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때마다 요즘은 별일 없는지, 우울감은 어떤지 꼼꼼하게 살펴주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만 만나면 마음이 풀어져 타인에겐 하지 않을 내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털어놓게 된다. 동갑내기지만 어른의 얼굴을 한 친구는 기억력도 좋아서, 내가 어느 때고 펼쳐 볼 수 있는 일기장 같다. 감정을 파악하고 언어화하는데 서툰 내게, 친구는 내가 경험한 과거의 사건들이 남긴 영향을 분석해 이야기해 준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나의 몸과 역사와 두려움, 수치심을 만든 ‘과거’라는 망령을 뿌리치려는 듯 몸을 떨며 진저리 친다. 방어적으로 몸을 웅크린 채 네가 뭘 아느냐고 소리치고, 나의 미래는 과거와 무관하게 그릴 수 있다고 호소하지만 친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계속 말한다. 그의 해석은 타당하고(타당한 것처럼 들리고), 나는 내게 벌어진 일들을, 나 자신을 부정하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여 할 말을 잃는다. 하루는 내가 꺼내 놓는 우울한 이야기들과 친구에게 부과된 ‘해석’이라는 노동이 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진 않을까 염려되어 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본인은 ‘안정형’ 인간이라 거뜬하다고 대꾸한다. 나는 그런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전보다 더 의지한다.
고시 준비를 하던 20대의 한 시절, 친구는 내가 곁에 두기로 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같은 시험을 준비하는 데다 형편도 비슷해 서로에게 의지하는 일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고시생이라는 신분은 시공간을, 그리하여 관계와 경험을 시험이라는 규격화된 틀로 찌그러뜨린다. 우리는 서로의 움푹 파인 몸을 끌어안고 자주 울었다. 나는 그 시절의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대했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친구와 나는 연거푸 탈락의 고배를 마시다 결국 고시를 관두고 각자 다른 길로 흩어졌다. 앞으로 무얼 할 거냐는 물음에 친구는 아버지의 작은 사업체를 이어받아 운영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나는 친구의 가족이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생각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아버지의 슈퍼에서 우리의 새 삶을 응원하는 파티를 하자는 내 제안에 친구가 미지근하게 반응했던 것만 기억난다.
몇 년이 흘러 친구와 나는 드문드문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친구가 슈퍼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요즘 자영업이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친구의 상황이 걱정됐다. 그러나 친구는 여전히 자신의 상황보다 나의 우울에 더 마음을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전보다 상황이 나아졌고, 이제 죽고 싶다는 생각도 달에 한 번 할까 말까 한다고 말하는 대신, 지나치게 사소해서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쳐온, ‘우울’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한 일상의 장면들을 붙잡아 친구 앞에 도로 앉혔다. 친구에게 세상의 모든 풍파가 너를 흔들 때에도 나는 여기 그대로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 너는 여전하구나, 친구가 말했다. 안도감에 한 말이었을까? 친구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에 크게 안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에게서 메시지 한 통이 왔다. 하는 일이 잘 풀려 자신의 사업체에 나를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친구가 자기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나는 암 수술을 앞두고 인생을 (지나칠 정도로) 비관하고 있었는데도 친구의 제안이 낯설고 기뻤다. 그러나 나는 친구의 회사, 나중에 알고 보니 슈퍼마켓은 아니었던 그곳에 가지 않았다. 그날로 우리는 연말연시에 짧은 인사만 남기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왜, 더는 우정을 나눌 수 없게 되었을까?
“우리를 결합시킨 구조가 없었더라도 사랑과 웃음이 싹틀 수 있었을까? 내가 내 삶을 저버리는 일은 절대 없을 테지만 가끔은 그러고 싶기도 했다는 말을 과연 누구에게 할 수 있었을까? (...) 기억은 어슬렁거리고⎯가로지르고⎯덮쳐 버린다⎯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살아갈 숨통이, 그리고 아마도, 어쩌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밤에 대해 농담도 던질 수 있는 숨통이 되리라는 말을 과연 누구에게 할 수 있었을까? 자, 떠나기 좋은 날이 왔네요, 라고 상상 속 인물이 말할 것이다. 이런 사랑은 방어할 필요가 없는 사랑, 다가올 내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유머를 던질 수 있는 사랑일 것이다.”1
식민 지배를 받던 국가 출신의 귀화한 미국 시민권자, 대학 교육을 받은 1세대 흑인 여성인 클로디아 랭킨은 관계를 재편할 변화를 기대하며 대화를 시작한다. 비행기 옆 좌석에 앉은 백인 남성과의 대화, 차이를 지운 채 동일성만을 전제로 친밀하게 지내온 백인 친구와의 대화 등 가까운 사이에서부터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외에 전혀 공유하고 있는 것이 없는(없다고 믿는) 존재들과의 대화까지 대화의 시공간은 파편적으로 흩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대화의 근간에는 ‘백인성’이 있다.
한국 여성으로서 이 책을 읽는 일의 난감함은 바로 이 지점에서 기인한다. 나는 랭킨과 다른 인종적 조건에서 자라온 사람으로서 그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읽는 일에 주저함을 느낀다. 그러나 랭킨이 참지 못하고 터뜨린 분노와 그가 시도한 대화 사이에 스민 두려움을 서술한 행간 사이에서 나는 나를 그 자리에 위치시키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나도 이 일을 겪은 적 있어, 라고 말하고 싶다는 유혹, 랭킨과 나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 ‘나는 당신의 말을 모두 이해한다’는 섣부른 공감을 시도하고 싶은 욕망.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것을 계속 시도하고 싶다.
랭킨은 백인 친구와 함께 인종에 대해 이야기하는 연극을 보러 간다. 평소 이해와 공감을 강조하던 친구다. 연극이 막바지로 향해갈 무렵, 한 흑인 배우가 백인 관객들에게 무대에 오를 것을 요청한다. 무대에 오른 백인들이 흑인이 사회에서 받아온 불필요하고 부당한 주목을 잠시나마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삶이 무대와 관객석으로 이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아마 백인 관객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터였다. 그러나 옆에 앉은 친구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마치 백인이 아닌 듯 자리를 지킨다. 그 상황에서 당혹감을 느낀 건 다름 아닌 랭킨이다. 랭킨은 친구가 앉아 있는 몇 분 동안 고조되는 긴장을 느낀다. 긴장감은 이내 압박감과 수치심, 분노로 증폭된다. 랭킨은 친구와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었단 감각이 실은 자신의 오해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애써 누르며 친구에게 말한다. “네가 흑인인 줄 몰랐어.” 친구는 대답하지 않는다.2
나는 다시 랭킨이 친구와 겪은 일을 나의 기억으로 치환해 그 안에 담긴 슬픔을 내 것으로 느끼는 일을 저지른다. 나는 백인성의 자리에 계급성을 위치시킨다. 나는 백인성을 드러내야 할 자리에 내가 겪은 폭력들을 배치한다. 나는 랭킨의 글을 자의적으로 분절해, 나의 우정을 이해하기 위한 맥락화라는 과오를 저지른다. 나는 친구와 내가 다른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안다.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그래서 나는 평생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할 때에도 친구가 내게 공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친구가 그런 내게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등을 쓰다듬거나 손등을 어루만져 주는 일이다. 나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죽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친구에게 차마 이 이야기까지 꺼내 놓진 못한다. 친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슬픔은 친구가 정한 선까지만이다. 친구는 내게 질문하고, 나도 친구에게 질문하지만 답하는 건 나뿐이다. 친구는 언제나, 대답하지 않는다. 우리를 엮어주던 구조, 조건, 역할이 무너진 자리에는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보고 있었을까?”
『그냥 우리』가 계속 붙들고 있는 질문은 “대화란 무엇인가”다. 랭킨이 시도한 대화들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대화가 서로의 어긋난 세계를 재조정하는 일, 오해를 회수하고 다시 친밀한 관계에 머무는 일의 전제가 되는 작업만을 의미하지 않는단 걸 알게 된다. 대화는 관계의 구조를 허물고 다시 짓는 일이다. 구조를 허물고, 갱신할 기회를 두려워한다면 대화를 시작할 수 없다. 『그냥 우리』가 내게 용기를 주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 글을 싣기 전 친구에게 원고를 보내 확인을 요청했다. 내 딴에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친구는 말없이 메시지에 하트 이모티콘을 보낸다. 나는 친구의 ‘대답없음’이 그의 대답이란 걸 알고, 이내 대화를 이어갈 의지를 잃는다. 어떤 폐허는 분노와 원망, 고통과 끊임없는 자기의심을 자양분 삼아 항상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더 이상 ‘우리’일 수 없는 사이에서 아프게 확인한다.
1 107쪽, 『그냥 우리』
2 251쪽, 『그냥 우리』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그냥 우리
출판사 | 플레이타임
구구 (노혜지)
2017년부터 독서모임 공동체 ‘들불’을 운영해온 모임장. 들불이라는 이름은 2019년 모임 구성원들과 ‘함께’ 만들었다. 2020년부터 도서 큐레이션 레터 ‘들불레터’를 발행 중이며 동료와 함께 『작업자의 사전』(2024, 유유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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