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연말 결산] 올해의 첫 책 – 고선경 & 한여진 시인
고선경, 한여진 시인에게 2023년은 첫 시집을 낸 해로 기억될 것이다. 출간 직후 중쇄를 찍으며 화제를 모은 두 시집의 주인공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글ㆍ사진 김윤주
20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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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경, 한여진 시인에게 2023년은 첫 시집을 낸 해로 기억될 것이다. ‘스트릿 문학 파이터’로서 개그 본능을 펼치는 고선경의 『샤워젤과 소다수』와 “두고 온 것들에게 자꾸 마음이 가서” 애틋함을 꾹꾹 눌러 담은 한여진의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출간 직후 중쇄를 찍으며 화제를 모은 두 시집의 주인공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첫 책을 낸 소감을 들려주세요. 

고선경 : 책이 나오고 나서 다시 쓰이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마냥 기쁘지는 않았어요. 자신이 없었습니다. 원고를 묶으면서 이게 최선인가 끊임없이 질문했고 자괴감을 느꼈지요. 시집을 만드는 건 참 특별한 공동의 작업이구나 느꼈지만 그 시집의 내용물이 저를 괴롭혔던 원고들인 이상 좋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못마땅해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김복희 시인님께서 한 인터뷰에서 그러시더라고요. ‘창작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작품을 폄하하는 것은 독자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한다고요. 그 말이 맞아요. 독자뿐만 아니라 시집을 함께 만든 사람들까지도 욕되게 하는 일이지요. 제가 이런 자리에 초대받은 것도 사실 시집 덕분이잖아요.


책은 저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는 동시에 저를 멀리까지 데려다주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들을 거치고 나니 되게 부끄러워졌어요. 제 책을 부끄럽게 여겼던 게 부끄럽고, 저의 오만과 불손이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부끄러움과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랑은 제 안에 이전부터 존재해 왔거든요. 책 출간 이전과 이후의 시간이 이미 이 책 속에 있는 것이라면, 이후의 이후에도 책은 재차 다시 쓰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변하면 책도 변하고요, 제가 변하지 않아도 책은 변해요. 그렇게 생각하니 무척 자유로운 기분이 듭니다. 제가 쓴 시가 저 없이도 자신들의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몹시 즐겁습니다.


한여진: 책이 나오고 막바지 가을비에 우수수 낙엽 떨어지더니 겨울이 도착해 있습니다. 아, 벌써 연말이구나 싶고 이제 곧 2023의 마지막 3을 어색하게 4로 고쳐 쓰는 날들이 올 텐데 저는 모든 해와 낯가리며 살고 있습니다. 2023년도도 2007년도도 1998년도도 언제 와서 언제 갔나 싶어요.


책상에 책 몇 권이 올려져 있는데요 아직은 데면데면합니다. 지나갈 때마다 제가 흘긋 보면 책도 저를 흘긋 쳐다봅니다. 그럼 우린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각자 하던 일을 합니다. 책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지만 서서히 친해질 예정입니다. 서서히, 라는 말을 좋아해요. 알아갈 것이 아주 많은 가능성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고선경: 용기와 사랑! 우선 재미있는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저는 유머가 때로 우리를 삶 쪽으로 끌어당기기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삶은 유머로만 가득하지 않습니다. 실패와 절망과 우울이 넘실거리지요. 그 안에서 첨벙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통통하고 가벼운 튜브 하나 던져 주고 싶어요. 아니, 튜브를 던지듯 농담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의 용기이자 사랑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책을 통해 전하고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울다가 웃어도 되고 웃다가 울어도 된다’. 이 책은 한 번이라도 그 사람을 웃기고 싶은 마음으로 절실한 농담인 거예요.

한여진: 저는 미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한 저를 미워할 때도 많고요. 그것들을 들여다보다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들과 미운 마음들을 가지고 놀다 보니 한데 뒤섞여 버렸고 점점 커지더니 고요하고 하얀 점이 되어 있었어요.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두부였는데 두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고개를 들었더니 온통 하얀 것들이었고 겨울인가 싶었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치더니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 하더라고요. 어디선가 본 듯한 그 사람은 화롯불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 두부를 얹어 굽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미워하는 마음을 잔뜩 가지고 사는 저를 서서히 좋아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고선경 시인의 「건강에 좋은 시」에는 시의 효능에 대해 고민하는 대목이 나와요. 두 분이 생각하는 ‘시의 효능’은 무엇인가요?

고선경: 사실 시에다 시의 효능 같은 거 없다고 이미 썼지만, 있다고 생각하면 또 너무 많이 떠올라요. 그중에서도 제가 톡톡히 효과를 본 효능을 알려드릴게요. 첫째, 입맛이 좋아집니다. 시를 열심히 읽거나 쓰고 나면 허기가 집니다. 그 상태로는 뭘 먹어도 맛있고 든든하게 느껴지거든요. 저는 실제로 이 방법으로 10kg을 찌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둘째,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시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실제로 시를 읽었더니 이해가 안 된다? 오!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해하지 않아도 감상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그럼에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는 또 여러 가지 효능이 있는데, 이 질문은 시의 효능을 묻는 것이니까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한여진: 시집을 아무데나 펼쳐보면 물이 콸콸 터지는 집 안에서 어리둥절한 내가 있고 순무를 훔쳐 달아나는 내가 있고 솥을 벅벅 닦다가 솥에 빠져 죽는 내가 있고 멧돼지가 되어 대문을 긁는 내가 있고 야생 살구를 밟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내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이란 것이 본디 여러 겹의 종이가 겹쳐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여러 개의 내가 겹쳐 있고 그 수많은 나들이 각자의 세계를 살고 있을 것이라는 감각, 그 수많은 나들을 만나지 않아도 좋지만 만난다면 만나기 전으로는 돌아가기 어려울 거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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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리어리

2024.06.03

[둘째,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게 됩니다. 시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실제로 시를 읽었더니 이해가 안 된다? 오! 괜찮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이해하지 않아도 감상이 될 수 있습니다. ] 작가님의 조언(?)덕분에 위안이 되네요. 시가 매번 어렵게 느껴져서 문학 감성이 부족한 스스로를 탓했었는데 이젠 읽어지지 않는 것은 읽어지지 않는대로 두며 마음 편히 감상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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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주

좋은 책, 좋은 사람과 만날 때 가장 즐겁습니다. diotima1016@ye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