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습함. 고립됨. 밀폐됨. 퇴로 없음. 굴다리나 터널을 홀로 걸어서 지날 때마다 떠오르는 말들이다. 굴다리나 터널 걷기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고 오히려 무서워하는 편인데, 가고자 하는 곳으로 향하는 길에 굴다리나 터널이 있다면 별수가 없다. 지나는 수밖에.
낮이나 밤이나 한결같이 어두운 그곳을 부러 지나는 사람은 잘 없다. 그렇기에 한낮에 걸어도 굴다리나 터널에는 아무도 없이 나 홀로일 때가 대부분. 혼자 걸을 때는 이런저런 공상이 가능하다. 만약 단 두 개뿐인 출입구가 폐쇄된다면 이곳에서 어떻게 생존해 나갈 것인가? 졸음운전을 하던 차량이 보행로를 침범한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안에서 불이라도 나면 걷던 방향과 그 반대 방향 중 어느 쪽으로 질주해야 할 텐가?
공상은 맞은편에서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자취를 감추어 버리는데, 이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서 마주한 사람이 혹시나 돌발 행동을 하지는 않을지에 대한 걱정에 온 신경이 집중되는 탓이다. 굴다리나 터널에서의 마주침은 마주침 외에 정신이나 시선을 달리 돌릴 곳이 마땅치 않기에 나와 상대는 ‘저는 당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여기를 지나갈 뿐입니다.’를 온몸으로 표 내며 서로를 지나친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가 타지 않을 버스가 올 때 해 보이는 몸짓과도 같은……. 다행히 아직까지는 한 번도 단순한 지나침 외에 다른 사건이 발생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곳은 안전한 곳이라는 결론에 이르지는 못하였고 나는 굴다리나 터널에 진입할 때마다 비슷한 생각의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자주 지나는, 혹은 지났던 굴다리 혹은 터널이라면 세 곳 정도가 있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에서 서대문역까지 걸어가 그곳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고는 했는데 그러려면 기나긴 ‘금화터널’을 지나야 했다. 두 발로 통과하기에는 터널이 너무 길었는데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지 지칠 때마다 몇 미터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는 학교가 끝난 뒤 아빠와 엄마가 일하는 회사에 가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회사 근처 어린이집을 다니는 동생을 데리러 가기 위해 석촌역에서 내려 굴다리를 지나 삼전역의 사무실로, 어린아이에게는 꽤 긴 거리를 걷고는 하였다. 그러려면 꼭 지나야 하는 굴다리가 있었다. 한 번은 석촌역에서 공중전화로 엄마 나 이제 석촌역이야, 조금만 기다려, 전화를 걸고는 역을 벗어나려는데 공중전화에서 엄청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다른 어른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못 하고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굴다리도 역대 기록으로 주파했을 것이다. 그곳과 관련해서는 그런 기억이 있다.
거여동에 살던 작년까지는 마천역 부근으로 산책을 할 때면 담쟁이넝쿨이 터널 표면을 뒤덮은 ‘마천터널’을 마주치고는 했다. 너머가 훤히 보이는 짧은 터널이었지만 넝쿨 때문일까 들어갈 때마다 어떤 각오를 필요로 하였던 터널이었다. 마천터널은 주로 퇴근 후 산책 혹은 달리기를 할 때 지나던 곳이었고 늘 동행자가 있었기에 밤에 진입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밤에 터널을 걸어 본 기억이라면 마천터널이 유일할 테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나는 이 세 곳의 굴다리 혹은 터널을 밤에 홀로 걸어 본 일이 없다. 단순히 밤에 홀로 그곳을 지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일 걸을 일이 있다 해도 다른 길로 돌아갔을 터. 나는 신촌동의 금화터널과 석촌역 부근의 굴다리와 마천역 인근의 마천터널을 이어 붙여 한밤의 산책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잔뜩 긴장한 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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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이라면 본래 마음을 가라앉히는 행위에 가까울 텐데 이거 원 굴다리 세 개를 이어 붙인 어둠 속을 지나려니 마음이 여느 때보다도 심하게 요동친다. 나는 집에 상시 구비해 두는 무기 중 하나를 챙겼다. 아동용으로 나와 길이는 짧지만 무척 단단한 나무 배트다. 등에 배트를 지고 산책길에 나서 보기는 처음이지만 돌발 상황이나 습격을 대비해 두어서 나쁠 것은 없다. 배트를 지고 나온 덕분에 더욱 긴장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다리 밑은 기억처럼 어둡고 한밤중이라 이곳을 지나는 차량도 적어 고요하다. 어둠에만 적응하면 산책다운 산책도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금화터널의 출구로 추정되는 검은 구멍이 보일 때쯤 나는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걸을 수가 있게 되었다. 석촌역 인근 굴다리로 접어들면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이 길은 엄마와 아빠를 만나러 가는 길이고 또 동생을 데리러 가는 길이다. 의자며 책상이며 변기까지도 내게는 너무 작은 어린이집에 들어가면 선생님이 나까지 불러다 우유라면을 주는 날도 있다. 아기들은 라면을 이렇게 먹는구나……. 나는 동생에게서 조금 떨어진 빈자리에 앉아 동생이 잘 먹는지 아닌지를 흘끔거리며 라면을 한술 뜬다. 아기들이 먹는 라면이라기에 별 기대는 없었지만 의외로 맛이 좋았다! 그날 이후로는 굴다리를 지날 때마다 우유라면 생각이. 물론 한밤중의 굴다리는 다 지난다 해도 우유라면이 기다리고 있을 리 만무하지만. 가뿐한 마음으로 굴다리를 지나자 마지막 순서, 마천터널만이 남아 있었다. 이곳을 지나는 나는 다 자라 있다. 긴장하는 마음만은 석촌역 굴다리를 지나던 초등학생 때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지만 다 자란 나는 긴장을 밖으로 마음껏 티 낼 수가 없는, 공중전화를 고장 냈다면 초등학생 때처럼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마천터널을 지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주친 사람은 없었고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은 바깥보다 더 깊은 어둠, 그리고 밀려드는 기억들뿐이었다. 기억들이 이렇게 자꾸만 밀려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것은 나무배트로 처리할 수 있는 종류의 대상이 아닐 텐데…….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정기현
2023년 문학 웹진 《Lim》에 「농부의 피」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걷고 뛰고 달리고 나는 존재들이 등장하는 소설집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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