌 것처럼 보였을 게다. 이런 그렇지만 이 열차의 표정 속도(정차 시간을 포함해 계산한 평균 속도)는 100km/h이다. GTX는 실은 무궁화호, ITX-새마을호, ITX-청춘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속도를 기록하는 수단이라는 말이다. 경부선 무궁화호는 지금도 멀쩡히 하루에 수만 명이 탄다.(서울~천안 사이 이용객만 하루 4만 명이 나왔다) 무궁화호를 잘 다듬어서 쓰면, 수조 원의 건설비를 퍼붓지 않고도 필요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을 풀어 책도 쓰고2) 기고도 해 봤지만, 이런 관점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 이제 왜 그런지 이해는 되지만, 여전히 납득할 수는 없다.
모빌리티
물론 이렇게 납득할 수 없는 부조리가 가득한 것이 세상이다. 무수한 부조리 앞에서 화병으로 죽어버리지 않으려면 결국 마음을 가라앉히고 관련된 연구들을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이런 식의 고민이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개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화에서도 등장한 '모빌리티(mobility)'가 바로 그것이다. 이 말은 인류의 삶이 점점 더 이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동 수단이 말 그대로 범람하여 삶의 모든 측면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자각에서 시작된 말이다.
존 어리 같은 학자들은 이 자각을 촘촘히 쌓아 올려 우리의 이동을 반성해 왔다. 그 반성 가운데, 누구나 곱씹었으면 하는 부분은 바로 22세기 초를 전망하는 다음 문단이다.
지금[2007년] 모빌리티의 미래를 예측한다면 다음 두 지점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쪽 지점은 지구온난화3)를 가속화시키는 여러 피드백 순환고리들을 통해 많은 시스템과 네트워크가 붕괴하는 세계이다. 다른 쪽 지점은 많은 모빌리티들, 특히 자동차 시스템을 통제함으로써 그리고 여러 원형 감옥 환경에서 사람들을 통제함으로써만 시스템과 네트워크가 제대로 잘 작동하는 세계이다.4) |
그러나 현실은 물론 이런 이야기를 우습게 여기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모빌리티'라는 말을 입는 이동 기계들은 많은 경우 첨단 기술을 구현하기 위해 덩치 크고 에너지를 많이 먹도록 설계되고 있으니. 지구 가열의 피드백 고리를 자극하는 기계에, 이동하고 있는 인류의 삶 전반을 반성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은 '모빌리티'라는 말이 이름으로 붙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모빌리티라는 말에 담긴 정신을 능욕하는 일 같다.
그렇다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조리는 '모빌리티'라는 말조차 집어삼킨 셈이다. 이 앞에서 무언가 하기 위해, 기업을 비판하는 목소리,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소비자를 비판하는 목소리, 정부의 무신경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비판은 조금만 빗나가더라도 형편없이 꼰대스러운 호통이 되기 쉽다. 남의 사정도 모르는 한가한 헛소리라는 많은 비난, 오늘의 교통을 풀기 위한 수많은 긴급한 요구들, 그리고 아마 이제는 거의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22세기의 암울한 이동의 이미지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면서, 내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붙잡고 있는 기둥은 다만 '모빌리티'라는 말 속에 흔적만 남아 있는 반성적 정신뿐인 듯하다.
1) 서울시 차량통행속도 보고서는 아래 링크를 눌러 확인할 수 있다. https://news.seoul.go.kr/traffic/archives/417 2) 『거대도시 서울 철도』 6장 3절 3) 2007년 또는 번역(2014) 당시에는 이 말이 일반적이었다. 2019년 이후에는 말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지구 가열(global heating)'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
추천기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전현우(교통, 철학 연구자)
서강대학교에서 분석철학을 공부하고, 동 대학원에서 자연종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교통, 철학 연구자. 과학 철학을 연구하던 중, 대규모 자원과 에너지를 소모하면서도 사람들을 매일같이 끌어들이는 교통 시스템의 마력 덕에 본격적으로 교통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자연과학연구소에서 교통에 대한 관심을 더 발전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