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장 많이 죽는 장소는 병원과 극장이다. 전자는 생명을 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마지막 숨을 쉬는 사람이 머무는 장소가 되고, 후자는 상징적인 죽음을 연출하고 경험하는 장소로 사실은 아무도 죽지 않(아야 하)는 곳이다. 〈국보〉에서는 이래도 좋은가 싶을 정도로 무대에서의 죽음이 자주 연출된다. 작중 연출되는 가부키 작품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게다가 무대 위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져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둘이나 등장한다. 심지어 키쿠오라는 주인공의 이름도 묘하게 신경쓰였는데, 키쿠오는 한자로 ‘喜久雄’라고 쓰는 이름이지만 ‘키쿠’라는 단어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아무래도 국화를 뜻하는 ‘菊’가 아닌가 싶어서였다. 장례식에 쓰는 그 흰 꽃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키쿠오가 흰옷을 입고 흰 꽃비 속에 있던 모습을 보고 다시 그 생각이 나고야 말았다. 죽음을 어떻게 아름답게 연출하는가가 관건이라는 듯, 연출과 연기가 모두 그 지점을 향한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이야기의 시작도 죽음으로부터였다.
영화 <국보> 스틸컷
영화의 첫 장면은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반복된다. 단순히 똑같은 일이 생긴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캐릭터들의 성격적 특징(약점) 때문에 상징적으로 같은 장면이 끌려나온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보〉에서는 특히 그렇다.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는 가운데 사람이 가득 들어앉은 일본 가옥의 넓은 연회석이 보인다. 창틀과 문틀은 착실하게 무대를 강조하는 ‘스크린’의 역할을 한다. 바깥이 무대일까, 안쪽이 무대일까. 이 장면을 보는 사계절이 살벌할 정도로 뚜렷한 한국의 관객에게는 그저 눈 내리는 어느 날이지만, 이곳은 나가사키다. 한겨울에도 포근한 날씨인. 소설의 첫 문장에서 나가사키에 흔치 않은 큰눈이 내렸다고 언급하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마치 무대에 흩날리는 종이 꽃가루처럼”1 비현실적으로 큰 눈이 내렸다. 이 종이 꽃가루같은 눈을 키쿠오는 앞으로 평생 반복해 떠올리게 될 예정이다. 흔치 않은 사건(나가사키의 폭설)이 트라우마적 사건(아버지의 죽음)과 강하게 연루된 이미지로 새겨졌기 때문이다. 이날 키쿠오는 〈세키노토(국경의 관문)〉라는 가부키극의 여자 등장인물 스미조메를 사람들 앞에서 연기했다. 문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실내의 무대에는 만발한 가짜 벚나무가 서 있다. 죽기에 딱 좋은 날씨다.
영화에서 키쿠오 아버지 곤고로의 죽음은 그 자체로 무대 위의 극처럼 연출되는데(이 상황의 중요한 관객으로는 키쿠오가 있다), 소설에서는 이 대목이 다르게 재미있다. 영화와 달리 키쿠오에 대한 작품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는 소설의 도입부에서는 원폭 피해 이후 나가사키 야쿠자의 세력도를 설명한 뒤 곤고로의 죽음을 보다 자세하게 보여준다. 시선의 주인공은 키쿠오가 아닌, 어쩌다 이 난투극의 관객이 된 2대손 하나이 한지로다. 곤고로는 2층으로 대피한다. 곤고로의 대피를 돕는 사람은 아우 입장인 아이코회의 츠지무라로, 그는 이날 하나이 한지로를 이 자리에 데리고 온 사람이기도 하다. 하나이 한지로는 그 츠지무라가 총으로 곤고로를 쏘는 장면을, 오랜 세월 친하게 지낸 동생의 손에 죽는다는 상황을 납득하지 못한 곤고로가 당황한 얼굴로 총을 맞는 모습을 목격한다(그리고 사흘 동안 의식 불명 상태로 병원에 누워 있다 사망한다). 소설의 죽음은 영화에서처럼 멋있지 않고, 복수는 더더욱 말끔하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 칼을 찌른 키쿠오는 상대에 경미한 상처를 입혔을 뿐으로, 피해 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나가사키에서 쫓겨난다. 그렇게 키쿠오의 오사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키쿠오가 목격하는 아버지의 죽음을 나가사키에 이례적으로 내린 폭설과 연결지어, 유년기의 끝이라는 시간적 장소성을 각인시킨다. 소설에서 “마치 무대에 흩날리는 종이 꽃가루처럼”이라고 쓴 것처럼, 이 눈은 실제로 무대에 흩날리는 종이 꽃가루의 모습으로 거듭 키쿠오의 눈앞에 나타난다. 어디서 비롯했는지 그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노스탤지어의 순간 혹은 장소의 이미지가 그 흩날리는 하얀 무언가가 되는 셈이다. ‘아름답다’는 이미지가 상실, 고통,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무대에 설 때마다 키쿠오는 유사 죽음을 체험한다. 아버지의 반대로 문신을 새길 수 없던 그는 (등 가득 문신을 새겼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비로소 등에 한땀 한땀 핏자국을 내며 문신을 새기게 된다. 싸우는 동안 등의 문신을 과시하듯 꺼내보였던 아버지의 사나움(칼로는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총을 맞고 죽은)을 떠올리면 물려받을 핏줄도 이름도 없는 가부키 무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키쿠오의 문신은 철저히 숨겨야 하는 것이다. 문신은 드러날 때마다 혐오의 대상이 되며, 재능은 한없이 그를 빛나게 하지만, 어쨌든 언제나 정신을 차리면 제자리인 것이다. 없는 것은 영원히 없다. 있는 것은 내 것이지만 영원하지 않다. 무대 위에서 죽을 때마다 키쿠오는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중첩시켜 경험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풍경 역시 무대 관객이 볼 수 있는 것과 다른 앵글을 제공한다. 분장실 들어가는 복도를 비롯한 무대 뒤편의 모습이라면 다큐멘터리에서도 흔히 다루어지지만, 배우가 리프트에 올라 무대 위로 천천히 올라가며 바라보는 무대와 객석의 정경을 배우의 눈으로 보게 만드는 것은 역시 영화가 잘하는 트릭이다.
영화 <국보> 스틸컷
가부키는 무엇보다도 혈통이 중요한 취급을 받는 일본의 전통 예술이다. ‘2대손’, ‘3대손’이라는 말은 절대적인 힘을 갖지만, 혈통이 아닌 사람이 물려받은 ‘3대손’이라는 명명이 힘을 잃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그래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 황실이 주목받는 것과 같은 패턴으로 가부키 가문의 이야기가 대중의 관심사가 되는데, 후자는 전자보다 노골적인 언론의 입방아에 오른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치카와 에비조. 카가와 데루유키 등이 얽힌 스캔들은 가부키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알려져 있는데, 여자 역할마저 ‘온나카타’라는 형식으로 남성이 연기하는 전통 때문에 오로지 아들만이 계승할 수 있는 가부키 가문의 승계자와 결혼한 여성들은 온 국민을 시어머니로 모시는 상황에 처해, 옷차림부터 아들 출산 여부에 이르기까지 온갖 구설에 오르는 것이다. 〈국보〉를 〈파리넬리〉나 〈패왕별희〉와 비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비슷하다고 볼 수 없는 이유는, 여성의 음역을 (여성이 아닌) 남성이 소화하는 고전음악문화를 다룬 〈파리넬리〉2의 경우 거세라는 형식을 통해 대물림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했고 이제는 사라졌다는 점, 경극 배우들의 이야기를 담은 〈패왕별희〉의 경우 이제는 여성 배우들이 여성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영화의 내용 같은 상황은 여러 면에서 역사 속 옛 이야기가 된 셈이다. 〈국보〉가 세습과 재능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가문의 후계자 슌스케와 견습생 출신 키쿠오의 이야기를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재능보다 세습이 압도한다는 점에서 가부키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는 이질감이 강할 수밖에 없다. “왜 저렇게까지…?”라는 질문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보〉는 이것이 옳은 전통임을 설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온갖 제약 조건 속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는 의미에 대한 가부키식 미학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것에 가깝다. 재일 한국인인 이상일 감독이 가장 일본적인, 혈통이 중요한 전통 문화를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를 만들어 실사영화 흥행 1위 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미묘한 상념에 잠기게 된다. 또한, 슌스케의 어머니를 연기한 데라지마 시노부 이야기를 빼놓을 순 없겠다. 일본 가부키 명문가인 오토와야의 7대 오노에 기쿠고로의 장녀인 데라지마 시노부는 남자로 태어났다면 가부키 배우를 하고 싶었다고 TV 다큐멘터리 〈정열대륙〉에서 밝힌 바 있다(남동생이 아버지를 이어 가부키 배우가 되었으며, 데라지마 시노부는 자신의 아들을 가부키 배우로 키웠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인간 국보. 소설 『국보』와 비교해서 영화에서 압도하는 인물로 슌스케의 어머니를 연기한 데라지마 시노부를 빼놓을 수 없는데, 가부키와 핏줄에 대한 집착과 키쿠오에 대한 원념을 보여주는 순간들은 무대 위의 장면들보다 오싹할 정도로 강렬하다. 스캔들에 시달린 키쿠오가 떠나기로 하고 인사를 온 날, 뭐라 말할 수 없는 얼굴로 말을 꾹 눌러참는 듯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가서 손자를 달콤하게 어른다. 첫 등장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어떤 표정을 지어도 속마음은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을 낭낭하게 풍기는 데라지마 시노부의 연기는 남성중심사회를 지탱하는 여성의 집념을 형상화한 것처럼 시종 이글거린다.
영화에서는 ‘보여주기’를, 소설은 ‘설명하기’를 각자가 잘하는 방식으로 활용해 가부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쿠로고’라는 명명은 알지 못해도 영화에서 검은 옷을 입고 무대 위에서 마치 그림자처럼 소품 정리부터 옷 탈의까지를 돕는 사람들을 보고 ‘쿠로고’의 존재를 이해하게 되는 식으로. ‘기타유’극은 인형 창극을 지칭하는데, 원래 인형극이었던 작품을 기타유로 공연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고 한다. 기타유를 알아야 목소리만 들어도 나쁜 할아버지인지, 젊은 미남인지를 알아듣게 하는 식으로 목소리를 구분해서 쓸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설명하면, 그래서 인형극같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텐데, 『국보』의 설명에 따르면 인형 창극에서 유래했다고 해서 인형극 같은 부분이 있다고 관객이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중요하다.
2009년에 요시다 슈이치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당시의 대화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장소’에 대한 그의 감각이다. 소설을 쓸 때 장소와 이미지가 먼저, 그 다음으로 사건을 떠올리기도 해서, 『악인』은 규슈의 고속도로, 『사요나라 사요나라』는 도쿄 근교 계곡을 무대로 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것이다. 나가사키에서 나고 자란 그는 나가사키에서 나가고 싶다는 욕구가 굉장히 컸다고 했다. 대학 진학 당시 첫째 조건이 ‘도쿄에 있는 대학’일 정도로. 이후 도쿄라는 도시는 그의 소설에서 오랫동안 하나의 캐릭터처럼 기능해왔다. 2023년에 출간 20주년 개정판이 한국에서도 출간된 『퍼레이드』는 도쿄의 한 아파트에서 어쩌다 동거하게 된 다섯 명의 젊은 남녀를 주인공으로 했고, 『일요일들』 역시 도쿄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렸고,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었던 『파크 라이프』와 『동경만경』 역시 도쿄라는 도시를 주인공으로 삼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나가사키를 무대로 한 소설도 쓴 적 있다. 『나가사키』에는 도시의 흥망성쇄와 궤를 같이하는 ‘미무라 가’라는 야쿠자 가문이 등장한다. 6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시기, 성장소설의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인물들을 앞으로 앞으로 밀어내는 작품이다. 『국보』를 읽다가 그 소설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래도 소설 초입의 무대가 되는 곳이 나가사키, 주인공은 야쿠자 집안의 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국보』에서 요시다 슈이치의 장소는 나가사키의 요정, 그리고 무대 아니었을까.

이상일 감독은 요시다 슈이치 작가의 『악인』 『분노』 『국보』의 세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다. 2010년에 <악인>을 만든 뒤 요시다 슈이치와 주기적으로 만나 온 이상일 감독은 15년쯤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가부키의 온나카타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나눈 적이 있다고 한다. 그 대화를 계기로 요시다 슈이치가 『국보』를 썼고, 책을 읽고 처음부터 요시자와 료를 키쿠오로 떠올렸다고. 요시다 슈이치는 『국보』를 위한 취재를 하는 동안 가부키 배우인 4대손 나카무라 간지로의 도움을 받았는데, 요시다 슈이치는 쿠로고 옷을 입고 그가 무대를 하는 가부키좌, 하카타좌, 쇼치쿠좌, 교토 미나미좌까지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때마다, 무대 리프트가 올라가기 시작한 순간, 자세를 아주 조금 바꾼 정도로 분위기가 확 바뀌는 모습을 몇 번이고 목격했다는 것이다. 그는 가부키에서 느낄 수 있는 ‘흐르는 시간’이 특유의 아름다움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는데, 내리는 눈과 흩날리는 꽃, 덧없이 스러지는 목숨 모두 그런 흘러가는 것들일 것이다. 흘러가는 것들, 돌아오지 않는 것들. 그리고 가장 공을 들여 연출되는 죽음, 죽음, 죽음. 이토록 많은 죽음이 거듭 이야기된다. 그래야만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는 듯이.
이다혜의 어떤 이야기는 두 번 태어난다
소설로 만화로 영화로 드라마로 무대로. 텍스트가 영상이 되고 영상이 텍스트로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이야기들, 이야기를 즐기는 다양한 방식에 주목합니다.
1 『국보』,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진환 옮김, 하빌리스 펴냄, 7쪽
2 2009년에는 체칠리아 바르톨리Cecilia Bartoli라는 여성 성악가가 〈희생Sacrificium〉이라는 제목의, 카스트라토의 예술을 다룬 음반을 발표했다. 메조소프라노인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파리넬리, 카파렐리 등을 배출한 나폴리 악파를 중심으로 카스트라토가 불렀던 아리아 15곡을 수록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국보 상 · 하 세트
출판사 | 하빌리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팟캐스트 <리딩 케미스트리> 진행.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몇몇 영화들이 얼마나 소설인지 얼마나 영화인지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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